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나는 다를 줄 알았다 (3)
‘이 빌어먹을 기억력.’
아테니아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발레리안이 말하는 ‘약속’이 무엇인지 몰랐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녀는 그 약속의 내용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우습게도 지금껏 완벽히 잊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 한마디에 완벽히 떠올라 버렸다는 게 더 옳은 말이었지만.
‘티아, 네가 날 필요로 하면 난 언제든 네 편이 될 거야.’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서로의 애칭을 부르던 시절, 소년이 소녀에게 했던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까지 그게 유효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약속이 소년이 홧김에 내뱉은 것이 아니라면,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고백을 거절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전하와 제 사이에 그럴 일이 무어 있겠나요.”
아테니아의 대답이 단호했다.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이 나도 그런 약속 같은 건 없는 취급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 망설임 없는 말투에 발레리안이 멈칫했다.
아테니아는 그 모습을 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발레리안은 아카데미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그 속을 알 수 없다고 소문이 났던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이 작은 행동 하나하나 자꾸만 아테니아에게 들켰다.
그러니 그 나이의 소녀가 착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순간 기분이 확 나빠진 아테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이 늦은 시간에 너무 오랫동안 전하의 귀한 시간을 소비하시게 했네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애초에 둘은 더는 얽히면 안 되는 사이다.
아테니아는 클라이브와 이혼할 생각이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맞바람을 피워 그와 같은 인간이 될 생각은 없었다.
발레리안이야 또 아무 생각 없이 그녀에게 이리 구는 것이겠지만, 아테니아는 괜히 첫사랑과 얽혀 오해 소지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가…!”
그러나 아테니아가 돌아서자 발레리안이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아테니아를 붙잡는 그 손길이 더없이 조심스러워서, 그녀는 또 기분이 가라앉았다.
“제가 가는 게 좋겠습니다. 마침 일도 있고….”
발레리안이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마치 오갈 데 없는 아테니아가 이 야밤에 어디로 갈지 대단히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그녀가 멈칫했다.
당장 이 주점을 벗어난다고 해도 아테니아는 어차피 곧바로 칼스이턴 저택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모든 주점이 이곳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녀 혼자 안전한 곳을 찾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아테니아의 안전을 위해서는 발레리안과 동이 틀 때까지 함께 있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아테니아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겪은 일이 커 정신이 없었다지만, 첫사랑과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잘못한 기분이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전하.”
그리하여 그녀는 발레리안에게 인사를 전했다.
첫사랑과의 재회는 이것이 마지막이길 빌면서.
***
그러나 아테니아의 바람은 몇 시간 되지 않아 산산이 깨져 버렸다.
돌아간다던 발레리안이 주점 앞에서 벌을 서듯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녀가 외면할 수 없도록, 새벽바람을 오랫동안 맞았음을 증명하듯 잔뜩 붉어진 얼굴로.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아테니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발레리안이 이 앞에서 기다린 이유야 뻔했다.
굳이 안전한 주점에 그녀를 데려다가 놓은 주제에, 그조차 안심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앞에서 기다린 것이리라.
아카데미 시절, 소년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밤을 지새우던 소녀를 아무 티도 내지 않고 기다려 주었듯이.
그래서 아테니아는 더는 참지 못했다.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서자, 발레리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아테니아가 아까 모른 척했던 것처럼 자신을 외면하리라 생각한 듯했다.
“전하, 제게 대체 왜 이러세요?”
아테니아의 질문은 노골적이었다.
발레리안이 말을 돌리거나 괜한 변명을 덧붙이기 전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유부녀에게 보이는 호의로는 과하세요.”
아테니아는 일부러 자신이 이혼할 생각이라는 것까지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녀가 이혼하든 말든 발레리안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그에게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다.
아니, 정확한 속내로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차였다고 한들, 첫사랑에게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는 걸 제 입으로 확인 사살해 주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저는….”
발레리안이 말끝을 흐렸다.
아테니아가 그저 호의가 과하다고 말했다면 모른 척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변명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유부녀’라는 단어로 그를 거절했다.
이 이상 선을 넘는 건 아테니아를 모욕하는 셈이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마차를 타시는 것만 보고 가겠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럴 일 없을 겁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발레리안은 결국 별다른 변명 없이 사과했다.
지금 둘의 사이는 딱 그게 맞았으니까.
다그닥다그닥.
때마침, 발레리안이 미리 불러 두었는지 마차가 주점 앞으로 다가왔다.
아테니아가 한숨을 삼켰다.
발레리안이 저렇게 나오니 그녀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호의로 이 밤 내내 아테니아가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 더 무엇을 따지겠는가.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보여 주신 호의는 답할 길이 없으니 마음에 두겠습니다.”
말은 길었으나 결국은 훗날 따위 기약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즉, 이런 일은 마지막이라고 다시 한번 못 박은 셈이다.
아테니아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 마차에 올라탔다.
그로 인해 그녀는 보지 못했다.
발레리안의 얼굴이 얼마나 어두워졌는가를.
***
발레리안으로 인해 싱숭생숭하던 아테니아의 기분은 칼스이턴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잘 다녀왔어, 내 사랑?”
아테니아를 기만하고, 그녀를 욕보인 남자가 평소와 같이 반들반들 뻔뻔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테니아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치맛자락이 풍성한 덕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천에 파묻혀 드러나지 않는 것에 안도해야만 했다.
‘이 개 같은 자식….’
아테니아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한 주제에 자신을 끌어안아 오는 클라이브의 품이 역겨웠다.
“나 마중 나온 거야, 라이?”
그러나 아테니아는 기꺼이 두 팔을 벌려 클라이브를 마주 안았다.
‘이혼할 때까지는 네 장단에 맞춰 줄게.’
아테니아가 싸늘하게 식어 내린 속내를 숨기며 웃었다.
이혼하더라도, 그녀는 순순히 해 줄 생각 따위 없었다.
지난밤, 당황하여 현장을 덮치거나 사진을 찍어 증거물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애석했으나 기회는 또 올 터였다.
클라이브는 아테니아를 기만하고 욕보였다.
그녀는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모두 받아 낸 후 이혼할 것이다.
“응, 너 본 후에 출근하려고.”
클라이브의 다정한 말이 더 이상은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가 종종 그랬듯이 출근 전 인사로 입을 맞추려고 했을 때,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클라이브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라이, 네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으면 빨리 올걸. 시간이 꽤 지났어. 지금 안 가면 늦겠다.”
다행히 무의식적으로 도망쳤던 새벽과 달리 이번에는 적절히 대처하여, 시계를 보는 척할 수 있었으나 아테니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혹시라도 클라이브가 제게서 이상한 기색을 느꼈을까 봐 그녀는 은근히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렇네. 그럼 다녀올게, 티아.”
다행히 클라이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기색이었다.
이미 출근 준비를 해 두었던 터라, 그는 그대로 칼스이턴 저택을 나섰다.
“그럼 잘 다녀와, 라이.”
아테니아는 안도하며 손을 흔들었다.
이 정도야 얼마든지 웃으며 해 줄 수 있었다.
이 관계의 끝에, 웃게 되지 못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클라이브였으므로.
***
아테니아는 우선 헬레나에게 연락하여 지난 밤 자신이 먼저 돌아간 사실을 숨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그녀가 향한 곳은 자신의 친정인 크리스나 저택이었다.
크리스나 백작가는 제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상단을 가진 부유한 가문이다.
그러므로 아테니아의 가문에는 당연히 상단을 전담하는 변호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매우 유능했으므로,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훨씬 유리한 이혼이 가능할 터였다.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저택의 응접실에 들어서, 제 가족들만 남자마자 부모님께 말을 꺼냈다.
“아버지, 어머니, 저 클라이브 칼스이턴과 이혼해야겠어요.”
아테니아의 부모는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단번에 반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적어도 자신의 부모님이 이유쯤은 물어볼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할 말이 있나 했더니… 나이 든 부모 불러서 이 무슨 헛소리야!”
그러나 아테니아의 예상은 와장창 깨어졌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아버지의 노후에 그녀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클라이브가 바람을 피웠어요! 그런 남자랑 더 살 수는 없잖아요!”
아버지의 표정은 마치 아테니아를 질책하는 듯했다.
그 얼굴을 보며 울컥한 그녀가 지지 않고 소리쳤다.
쿵.
“어디서 부모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그래서 네 남편이 정부를 임신시키기라도 했다더냐?”
소파의 팔걸이를 내리친 크리스나 백작이 물었다.
그 말의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버지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호들갑 떨지 마라. 칼스이턴 후작가와 우리 가문 사이에 얽힌 사업이 몇 개인 줄 아느냐? 게다가 지금 벌이는 사업 중 후작가의 입김이 필요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도 아니고, 어차피 후작가의 후계는 네 아들이 될 텐데 왜 이리 철없이 굴어!”
아버지의 호령에 아테니아는 점점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그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