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나는 다를 줄 알았다 (4)
‘그러니까 지금… 칼스이턴 후작가의 덕을 봐야 하니, 나보고 이혼하지 말라고 하시는 건가?’
칼스이턴 후작가가 아니어도 크리스나 백작가는 부유하다.
그럼에도 후작가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크리스나 상단을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 아니라, 제일가는 곳으로 키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작가보다 더한 후작가라는 권력이 필요하니까.
아테니아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별개로, 크리스나 백작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네가 이혼하면 아직 미혼인 아이레스는 또 어쩌고. 크리스나의 첫째가 이혼했다고 사교계에 소문이 나 봐라. 크리스나의 대를 이어야 할 네 남동생의 앞길을 막기라도 할 참이냐?”
한 번 더 아테니아의 머리가 띵해졌다.
망치로 머리를 거세게 얻어맞은 듯한 얼얼함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원래부터 남동생을 아끼던 사람이긴 했다.
그래도 아테니아가 하고 싶은 것은 대체로 하게 해 주던 아버지였다.
약간의 차별은 있었어도, 그녀는 아버지가 제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아테니아는 부유한 집안에서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자랐으니까.
그러나 지금, 크리스나 백작의 모습은 딸의 행복 따위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게다가 크리스나 백작가가 가진 부는 고작 아테니아가 이혼한다고 흠집 날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테니아 인생의 전반이 걸린 행복보다, 혹시라도 아이레스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갈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마치, 아테니아와 아이레스를 같은 저울 선상에 올려놓을 수도 없다는 듯이.
“지금, 저보고… 집안과 아이레스를 위해서 제 불행쯤은 참으라는 말씀이세요?”
아테니아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세상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저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다정하고 열정적인 남편이 실은 기만자였음을 깨달은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이번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아테니아를 배신했다.
그 기분이 참으로 처참하여 감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남들 다 그러고 산다. 너만 유난 떨 필요 뭐 있어!”
그리고 그 처참하게 내려앉은 아테니아의 마음을, 아버지는 완전히 짓뭉개 놓았다.
“…아버지가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알았어요.”
결국 아테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이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인사는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나와 버렸다.
“저… 저… 버릇없는! 어찌 되었든 이혼은 절대 안 돼! 내 말 명심해라!”
아테니아의 등 뒤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마치 그것이 이명처럼 자신을 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깐만, 티아…!”
그리고 그런 딸을 아테니아의 어머니가 한발 늦게 쫓아 나왔다.
어머니에게 팔을 붙잡혔을 때,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테니아는 지금까지 자신이 잘 울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 깨달았다.
그것은 모두 자신이 버틸 수 있을 만한 환경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엄마, 어떻게 아빠가 나한테 그럴 수가….”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꼬박꼬박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던 아테니아였다.
호칭이 뒤바뀐 것은 진정으로 서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가 붙잡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안도해 버리고 말았다.
“티아,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다들 한 번씩 그렇게 실수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네가 이번만 잘 이해하고 넘기면….”
물론, 이어진 어머니의 말은 아테니아의 눈물조차 말라붙게 만들었지만.
탁.
“…티아!”
아테니아가 거칠게 자신을 붙잡은 손을 쳐 내자,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놀라 소리쳤다.
어머니의 표정에는 우습게도 이런 행동을 한 제 딸에 대한 서운함이 깃들어 있었다.
“실수라고요?”
아테니아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그녀는 인생 최대의 배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랑하여 믿고 평생의 약속을 한 남편에게.
그런데 그 배신을 겨우 ‘실수’ 따위로 포장하다니!
아테니아는 그 단어가 하필 어머니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들 단체로 짰어요? 대체 나한테 어떻게 다 같이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아테니아는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녀만을 두고 장난치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자신만 이토록 고통스러울 리 없었다.
“얘, 목소리 낮추렴! 너희 아버지 그렇지 않아도 화나셨는데….”
그러나 어머니가 안절부절못하는 대상은 아테니아가 아니었다.
아테니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분노는 그녀의 속을 마구 치받는데, 아무도 그녀의 분노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갈 길 없는 고통이 돌고 돌아 아테니아의 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엄마가 이러니까….”
아테니아는 뭐라도 밖으로 꺼내 놔야 했다.
끝없이 마음이 헤집어져 그 날카로운 조각들이 너무나 따끔거렸기 때문이다.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뱉고 마는 말이 있는 법이었다.
“평생 아빠한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사는 거예요. 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대개 그런 말은 내뱉는 순간 후회하고 만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지금, 후회했다.
그녀의 소원대로 어머니의 입은 다물렸으나, 그녀의 소원 중에 어머니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없었으므로.
“티아, 엄마는….”
어머니는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둘 중 누구도 차마 그 이상의 말을 잇지 못했다.
“…갈게요.”
결국 오랜 침묵 끝에, 아테니아는 다시 울 듯한 기분이 되어 돌아섰다.
차마 어머니를 다시 돌아볼 순 없었다.
***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완전히 진이 빠져 있었다.
쉬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칼스이턴 저택으로 곧바로 돌아왔다.
혹시라도 제 이혼을 막으려는 아버지가 클라이브에게 말을 전했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제 하녀들에게 혹시라도 크리스나 저택에서 클라이브에게 가는 소식이 있다면 빼돌리라고 명령한 뒤에야 안도할 수 있었다.
‘어쩌다가 내 처지가 이렇게 됐지…?’
아테니아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데도 미간은 찌푸려졌고, 눈시울은 뜨거워졌으며 코끝은 시큰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아테니아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정당하지 못한 비난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아테니아의 어머니는 분명 그녀에게 말을 잘못했지만, 그렇다고 어머니의 인생 전부를 깎아내릴 자격 따위 아테니아에게는 없었다.
그녀가 해야 했던 것은 어머니를 어떻게든 상처 입히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왜 잘못됐는지를 말해야만 했다.
틀린 선택은 늘 그렇듯이 후회를 불렀다.
그렇다고 한 번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내가 이혼 소송에서 이길 수 있을까?’
후회 뒤에는 또다시 다른 걱정이 따라 나왔다.
아테니아는 클라이브가 쉽게 제가 요구한 것들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소송으로 가야 할 텐데, 불륜을 입증할 증거를 모으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만에 하나 증거가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될 경우, 어떤 변호사를 선임하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녀가 가진 지참금이라면 소송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뒤가 문제였다.
아테니아의 집안에서 이혼을 그토록 반대하는데, 이혼한 딸을 반갑게 맞아 줄 리 없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뚜렷한 경제적 능력이 없는 그녀로서는 대단히 곤란에 처하게 될 것이다.
‘티아, 정말 그냥 이대로 졸업할 거니…?’
문득, 아테니아가 취직도 하지 않고 대학원도 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단히 안타까워하던 젊은 교수님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의 또래 영애 모두가 거의 졸업과 동시에 결혼 시장에 뛰어들었다.
아테니아도 그렇게 했을 뿐인데, 새삼 후회가 됐다.
‘티아, 네가 날 필요로 하면 난 언제든 네 편이 될 거야.’
소녀가 소년에게 고백했을 때,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거절했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자꾸만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던 소년의 말이 떠올랐다.
‘안 될 말이지….’
아테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면 있을 것이다.
상황은 조금도 낙관적이지 않았으나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딱, 클라이브가 퇴근해서 헛소리하기 전까지는.
***
저택으로 돌아온 클라이브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말했다.
“출장을 다녀와야 할 거 같아.”
클라이브에게서 어딘가 들뜬 기색이 드러났다.
아테니아도 평소 같았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그의 불륜을 알게 된 지금은 하나하나 모두 의심스러워 보였으니 그런 기색도 금방 잡아낼 수 있었다.
“…라이, 너 혼자 가?”
그래서 아테니아는 은근슬쩍 클라이브에게 물었다.
“아니, 레아랑.”
아테니아의 남편은 도대체가 그녀를 정말로 멍청이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토록 당당할 수가 없었다.
아테니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자신의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클라이브에게서 홱 고개를 돌렸다.
‘하… 레아? 지금 저 개자식이…!’
아테니아를 얼마나 업신여기면 감히 그녀의 앞에서 내연녀의 애칭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그 순간 그녀의 눈에 장식장 위에 올려진 화병이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 그러니까… 알지? 나랑 레이시아는 파트너잖아.”
뒤늦게 자신이 레이시아의 애칭을 입에 담았음을 깨달은 클라이브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파트너, 그놈의 파트너…!’
그건 클라이브가 아테니아를 속여먹을 때마다 늘어놓았던 변명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변명조차 매번 같았으니 참으로 성의 없던 셈이었다.
‘참자, 참아….’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화병을 꽉 쥐었다.
저 대가리에 들어 있는 게 더는 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그릇 깨듯이 확 깨 버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아테니아의 마지막 이성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티아. 나 출장 갈 짐 좀 챙겨 줄래?”
그러나 클라이브는 기어코 아테니아의 이성을 끊어 놓았다.
쨍그랑.
파열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