07. 이혼해, 이 개자식아 (3)
클라이브가 아는 발레리안의 약점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클라이브가 그나마 발레리안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는 당연히 아테니아뿐이었다.
“아테니아에게 미련이 있지 않고서야, 제가 불륜을 저지르든 말든 무슨 상관이십니까?”
발레리안이 잠시 말이 없자, 클라이브가 그사이에 기세등등해져 재차 물었다.
그 순간, 발레리안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뭐 목숨이 여러 개인 건지….”
발레리안이 클라이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190cm에 가까운 발레리안이 클라이브를 내려다보자, 클라이브의 키가 작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니면 멍청한 건지.”
스윽.
발레리안이 손을 뻗었다.
클라이브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 떠. 설마 내가 너를 죽이겠나.”
발레리안이 처음부터 클라이브에게 손댈 생각 따위는 없었다는 듯 벽에서 단번에 검을 뽑아냈다.
클라이브가 슬며시 눈을 떴다.
발레리안의 입가에 적나라한 비웃음이 내걸려 있었다.
발레리안이 검을 거두어 검집에 넣는 동안, 클라이브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발레리안이 자신을 비웃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수틀려 검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바꿀까 봐 클라이브는 두려웠다.
“잡아가.”
발레리안이 턱 끝을 까닥이며 클라이브를 가리켰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고 초조하게 기다릴 아테니아를 생각하면, 발레리안은 클라이브와 입씨름한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치안대 기사들이 각각 클라이브와 레이시아를 붙잡았다.
레이시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클라이브에게 징징거렸다.
“이거 놔…! 라이, 어떻게 좀 해 봐!”
그렇지만 클라이브와 레이시아의 바람 장면을 치안대의 기사들이 직접 보았다.
그뿐이라면 어떻게든 직위로 찍어 눌렀을지도 모르지만, 하필 그 외에 또 다른 증인이 빈켄티우스 대공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은 기사들의 손에서 벗어날 여지가 없었다.
결국 레이시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기사들에게 연행되었다.
***
아테니아는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어둠 속에서 별장을 바라봤다.
클라이브와 레이시아가 그냥 곱게 끌려 나오지 않았던지, 시간이 조금 걸리고서야 치안대 기사들에게 붙들려 나오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거 놔! 내 발로 갈 테니까.”
클라이브는 붙잡혀 가면서도 치안대 기사들에게 성질을 부렸다.
“감히 어디에 손대! 나는 칼스이턴 후작 부인이 될 몸이란 말야!”
물론, 그것은 레이시아도 마찬가지였지만.
두 사람은 지극히 뻔뻔했다.
심지어 레이시아는 현재 아테니아가 버젓이 클라이브와의 혼인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당연히 자신이 칼스이턴 후작 부인이 될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레이시아보다 클라이브에게 더 화가 났다.
그가 얼마나 저딴 소리를 해 댔으면, 레이시아가 저렇게 찰떡같이 믿고 있겠느냔 말이다!
아테니아의 몸이 분노로 떨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레이시아의 뺨을 치고 클라이브의 머리채라도 잡아 뜯고 싶었다.
“내 여자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 너희들, 칼스이턴 후작가에 소송당하고 싶어?!”
“두 분 다 조용히 하십시오. 공무 집행 방해로 나라에 고소당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그러나 클라이브가 레이시아를 비호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아테니아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치안대의 기사가 뒤이어 클라이브와 레이시아를 조용히시켰기에 더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으나, 아테니아는 그대로 자리에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 또다시 참담함이 밀려왔다.
아테니아는 그대로 나무에 기대 주저앉았다.
드레스가 흙바닥에 끌리는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상대가 나를 배신하는 순간, 나의 사랑도 끝나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테니아는 절실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저를 배신한 클라이브에 대한 좋은 추억들이 가득했다.
사람의 기억과 감정은 기계의 어떤 부품처럼 빼고 끼워 교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새로운 고통이 되었다.
“아테니아, 괜찮습니까?”
클라이브와 레이시아를 먼저 보낸 후,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주저앉아 있는 아테니아를 보고 놀라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저 혼자 설 수 있어요.”
그러나 아테니아는 단호한 손길로 발레리안을 밀어냈다.
이 이상 그와 얽히는 것은 곤란했다.
그녀는 아직 칼스이턴 후작 부인이었고, 클라이브와 조금이라도 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
아테니아가 뒤로 훌쩍 물러서자, 발레리안의 손은 허무하게 허공에 머물다 내려갔다.
그러나 그는 더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아테니아가 원하지 않는 한, 발레리안은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칼스이턴 후작은 오늘 구금될 겁니다.”
“…구금이요?”
발레리안의 말에 아테니아의 두 눈이 놀라 커졌다.
이것은 귀족을 대상으로 전례 없던 일이었다.
보통은 유치장의 환경이 열악하다 하여, 연행된 귀족들이 저지른 게 중범죄가 아닌 이상 그들의 처우는 자택 연금 정도로 끝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클라이브는 연행되자마자 유치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발레리안이 아마 따로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칼스이턴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클라이브와 마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발레리안의 배려였다.
“…오늘 일은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아테니아가 드레스 치맛자락을 잡고 살짝 들어 올려 인사를 전했다.
두 사람 사이에 선을 긋듯 더없이 정중한 인사였다.
그녀는 자신이 이제 와 이러는 게 우스운 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도움을 청해 놓고, 일이 마무리되자마자 안녕을 고하는 인사라니.
오벨리아는 발레리안이 저를 두고 염치없다 욕한다고 할지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저야말로… 그대를 도울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더 다가오지도, 아테니아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처럼.
아테니아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스스로도 뻔뻔하다고 여겨지는데,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해 주니 어쩔 줄을 몰랐다.
“제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발레리안은 그런 아테니아의 마음까지 알아차린 듯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그대의 삶을 나아지게 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발레리안의 목소리에는 정말로 커다란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그가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있어요.”
클라이브가 간통죄로 잡혀 들어가면 아테니아와는 자연히 이혼이 된다.
치안대에 잡혀 들어갔으니,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태였다.
그러니 그녀의 이혼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발레리안이 먼저 안녕을 고하는 것이었다.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을 밀어내며 더는 미안하지 않도록.
그녀는 순간 울컥했다.
그러나 그것을 티 내지 않고 발레리안의 손을 맞잡았다.
“감사했습니다, 정말로.”
아, 정말이지 아테니아의 첫사랑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어찌나 완벽한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아테니아는 칼스이턴 저택에 난리가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저택에 돌아가자, 의외로 그곳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직 저택에 클라이브가 잡혀갔다는 사실이 안 전해졌나…?’
아테니아는 어리둥절했으나, 지금은 밤 중이니 클라이브의 구금 사실을 알릴 공무원이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스이턴 저택의 이들이야 후작이 출장을 간 줄 알고 있으니, 아직 평온한 것도 당연해 보였다.
그래도 저택에서 그의 얼굴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날 아침, 클라이브가 무사히 칼스이턴 저택으로 돌아오면서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다녀왔어, 티아.”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구금당했던 클라이브의 얼굴은 멀쩡해 보였다.
그는 정말로 출장에 다녀온 다정한 남편처럼 돌아오자마자 아테니아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클라이브 칼스이턴이 지금 자신의 앞에 있단 말인가?
“잘 다녀왔어, 라이?”
그러나 번잡한 속내와 달리, 아테니아는 정말로 제 남편을 반기는 것처럼 클라이브를 마주 끌어안았다.
밤새 레이시아를 안고 있었을 품이 자신을 끌어안는다는 게 역겨웠으나, 지금 당장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으니 그런 속내를 티 낼 수는 없었다.
“머무는 곳이 불편했어? 어쩐지 하루 만에 초췌해진 것 같네.”
다정한 부부인 양,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로 침실로 가며 아테니아가 물었다.
클라이브가 무슨 재주로 유치장에서 풀려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에 뜨끔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으리라 여겼다.
클라이브가 아침에 제대로 면도하지 못한 까칠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출장지가 아니라 유치장에 있다가 돌아왔기 때문이니까.
“아, 응. 낯선 곳에서 자서 그런지 잠을 좀 설쳤지 뭐야.”
그러나 클라이브는 아테니아의 상상 이상으로 뻔뻔했다.
그녀에게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죄책감이라고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일을 끝내고 나니 내 사랑이 일분일초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아침부터 말을 타고 달려왔지 뭐야. 덕분에 면도를 못 해서 상태가 엉망이지만.”
클라이브가 멋쩍다는 듯이 제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퍽 여전히 사랑에 빠진 순수한 사내 같아 보였다.
순간 아테니아는 기가 턱 막혔으나 두 손을 꼭 쥐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려는 것을 애써 참고 웃었다.
“그런데, 티아.”
클라이브가 상냥한 목소리로 아테니아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빈켄티우스 대공하고는 무슨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