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이혼해, 이 개자식아 (2)
“잠깐만요, 아테니아.”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팔을 붙잡았다.
그 손길이 갓 태어난 병아리를 손에 쥐듯이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굳이… 그대가 직접 갈 필요 있겠습니까.”
아테니아가 멈칫했다.
제 남편이 내연녀와 바람피우는 장면을 직접 눈에 담고 싶은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당연히 그녀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혼 법정에서 유책 사유가 명백하게 클라이브에게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현장을 덮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아테니아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아테니아의 속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발레리안이 제안했다.
그녀가 멈칫하여 그를 바라봤다.
“…대공 전하께서 왜요?”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따지듯이 물었다.
과거의 첫사랑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창피한 일이었다.
그런데 제 남편이 내연녀와 더러운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그곳에 어떻게 발레리안 혼자 밀어 넣는단 말인가.
그건 아테니아가 참을 수 있는 수치심의 도를 넘는 일이었다.
“제 말이 경솔해 보였다면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예상 밖으로, 발레리안은 도리어 사과를 해 왔다.
아테니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괜한 이에게 신경질을 냈다는 자각쯤은 있었다.
평소의 아테니아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막다른 곳에 몰려 있다는 반증이었다.
“……다만, 저는 오늘 일이 그대의 기억 속에 남지 않길 바랄 뿐이었어요.”
그리고 아테니아는 이어지는 발레리안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자신의 배우자가 내연 관계의 상대와 한 침대에 있는 장면이라니.
당연히 아무리 잊으려 해도 두고두고 기억이 날 터였다.
꿈속에나 나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미 아테니아는 클라이브와 레이시아가 함께 그의 집무실에 있는 장면을 본 것만으로도 하나의 악몽을 얻지 않았던가.
그녀가 두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제가, 들어가서… 두 사람의 머리채를 잡거나 뺨을 때릴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아테니아는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실제로 지금까지 자신이 만약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 여겨 왔다.
다시 만난 첫사랑의 앞에서 당당하게 방금 스스로 내뱉은 말을 실현하고 멋지게 이혼하는 여자이면 좋으련만.
아테니아는 자신이 없었다.
현실은 어쩌면 클라이브와 레이시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또다시 굳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한 말을 꺼낸 이유는 하나였다.
무슨 일이든 자신감 넘치던 아카데미 시절과 달라진 제 모습을 발레리안에게 보이는 게 너무 싫었다.
그의 앞에서는 못할 게 없던 아테니아 크리스나이고 싶었다.
“아테니아, 그대는 폭력 쓰는 걸 싫어했잖습니까.”
아테니아가 불쑥 고개를 들어 발레리안을 바라봤다.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 놀라워서, 은근슬쩍 칼스이턴 부인이라는 호칭 대신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아테니아는 불의를 당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맞설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었으나, 사실 폭력을 쓰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그랬다.
실제로 그녀는 누군가와 싸울 때도 아카데미의 학칙과 규율에 따라 합법적으로 상대를 짓눌렀다.
심지어 아테니아는 디어스 남작 부인에게도 증거를 모으라고 했지, 그 남편이나 내연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라는 말은 안 하지 않았던가.
이유는 간단했다.
아테니아의 아버지는 화가 나면 때리지는 않았으나 손을 들어 위협하는 사람이었다.
혹은 물건을 던지거나.
그녀는 그런 점이 딱 질색이었고 절대 닮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아테니아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가 손을 쓰는 데도 거리낌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아테니아가 해야 할 말이 있으면 물러서지 않고, 무슨 일이든 대체로 당당했으며 맞붙어야 할 일이 생기면 져 주는 법이 거의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달랐다.
그는 그녀를 알았다.
“그들은 맞아 죽어도 마땅하지만, 겨우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대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발레리안은 아테니아가 스스로 내뱉은 말대로 두 사람의 머리채를 잡거나 뺨을 때리지 않는 게 그녀의 의지인 것처럼 말했다.
그 말이 일순 바람피우는 남편과 내연녀를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기력함에 젖었던 아테니아를 감쌌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요, 아테니아.”
아테니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발레리안의 말이 너무 달았다.
참 애석하고 우스운 일이었다.
궁지에 몰린 아테니아를 위로할 사람이 남편도 가족도 친구도 아닌, 몇 년 전 그녀를 뻥 차 버린 첫사랑이라는 게.
“…그럼… 정말 죄송하지만, 부탁드려요, 대공 전하.”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던 아테니아가 마침내 대답을 내놓았다.
발레리안이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때마침 횃불을 들고 도착한 두 명의 치안대 기사가 발레리안의 앞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들은 밤이 어두워 아직 아테니아까지는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들어가지.”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기사들의 시야에서 가리고 섰다.
어차피 그만 별장 안에 들어가기로 정했으니 굳이 그녀를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가리고 선 뒤에야, 그의 옆에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는 궁금해하지 않고 발레리안의 말대로 별장으로 향했다.
제국의 유일한 대공이 보이지 않고자 하는 이를 굳이 눈에 담으려 노력해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으니까.
치안대 기사를 먼저 보낸 발레리안이 등을 돌려 아테니아를 돌아봤다.
시선을 마주친 그가 그녀를 안심시키듯 한 번 미소 짓고는 별장으로 향했다.
***
벌컥.
별장의 문이 강제로 열리고, 치안대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꺄악!!!”
낯선 사내들이 들이닥치자 레이시아가 놀라 이불로 제 몸을 다급하게 가렸다.
“너… 너희들 뭐야!”
클라이브 또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들을 막아섰다.
반 이상 풀린 셔츠의 단추들과 내려가다 만 바지가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칼스이턴 후작님, 윌터스 영애. 두 분의 간통 혐의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기사가 차분히 이렇게 쳐들어온 이유를 통보했다.
그러자 클라이브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간통이라니! 증거 있어???”
어느덧 옷차림을 모두 정돈한 레이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따지고 들었다.
“허….”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는 손길이 분주했던 주제에 그 뻔뻔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치안대의 기사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릴 지경이었다.
“그럼 지금 상황은 뭐란 말입니까?”
기사가 한숨을 참으며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클라이브가 앞으로 나섰다.
“그냥 옷을 갈아입고 있었을 뿐이네.”
레이시아의 뻔뻔함이 옮겨붙기라도 했는지, 혹은 쓸데없이 용기를 얻은 것인지는 몰라도 그는 과감히 헛소리를 시전했다.
“지금 이 시간에, 남녀가 단둘이, 옷을 갈아입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이걸 도대체 어떻게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왜 말이 안 되지? 실제로 우리가 연결되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치안대 기사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러니까 클라이브의 말은 넣지 않았으니 증거가 없다는 말이었다.
“인간이 개 짖는 소리를 할 줄은 몰랐는데.”
그때, 발레리안이 기사들의 사이로 나타났다.
“…빈켄티우스 대공?”
클라이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빈켄티우스 대공이 여기서 왜 나타난단 말인가!
“대공? 예의는 불륜을 저지르면서 다 가져다 버렸나 보지.”
대공 전하가 아니라 대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발레리안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자, 즉 황제뿐이었다.
클라이브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는 정말이지 자신보다 지위 높은 자들이 싫었다.
특히나, 발레리안 빈켄티우스는 더더욱.
“죄송합….”
꺼내기 싫은 말을 겨우겨우 내뱉듯이 클라이브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발레리안이 클라이브의 말을 끊어 냈다.
“쌍으로 이렇게 뻔뻔할 줄이야.”
발레리안이 클라이브와 레이시아를 번갈아 내려다봤다.
하찮은 것들을 보는 듯한 시선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굳이 쌍쌍의 바퀴벌레라는 티를 그렇게 팍팍 내야겠나?”
물론, 발레리안은 시선으로만 경멸을 말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클라이브와 레이시아에 대한 혐오가 물씬 드러났다.
“하긴, 끼리끼리라고 그러니 둘이 죽이 맞아 불륜 따위나 저지르고 있는 거겠지만.”
“대공 전하, 말씀이 너무하십니…!”
적나라한 비난이 연이어 계속되자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클라이브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콱.
그러나 그 순간, 발레리안의 검이 클라이브의 고개 옆 벽면에 틀어박혔다.
“감히 지금 누구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발레리안의 시선이 더없이 서늘했다.
클라이브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발레리안이 언제 검을 빼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검이 저 단단한 벽에 박혀 버렸다.
즉, 발레리안이 원한다면 클라이브의 목 따위 언제든지 날아갔을 거라는 의미였다.
생존 본능에 입각하여 놀라고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클라이브는 발레리안이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기억해 냈다.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의 앞에서만 얌전했을 뿐, 아카데미의 모두를 내려다보던 오만한 작자였다.
그것도 냉정하고 자비 따위 없는.
클라이브는 지금이라도 발레리안에게 얌전히 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클라이브.”
그러나 레이시아가 처음 보는 클라이브의 모습에 놀라 그의 팔을 잡아 왔다.
그제야 클라이브의 눈에 그녀의 존재가 들어왔다.
순간 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레이시아의 앞에서 주저앉아 자존심을 구긴 것이 뒤늦게 인지됐다.
인간은 때로는, 지나치게 무모해지기도 했다.
클라이브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발레리안을 공격할 거리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대공 전하가 왜 여기에… 설마, 아직도 아테니아에게 미련이 있는 겁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클라이브가 돌연 빈정거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