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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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로잘린은 예전보다 요즘의 아버지가 좋았다. 여전히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목소리가 달라졌다.

그 속에서 애정을 느낄 때면 무척이나 기뻤다. 그래서 그걸 더 많이 얻고자 아델이 새어머니가 돼 주길 원했다.

하지만 그 모든 기대는 어느 날, 저택으로 날아온 청첩장 하나에 전부 깨졌다.

“아버지.”

슬쩍 눈치를 보는 딸을 보며 헤이른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괜찮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초연해 보여 로잘린은 묻고 싶은 말을 삼켰다.

‘정말 괜찮으세요?’

말은 하지 못했어도 눈빛으로 의도가 전해졌던 모양이다. 헤이른은 거기에 답을 내놓았다.

“그럴 리가 있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그땐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로 돌아간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겠는가.

그저 헤이른은 자신의 죄를 감수하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나는 좀 더 이기적인 성정이었던 것 같은데.’

헤이른, 그도 많이 변했다.

“그래, 오늘은 어디까지 공부를 했지?”

“물의 정령을 더 많이 부르는 법을 공부했어요.”

“아이카가 잘 가르치나?”

“네! 좋은 스승님이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이제 들어갈까? 다음 수업이 있을 테니 말이다.”

“네!”

씩씩하게 대답하고 걸어 나가려던 로잘린은 뒤늦게야 헤이른이 내민 손을 발견했다.

‘잡아도 되는 걸까?’

한참 눈치를 보고 있자니 헤이른이 먼저 손을 뻗어 로잘린의 손을 잡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로잘린은 눈이 동그래져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아버지인 헤이른이 손을 잡아 준 건 처음이라 이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웨더필드도 많은 것이 변해 가고 있었다.

아만다는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셀렉시온 님이 앓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앓은 이유는?”

“고문입니다. 잘 드러나지 않는 부위에만 하긴 했습니다만, 완전히 감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한 자는?”

“다들 입 다물고 있긴 하지만, 도미니크가인 모양입니다.”

“그럼 덮어.”

서슴없는 목소리에 보고를 하던 이는 당황했으나, 아만다는 말을 되돌리지 않았다.

“덮으라고. 왜 오라버니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귀찮게 하나 모르겠네.”

아무리 폐황제라도 지금 상황이면 국장으로 치러야 했다. 그럼 최대한 간소하게 치른다고 해도 주 단위의 시간이 소요된다. 바쁜 상황에서는 못마땅한 것이다.

“아만다 님.”

“똑바로 부르도록 해.”

아만다의 사나운 시선에 그제야 호칭을 고친다.

“폐하.”

“그래, 이제는 내가 황제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지. 그러니 내가 말하는 대로 해.”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이 일이 밖으로 퍼져 나가면 끝나는 건 네 목숨 하나가 아닐 거야.”

“물론입니다.”

“그럼 나가 봐.”

그렇게 나가자, 남는 이는 시녀와 기사뿐이었다. 그러나 아만다는 그들조차 내보내고자 했다.

“잠시, 잠시면 돼.”

기사는 아만다의 안전을 걱정해 나가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그녀의 고집에 졌다.

“문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아만다는 혼자가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내내 억누르고 있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리사.”

너를 위해 복수하려고 했는데, 이미 다른 사람의 손에서 모든 게 끝났어. 그래도 끝이 불운했으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까?

아만다는 지금 여기 없는 자신의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시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다. 부디 그녀가 하늘에서 행복하기만을 말이다.

한편, 루카스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국장이라고.”

“폐황제라도 지금 분위기에선 국장을 치르는 게 낫습니다. 그럼 현재 황제이신 아만다 님의 자비로움도 널리 알릴 수 있을 테니까요.”

키슈가 태연하게 루카스의 말을 받았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닌 걸 알잖아.”

“압니다. 국장 기간 전후로는 파티와 행사가 금지되어 있으니 그러시는 거죠?”

“그래, 결혼식을 좀 더 미뤄야 하게 생겼어. 초대장도 다시 만들어 보내야겠군.”

“저런. 슬픈 일이군요.”

“놀리지 말고.”

“저는 진심입니다. 루카스 님이 결혼식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걸요. 그 때문에 마들렌은 벌써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바쁩니다.”

“그건 고마운 일이군.”

“그러니 상심하지 마십시오.”

자연스럽게 루카스를 위로한 키슈는 머릿속으로 다시 작성해야 할 초대장 수에 대해 생각했다.

국장 기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규모만은 제법 커다랬다. 처음에 아만다는 최소 비용을 쓰려고 했지만, 아델이 그를 반대했다.

“이럴 땐 크게 쓰는 게 나아요. 차가운 황제보다 인간적인 황제가 나은 법이죠.”

그 말에 아만다는 입술을 짓씹었지만, 결국엔 동의했다.

그리고 장례가 치러지던 날,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귀족들은 마지못해 모이긴 했으나, 셀렉시온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자는 볼 수 없었다.

아델 또한 꽃을 내던지기만 했을 뿐, 그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만약 살아 있었으면, 론슈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남자였다. 그런 자에게 넘겨줄 동정심은 없었다.

돈을 많이 들인 장례치고 모든 것이 조용하게 끝났다.

‘이제 작업을 좀 더 하면 되나.’

그래도 형제이기에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셀렉시온에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 준 현 황제. 나름 훈훈한 이야기였다.

* * *

국장에 이어 추모 기간마저 끝나자 루카스는 재차 청첩장을 돌렸다. 이제는 더 이상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믿었던 시절도 있었다.

“정말 이걸 전부 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예전에 루카스의 작은 저택에서 치렀던 약혼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다. 적어도 한 달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즘 아버지인 레이긴으로부터 도미니크가의 일을 양도받는 중이었던지라, 순간 숨이 턱 막혀 왔다.

드레스 준비에서부터 파티장의 소소한 걸 꾸미는 일까지. 이 모든 걸 아델이 해내야 했다.

‘그래, 원래 결혼이란 가파른 산을 넘는 거랬어.’

가파른 산. 그걸 되뇌며 아델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애썼다. 여긴 스드메는 없나? 없겠지?

“괜찮습니다. 저도 도와드릴 테니까요. 프레데릭가에서도 시녀장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더불어 한 사람이 더 왔습니다만.”

“아델.”

루카스였다. 보통 이런 일은 귀족 여성이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는 과감히 틀을 깨기로 했다.

“나도 어려서부터 배워 온 것이 있었으니 도울 수 있을 거야.”

구원자 등판이었다. 보통 사람인 아델과 달리 루카스는 체력부터 괴물 같았다. 그는 아델이 지쳐 누웠을 때도 끊임없이 일을 위해 움직였다.

“저번에 쓰러졌었는데 무리하면 안 되지.”

그거라면 이제 거의 다 회복되었는데. 루카스의 눈에는 아직 아델이 연약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결혼식 준비는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다.

새벽부터 깨워진 아델은 약혼식 때보다 더한 대접을 받으며 모든 준비를 마쳤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도와주러 온 마들렌이 옆에서 손뼉을 쳤다.

“엄마, 예뻐!”

론슈카도 거기에 말을 얹었다.

“론슈카도 멋지네.”

평소와 달리 멋 부린 의상을 입은 론슈카가 마주 웃었다. 그리고 아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제가 에스코트할게요.”

“기꺼이.”

아델은 론슈카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혹시라도 엄마가 몸을 숙여야 할까 봐 팔을 높게 들고 있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어엿한 신사인걸?”

론슈카 때문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긴이 퇴짜를 맞긴 했지만, 그도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스코트하는 모습이 완벽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려가실까요?”

“좋아요.”

아델은 론슈카에게 맞춰 주며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예전에는 홀로 가던 길을 이제는 여러 사람이 같이 걷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사실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기댈 곳 없이 절망적이던 나날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아델은 굳게 다짐하며 저택을 나섰다. 마침 날씨도 좋고, 정원은 넓었기에 야외 결혼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아델을 바라보았지만, 더는 두렵지 않았다. 이쯤에서 에스코트는 론슈카 대신 레이긴이 하기 시작했다.

음악이 흐르는 길을 둘이 걸어가니 그 끝에는 루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색의 예식복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 저 남자가 오늘이 지나면 아델의 것이 되는 것이다.

“아델.”

루카스가 손을 내밀었다. 레이긴은 쉽게 놔주기 싫은 모양이었지만, 결국엔 아델을 놓아주었다.

“행복해라.”

“행복할게요.”

아델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루카스의 손을 잡고 단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미리 초빙한 대신관이 서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께 맹세하건대 오늘은 진실만 이야기하십시오.”

짧은 문구를 시작으로 주례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흔하디흔한 주례사보다는 바로 옆에서 손을 잡고 있는 루카스가 더 신경 쓰였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네.”

“네.”

식은 어느새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루카스는 아델에게 입 맞췄다. 이제 둘은 진정으로 부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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