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 (130/132)

#130

즉위식이 끝나고 밖에 나와 마차에 올라탄 아델은 그대로 의자에 쓰러지듯 누웠다.

“아델?”

놀란 루카스가 다가서자 아델이 잔뜩 부아가 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사교계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요.”

어화둥둥 안고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지, 설마 즉위식에서마저 그럴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직 건강이 전부 돌아오지 않았잖아.”

그렇게 말하는 루카스의 얼굴에는 깊은 걱정이 어려 있었다. 이러니 더 화를 내기도 그렇다. 아델은 자세를 바르게 고치며 제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마차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 님.”

처음 만났을 때의 여린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어엿한 한 가문의 가주가 된 레이나는 좀 더 단단해진 것처럼 보였다.

“레이나 님.”

“그냥 이름으로 부르시라니까요.”

“한 가문의 가주를 그리 편하게 부를 순 없지요.”

“저번부터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게 편해요.”

웃으면서 하는 말에는 약간의 애원이 실려 있었다. 그렇기에 아델은 둘만 있을 때는 서로 말을 놓기로 했다.

“그럼 언니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안 될 건 없죠?”

“기쁘네요. 제 위로는 형제가 한 명도 없었거든요. 언니를 가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머니한테 졸라 봐도 그건 불가능하더라고요.”

이제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곧잘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아델이 묻자 레이나는 그제야 용건을 기억해 낸 듯했다.

“레온 말인데요. 루카스 경께서 당분간 맡아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서 쓸쓸한 모양이에요. 게다가 검술 실력이 잘 늘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더라고요. 스승님 이야기도 자주 하고요.”

아무래도 누나가 돌아오니 레온도 좀 더 태도가 편해진 모양이었다.

“게다가 소드마스터가 되고 싶대요! 대단하죠? 저는 그때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몰랐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꿈을 이뤄 주고 싶어요. 레온에게는 이미 동의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레이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델과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거절하랴.

“하지만 아직 쌓인 회포가 덜 풀리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주말마다 집으로 돌아와서 풀면 되죠.”

레이나는 그래도 쭉 밀어붙였다. 모처럼 들은 동생의 소망인지라 어떻게든 이뤄 주고 싶었다.

더는 힘없이 소중한 것을 뺏기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소드마스터를 목표로 하는 동생은 무척이나 기특했다. 그러니 레이나도 약간의 쓸쓸함은 참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럼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레이나는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루카스에 의해 제지당했다.

“이제 한 가문의 가주가 아닙니까.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마십시오.”

“명심할게요! 그리고 레온이 머무는데 필요한 제반 비용 말인데요.”

“그는 필요 없습니다.”

“아니요, 그래도 내게 해 주세요! 레온을 위해 저도 뭔가 하고 싶어요. 게다가 큰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레이나는 꿋꿋하게 주장하여, 결국 작은 광산 하나를 루카스에게 떠넘겼다. 처음에는 큰 걸 주려던 모양인데, 계속 거절당하다 보니 점점 작아졌다.

이어 그녀는 아델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주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지만, 아델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정말 괜찮다니까요.”

“하지만 그래도요.”

계속 버티려는 레이나에게 아델은 당당히 루카스의 팔짱을 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 정도면 눈치챘겠지.

“아, 아아!”

레이나가 깨달음의 소리를 냈다.

“그렇군요. 두 분 결혼하실 사이니까요!”

루카스가 종종 결혼을 말하긴 했지만, 남의 입에서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그럼 두 분이서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중인데 어떤 즐거운 시간을 보내란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지만 아델은 레이나를 고이 보내 주었다.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델과 루카스는 눈을 마주치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마차를 타고 도미니크가로 향했다.

* * *

레온은 오래지 않아 도미니크가에 도착했다. 원래대로라면 프레데릭가로 가는 것이 맞았으나, 루카스가 도미니크가에 자주 머물렀으므로 이쪽에 있기로 했다.

“저게 자주 머무르는 정돈가.”

론슈카가 예리한 눈빛으로 루카스를 보며 말했다.

“왜?”

“거의 살고 있잖아.”

이곳이 레이긴의 저택이 아니었더라면, 결혼이 약속되어 있지 않더라면 나쁜 소문이 돌았을 것이다.

“나쁜 소문?”

“그래.”

론슈카는 그동안 열심히 교육받아 온 결과, 어려운 것도 제법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루카스 님이 싫어?”

레온의 말에 론슈카는 입을 다물었다. 예전이라면 서슴없이 싫다고 외쳤을 텐데,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싫지는 않구나?”

히죽거리는 레온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론슈카가 그렇게 생각하자 바람의 정령이 나타나 서슴없이 레온의 뒤통수를 때렸다.

“악! 너 자꾸 정령 이용할래?”

“정령사한테 그런 말을 해 봤자.”

“와아!”

레온이 답답함에 소리쳤다. 바뀐 론슈카가 예전보다 훨씬 더 좋다는 건 알지만, 때로는 얄밉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왜 나한테는 형이라고 안 해?”

“왜 형이라고 해야 하는데?”

“내가 나이가 더 많잖아.”

“때로는 나이를 초월한 우정도 있다고 했어.”

말 하나는 기막히게 잘한다. 그렇게 둘은 누가 내려다보는 것도 모른 채 투닥거렸다.

레이긴은 창을 통해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리가 있었던 론슈카와도 이제는 많이 가까워졌다.

“스승님.”

“그래.”

“그럼 이 건은 그대로 진행할까요?”

“그러도록 하지.”

아델이 결혼하고 나면 이 집안에 후계자가 사라진다.

그렇기에 도미니크가는 프레데릭가와 여러 번 만나며 합의를 했다. 차후 성인이 되면 론슈카는 도미니크가의 후계자가 된다.

후계자가 기사가 아닌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그 아이라면 잘해 내리라 믿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버티느냐지.”

레이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돌아오는 건 제자의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스승님은 아직 정정하십니다. 어제도 가문의 기사들과 대련을 해서 이기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나?”

“게다가 봐주지도 않으셔서 지금 끙끙대는 기사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버텨야지!”

“네, 네. 하여간 스승님께선 몇십 년도 더 사실 것 같으시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카이는 냉정하게 말하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프레데릭가는 론슈카의 동생이 잇게 되겠군요.”

“그렇지.”

론슈카의 동생이라. 남자아이일까, 여자아이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아델을 닮았다면 귀여운 손주라는 건 변함없을 테니까.

“만약에 루카스 경을 닮으면 어쩌시려고요?”

“그, 그래도 내 소중한 손주다!”

레이긴의 말에 카이는 작게 웃음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딸과 손주가 소중한 것이다. 카이는 그런 스승님이 무척이나 좋았다.

* * *

“결혼식은 몇 월에 할까?”

“글쎄요. 일단 일이 좀 더 정리되어야 하니까 여유를 좀 두는 건 어떨까요?”

“5월쯤이면 좋지 않을까?”

“그러면 바로 다음 달이잖아요.”

심지어 지금은 4월 말이다.

“결혼식 준비를 아무리 빠르게 해도 한 달 이상은 걸릴 텐데요.”

“해내도록 하지.”

“조금만 더 참아 봐요.”

“어떻게 더 참으란 말인지.”

루카스는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아델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편지 하나를 뜯었다.

남의 편지를 함부로 뜯는 건 무례한 행동이나, 아델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의 초조함도 이해 못 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이것 봐, 이것도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잖아.”

“쓸데없는 편지예요. 어차피 버릴 텐데요.”

“그래도. 이미 내가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냈는데도 이런 행동을 하는 멍청이들이 있다는 게 싫어.”

“그러게요.”

자신이 아직도 아무것도 없는 자들의 희망으로 보이는 걸까? 아델은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다음에도 이런 편지를 보내는 자가 있으면 결투를 걸도록 하지.”

루카스는 체면을 잊은 채 그리 말했다. 비슷한 나이대에선 그를 이길 수 있는 자가 없을 텐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상대에게 명복을 빌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부디 평온하게 땅으로 돌아가시길.

“5월이 안 된다면 6월에 하는 건 어때?”

“6월, 좋아요. 그때라면 어떻게든 되겠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카스가 아델을 꼭 끌어안았다. 어지간히도 기쁜 모양이었다.

‘6월이라.’

한국이라면 6월부터 끔찍한 더위가 몰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은 다른 곳에 비해 기후 변화가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6월이라 해도 그렇게 덥지는 않았다.

그 말은 12월이 별로 춥지 않다는 소리와 같았다. 그리고 아델은 그런 기후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럼 당장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지! 마들렌이 기뻐할 거야.”

루카스는 아델을 끌어안은 채 방을 몇 번인가 빙글빙글 돌더니 내려 주었다. 그러고는 혹시라도 아델이 했던 말을 취소할까 싶었는지, 잽싸게 방을 빠져나갔다.

“루카스!”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아델은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매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