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는 다를 줄 알았다 (1)
쾅.
아테니아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놀랄 새도 없이, 그녀의 남편 클라이브가 그 틈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당신, 바른대로 말해. 발레리안 빈켄티우스와 무슨 사이야…!”
“당신이야말로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클라이브의 행동과 아주 대조적으로, 아테니아의 말투는 침착했다.
물론 그 속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뭐라고 한다고.’
아테니아는 빈정거림을 꾹 눌러 담았다.
자기는 다른 여자랑 놀아난 주제에 아내인 아테니아가 다른 남자랑 조금 어울리자 광분하는 꼴이 어찌 달갑겠는가.
“무슨 사이이긴 한가 보지?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리는 거 보니!”
클라이브가 아테니아의 양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그 악력에 어깨가 욱신거리자,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리고 곧 아테니아의 마음이 수치심으로 가득 찼다.
겨우 이런 놈이 힘을 쓴다고 해서 움츠러들다니!
수치심을 넘어 분노가 차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게 어디서 힘자랑이야! 무슨 사이면 네가 뭐 어쩔 건데 이 자식아!”
“아악!”
아테니아의 손이 클라이브의 아래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이 방정맞은 아랫도리를 뽑아 버릴까 갈등했다.
아무 데나 놀리고 다니는 이 더러운 아랫도리, 아작 내 버린들 뭐 어떤가 말이다!
“놔… 어억…! 놔, 이거, 놔!”
클라이브가 고통 어린 신음을 내지르며 발버둥 쳤다.
아테니아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내가 오늘 저걸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복수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그렇지만 그런 놈에게 인생을 걸지는 마세요.’
돌연, 발레리안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입술을 질끈 깨문 아테니아가 애써 심호흡을 하며 들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 발휘할 모든 인내심을 끌어모은 결과였다.
적어도 클라이브같이 힘자랑이나 하는 똑같은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인내심이 끝나기 전에, 쥐고 있던 흉물스러운 것을 놓으며 제 남편을 밀쳐낸 아테니아가 그의 면전에 이혼장을 던지며 선언했다.
“우리 이혼해. 클라이브 칼스이턴, 이 개자식아.”
수백 번을 벼르고 별렀던 말이 마침내 아테니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
귀부인들이 모이다 보면 이 소리 저 소리 다 나오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그중에서도 다방면으로 거지 같은 남편들에 관한 이야기는 흔한 주제였다.
“…우리 남편, 바람피우는 것 같아.”
“뭐?”
“무슨 그딴 놈이 다 있어!”
“네가 네 남편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리고 또 그중에서도 바람난 남편의 이야기는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나오는 것이었다.
동시에 모든 귀부인이 가장 큰 반응을 보이는 주제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오늘 이 모임의 주인공은 디어스 남작 부인 차례인 모양이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역할이겠지만.
“그래서 증거는 잡았어?”
귀부인 대부분이 제 일처럼 흥분하는 가운데, 오직 아테니아만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그냥 조용히 있었겠지만, 디어스 남작 부인과는 꽤 오래 알고 지낸 사이기에 드물게 말을 뗀 것이었다.
“…증거?”
그러나 남작 부인은 그런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듯 되물었다.
“증거를 잡아야 손해 보지 않고 이혼하지. 잘못한 건 네 남편인데,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어?”
아테니아가 결혼 전부터 다짐한 것이 있었다.
만약에, 혹시라도 자신의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면 증거를 모아 철저하게 응징한 후 멋지게 이혼하리라.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었다.
아테니아는 지금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한순간의 실수이든, 잠깐의 유흥이든, 혹은 그네들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든 알게 뭐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부부간의 약속과 신뢰를 깨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 일진데.
그러나 아테니아의 말을 들은 남작 부인의 표정은 기묘했다.
“음… 그게, 말이지.”
그 애매모호한 대답에 이번에는 아테니아가 멈칫했다.
남편의 외도로 남에게 털어놓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만큼 마음고생을 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당연히 이혼이 아닌가.
설마 그런 남편과 다시 잘 해 보기라도 하겠다는 뜻일까?
아테니아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지자, 디어스 남작 부인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우리 사이에는 아이도 있고….”
“바람피운 아빠랑 같이 사는 게 아이들의 정서와 교육에도 더 나쁘지 않을까?”
“또, 가문 간의 이해관계도 있고….”
아테니아의 반박에도 디어스 남작 부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남작 부인은 실로 퍽 난감해 보였다.
“잠깐, 잠깐, 앨리스. 이 결혼이 끝난다고 해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그런데 왜 네가 변명을 하는 거야?”
그것을 듣다 못한 아테니아가 앨리스 디어스의 말을 끊었다.
앨리스의 말은 결국 어떻게든 계속 바람피운 남편과 살겠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아테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해, 아테니아. 앨리스도 괴로울 거야. 게다가 결혼을 깨는 게 어디 쉽니?”
앨리스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귀부인 중 한 명이 앨리스의 편을 들었다.
마치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이.
그로 인해 아테니아의 표정은 더욱 이상해졌다.
앨리스의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순간 두 사람의 결혼은 이미 깨졌다.
그런데 왜 깨진 것을 억지로 이어 붙이고 있으려는 것인지, 아테니아는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아테니아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 얘는 아카데미 시절에도 그런 면에서는 가차 없었잖아.”
또 다른 귀부인이 말을 얹었다.
두 사람 모두 방금까지 앨리스의 남편을 욕하던 이들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정부를 두는 건 흔한 일이고, 그래 봤자 다들 가정으로 돌아오잖아. 그런 거 때문에 이혼했다면 같이 사는 귀족 부부가 없을걸.”
“헬레나…!”
아테니아가 헬레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 모임에서 아테니아와 가장 친하게 지내던 헬레나까지도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자신이 마치 이방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너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 아테니아.”
앨리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황급하게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비꼬는 건 아니야. 네가 정말 부럽다는 이야기니까.”
아테니아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독하게 쓴 것을 먹은 듯하지만, 결코 울지는 않는 그 표정.
앨리스의 표정이 딱 그랬다.
아마 누구라도 그 표정을 보면 더 따지고 들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너처럼 대응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앨리스는 진심으로 아테니아를 부러워했다.
그러자 귀부인들이 모인 테이블 위로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앨리스.”
결국 아테니아가 더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
원래는 귀부인들끼리 모여 헬레나의 저택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누구도 그녀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헬레나의 저택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굳이 자신의 남편이 기다리는 칼스이턴 후작저로 돌아왔다.
그녀는 혹시라도 늦은 밤, 사용인들에게 피해를 끼칠까 봐 마부를 보내고 조용히 뒷문으로 들어섰다.
그게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을지는 몰랐을 테지만.
아테니아가 조심조심 발소리를 죽여 층계를 올랐다.
그리고 2층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남편의 집무실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발견했다.
‘어…? 왜 집무실에 아직까지 불이 켜져 있는 거지?’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집무실로 다가갔다.
희미하게 열려 있는 문틈 새로 도란도란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혹시라도 제 구두 소리가 들릴까 봐, 뒤꿈치까지 든 채로 문틈 너머를 내다봤다.
“근데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
“어차피 아테니아는 몰라. 눈치챌 여자였으면 우리가 만나는 1년 동안 알아차려도 진즉에 알아챘겠지.”
그리고 안을 들여다본 아테니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녀의 남편, 클라이브와 황성에서 그와 함께 일하는 파트너, 레이시아가 누가 봐도 야릇한 자세로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이브의 책상 위에 앉은 레이시아.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한 그.
밀착된 두 사람의 상체.
숨결이 섞일 만한 거리에서 이어지는 서로를 향한 속삭임.
그 모든 것은 클라이브가 아테니아의 남편만 아니라면, 그와 레이시아를 마치 열렬한 연인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하여간 그 여자도 멍청하다니까? 아무리 너랑 내가 파트너라지만, 우리가 그렇게 붙어 있는데도 나한테 널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꼴이라니!”
레이시아의 깔깔거리는 목소리가 아테니아의 귓전을 강타했다.
아테니아는 머리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띵해졌다.
레이시아의 말대로 그녀에게 남편을 부탁하는 제 꼴이 얼마나 우스웠을지 생각하니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그래서 언제 이혼할 거야, 라이?”
아테니아가 몰려드는 충격에 아무 말도 못 하는 와중에도 레이시아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아테니아만이 불러야 할 애칭을 입에 담는 레이시아의 목소리는 한없이 간드러졌다.
“조만간 말할 거야. 그거보다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 레아.”
그리고 아테니아의 남편은 레이시아의 물음에 마치 아테니아와의 결혼을 깨는 것이 당연하다는 양 말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아테니아에게 입을 맞췄던 그 입술로.
이 모든 상황이 아테니아는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주춤주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분명 아테니아의 성격대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두 인간을 아작 내 놔야 맞았다.
그런데 왜, 남편과 그 보좌관의 밀회를 발견한 지금 자신이 도망치고 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아테니아는 도망쳤다.
그 자리에서, 제 남편과 그의 파트너인 레이시아가 없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