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나는 다를 줄 알았다 (2)
3년간의 뜨거운 연애, 1년간의 행복한 신혼.
많은 이가 그렇듯이, 그 꿈같은 시간들이 영원할 줄 알았더란다.
남들은 다 아니라고 해도, 내 사랑만큼은 특별하리라 생각하는 게 사람이니까.
아테니아도 그랬다.
애석하게도.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들이닥치면, 그 상황을 부정하고 싶기 마련이다.
아테니아의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렸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이 뼛속까지 시렸다가, 누군가 속에 불을 지른 것처럼 배 속부터 타오르는 거 같았다.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아테니아로 하여금 방금 그녀가 본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강제로 인지시켰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
아테니아가 넋을 놓은 채 중얼거렸다.
투둑, 눈물이 떨어진 것은 그녀가 원하던 게 아니었다.
아테니아는 이런 상황에서 눈물 흘리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본인이 좋고 싫고와 전혀 상관없이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그녀는 오늘 강제로 알게 되었다.
‘가서 한 대라도 뺨을 올려붙였어야지….’
아테니아는 자신을 책망했다.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리 도망 왔는가.
그러나 차갑게 식은 손끝은 아렸고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런 손으로 누굴 치겠느냐는 듯이.
그토록 당당하던 아테니아 크리스나는 어디 갔나.
수치스러웠다.
제 등 뒤에서, 제가 그토록 믿던 남편이 저를 비웃고 있는지도 모르고 티파티에서 그토록 당당하게 떠들었더란다.
나는 다르다고.
나만은 특별하다고.
내 결혼만큼은 완벽하다고.
그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던가.
그 무슨 오만이었던가.
아테니아가 자신의 침대 위로 무너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열기가 넘쳐흐르던 두 남녀의 공간과는 다르게, 그녀의 침실은 한없이 싸늘했다.
뜨거운 열기 대신에 비참함이 넘쳐흘렀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보낼 수 없을 것 같은 밤이었다.
아테니아가 비척비척 다시 일어났다.
곧, 소리도 없이 그녀의 방문이 열렸다 닫혔다.
***
아테니아는 로브를 두른 후 칼스이턴 저택을 나섰다.
아테니아가 일찍 돌아온 것을 보게 되면, 그녀가 두 사람의 불륜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헬레나의 저택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집으로 돌아갔던 아테니아가 헬레나의 저택으로 다시 왔는지를 설명해야만 할 테니까.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지금, 밤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정말… 이렇게 갈 곳이 없다니.’
아테니아가 자조했다.
이 야밤에 이런 비참한 꼴로 부모님을 뵈러 갈 수도 없었다.
황립 아카데미에서도 꽤 잘나갔던 그녀다.
큰 부족함 없이 자랐고 귀부인으로서 남편을 내조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제 삶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 결과가 집을 뛰쳐나오면 달리 갈 곳도 없는 신세였다.
‘남편 몰래 챙겨 둔 재산이 따로 없다고?’
아테니아가 현재 쓸 수 있는 돈은 그녀가 결혼할 때 가져온 지참금이 전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커다란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칼스이턴 가문의 내탕금이 없어도 아테니아가 여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자금이었다.
그런데 클라이브는 그녀의 내탕금을 매우 여유롭게 측정하기까지 했으니 굳이 돈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만큼 믿었다.
클라이브가 자신을 이렇게 밤거리를 헤매도록 만들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남편 몰래 따로 꿰차 둔 별장 하나 없었다.
다른 귀부인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밤거리를 헤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테니아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나, 이렇게 멍청했나?’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늘 만약 이런 일이 생기면 멋지게 이혼하겠노라 했으나, 실상 그에 대한 준비는 단 하나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만은 다르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나만은 특별한 사랑과 완벽한 결혼을 할 거라는 모든 이들과 똑같은 셈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 야시장이 선 덕에 그녀가 헤맬 밤거리가 어둡지 않다는 것 정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드레스를 입은 채로 밤거리를 헤매다가 안 좋은 일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꼬르륵.
아테니아의 배꼽시계가 울렸다.
이 와중에도 배가 고픈 게 어이가 없었으나, 야밤에 이토록 심력을 소모했으니 속이 허한 게 당연했다.
‘어디라도 들어가야겠어.’
여름이었으나 밤이 깊은 덕에 그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이런 밤에 나와 고생해 본 적이 없던 아테니아가 여름밤의 추위 따위를 알 리 없었다.
그로 인해 그녀의 옷차림은 여름 한낮의 날씨에 걸맞게 매우 얇았으니, 몸이 점차 얼음장처럼 식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테니아가 주점 하나를 골라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아테니아?”
아테니아의 귓가로 그녀를 부르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목소리를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것이던 간에, 아테니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니아, 그대가 왜 여기에….”
사내가 제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도 아테니아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는 언제나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테니아.”
사내가 뒷모습만으로 어떻게 아테니아임을 알았는지 의아했으나, 다시 그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결국 지척에 다가온 사내의 기척에 아테니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돌아섰다.
“…오랜만이에요,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
아테니아의 시야에 들어온 사내는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발레리안 빈켄티우스였다.
오래전, 아테니아를 무참히 거절했던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다른 주점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가려고 했던 주점은 거친 용병들이 많다는 이유였다.
솔직히 말해서 아테니아가 몇 번 가 보지 않은 거리의 생태를 잘 아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그녀는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의 사이가 껄끄럽다고 해도, 그녀의 안전을 담보로 모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시끌벅적하지만 훈훈한 온기가 도는 평온한 주점에서 그와 마주 앉아 있었다.
“…전하께서 여기 계실 줄은 몰랐어요.”
발레리안은 자리에 앉아 따뜻한 차와 음식들을 시킨 이후로 내내 말이 없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아테니아였다.
“북부에 계실 줄 알았는데요.”
발레리안은 황제의 애탄 부름도 거절하고 황립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그의 고향인 북부로 돌아가 버렸다.
그건 아테니아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카데미 시절, 발레리안이 직접 그녀에게 수도에 남겠노라고 말했었으니까.
물론, 의문이 든다고 해도 물을 수는 없었다.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고백을 거절함으로써, 두 사람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그렇게 해서 무려 5년 만의 재회였다.
5년 동안 단 한 번도 수도로 내려온 적 없던 발레리안이 왜 하필 지금 여기에 있는지, 아테니아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일이 있어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발레리안이 멈칫하더니 짧게 대답했다.
서로 상세한 안부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었으니, 아테니아 또한 더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또다시 침묵이 둘 사이에 오갔다.
“음식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음식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영원히 깨지지 않았을 침묵이었다.
“…우선 드십시오, 따뜻한 걸로 속을 채우고 나면 한기가 좀 가실 겁니다.”
발레리안이 음식을 권했다.
그러나 음식을 눈에 담은 아테니아의 표정은 자신도 모르게 굳어 버렸다.
식탁을 채운 것은 온통 그가 고른 음식들이었다.
365일 중 절반이 넘게 눈이 오는 북부에서 자란 발레리안은 대체로 담백하고 간이 약한 음식들을 선호했다.
그와 반대로, 아테니아는 수도와 남부에 있는 크리스나 영지를 오가며 자란 덕에 향이 강하고 간이 꽤 강한 음식들을 좋아했다.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은 단언컨대 전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아테니아는 순간 울컥했다.
‘도대체 이걸 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데…?’
발레리안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아카데미 시절에도 이런 사소한 배려들로 아테니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놨다.
그래 놓고서는 그녀의 고백을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지만.
“아테니아…?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까?”
아테니아가 도통 숟가락을 들지 않자, 발레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그의 말이 유독 조심스럽게 들리는 것 또한 제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요, 잘 먹을게요.”
아테니아가 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음식을 제 앞접시에 덜어 냈다.
발레리안이 자신을 신경 써 준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식사하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아테니아가 홀로 어색하지 않도록 그녀의 속도에 맞추어 함께 식사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현 상황을 불편해하면서도 기묘하게 편안하게 느끼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입에 맞는 음식을 먹어서인지, 남편과 그 파트너의 불륜 현장을 보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입맛이 돌았다.
아테니아를 제외한 칼스이턴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 향이 강한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그동안 먹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면 이런 거 하나 내 마음대로 못 먹고 있었네.’
칼스이턴 저택의 살림은 당연히 아테니아가 맡고 있었다.
그래서 요리사가 식사 메뉴를 짜 오면, 그것을 마지막으로 검토하는 것 또한 그녀였다.
그런데도 1년 내내 자신의 취향대로만 식탁을 차려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아테니아가 쓰게 웃었다.
마냥 행복한 1년간의 신혼 생활이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이런 거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 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아테니아.”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아테니아의 입맛이 뚝 떨어지기 전에, 가만히 식사만 하던 발레리안이 먼저 그녀를 불렀다.
아테니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문득 말을 꺼냈다.
“혹시… 제가 아카데미에서 그대에게 했던 약속을 기억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