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하하하.”
셀렉시온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이렇게 끝이 난다고?’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를 이해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인제 와서 물러나라고?
셀렉시온은 호위 기사인 아켄을 돌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병력을 들여 저 무도한 이들을 죽이라 할 셈이었으나,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켄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만다의 말이 맞았다. 이미 외부의 병력은 전부 제압당한 상태이고,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 가지고 저항을 해서 이 상황을 벗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래, 날 끌어내리면 어떻게 할 셈이지?”
“적합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지요.”
“그게 너고?”
아만다는 셀렉시온의 분노에 찬 물음에 웃음을 돌려주었다.
‘애초에 멸문시켜야 할 가문은 패트릭이 아니었어.’
프레데릭가의 힘을 깎고, 웨더필드가를 무너트렸어야 했다. 황제에게 있어 저들은 거슬리지만 쉽게 손대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래도 무너트렸어야 했는데.’
루카스는 밖으로 나돌고, 헤이른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기에 방심했다. 설마 고작해야 여자 하나로 여기까지 움직일 줄 몰랐다.
‘아델.’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위험을 고려해서인지 아델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이제 내려오시지요, 폐하.”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더 버텼다가는 끌고 내려갈 기세라 셀렉시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단씩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묻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아만다의 시선이 평행을 이루었을 때 주변에서 기쁨의 탄성이 쏟아졌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셀렉시온의 손이 가늘게 떨려 왔다.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폐하. 아니, 오라버니.”
“너는 실수한 거다. 일순간 병력의 우위로 황제 자리를 뺏는다고, 그게 유지 가능할 성싶으냐?”
“가능하니까 저지른 일 아니겠습니까?”
아만다는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귀족 회의에서의 일은 무난하게 끝을 맺었다. 황제인 셀렉시온은 폐황제가 되었으며, 황제 후보로는 아만다가 올라갔다. 하지만 후보가 하나뿐이니 곧 황제가 될 터였다.
“폐황제가 된 셀렉시온은 앞으로 수도에 발을 디딜 수 없습니다.”
셀렉시온은 감시하는 병력과 함께 저 멀리 시골 마을로 보내졌다. 당장 목을 베어 버리기엔 아직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라, 잠시간 목숨을 보전시켜 주는 것에 불과했다.
“후회할 것이다.”
마지막까지 셀렉시온은 그렇게 말했다.
‘내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었으니, 너희들도 잃어 봐야지.’
셀렉시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되돌아서서 마차에 올랐다.
* * *
“이제 시작이에요.”
갑자기 바뀐 황제에 적응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 아델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만나기 쉽지 않은 사람이 돼 버렸다.
“그건 알지만, 좀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는데.”
모처럼 시간이 난 틈에 찾아온 루카스가 투덜거렸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이 일이 전부 마무리되어야 평온해질 거예요.”
“그럼 그때는 결혼식을 올릴 수 있나?”
루카스의 말에 아델은 웃음으로 답했다.
“올릴 수 있겠지요.”
그러고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아델이 좋아하는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차로 종종 마시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단맛을 좋아하지 않기에 아델과 다른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언젠가는 같은 차도 마셔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루카스가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콜록.”
작게 기침한 아델이 입을 벌리는데, 거기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델?”
“어?”
아델은 고개를 들어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손가락을 자신의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우욱!”
삼킨 걸 다시 토하려는 모양이었으나, 붉은 피 때문에 제대로 토해 냈는지 알 수 없었다.
“의원!”
루카스는 커다랗게 소리치며 아델을 안아 올렸다. 어느새 가슴 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빠르게 뛰쳐나간 루카스를 본 카이가 황급히 의원을 데려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모양이었다.
“즉효성 독인 모양입니다. 최대한 토하게 하고, 몸을 보하는 약을 마시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은 독의 정체를 알아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현상 유지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택이 뒤집혔다. 레이긴은 앞서서 암살자를 찾았으며, 오래지 않아 찾아낼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암살자는 도미니크가에서 오래 일해 온 요리사 중 하나였다.
“딸이 인질로 잡혀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새하얘진 얼굴로 고백하는 요리사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죄는 죄. 얼마든지 벌을 내려 주십시오.”
“물론 그럴 생각이다.”
레이긴은 노여운 얼굴로 요리사를 노려보았다. 그는 절대로 요리사를 용서할 수 없었다. 간신히 되찾은 딸인데, 그런 그녀에게 독을 먹이다니.
그는 요리사를 감옥에 가두고 모든 것을 알아내라 명했다.
그 결과 요리사에게는 딸이 없다는 것과, 사실 엄청난 돈을 받고 매수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레이긴은 자신의 믿음을 배신한 요리사를 가만두지 않기로 했다.
“요리사도 크게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누가 독을 줬는지도 모르고 있더군요. 하지만 짐작 가는 곳은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
“셀렉시온.”
폐황제. 카이는 그를 의심했다.
“그래, 그라면 이러고도 남을 사람이지.”
“루카스 님은 뭘 하고 계십니까?”
“내내 아델의 곁에 붙어 있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석상같이 버티고 있더군.”
“그분께도 추측한 내용을 알릴까요?”
“알리는 게 낫겠지.”
레이긴의 허락을 받은 카이는 아델이 치료받고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레이긴이 말했던 대로 루카스가 아델의 곁에 앉아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땀이 나면 닦아 주고, 입술에 물을 흘러 넣었으며, 몸을 주물러 주었다. 그렇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루카스 경.”
겨우 며칠이었건만 루카스는 수척한 얼굴이 되었다.
“카이 경, 요리사는?”
“고문해 보았습니다만, 알고 있는 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번 사건의 범인은 추측할 수 있겠더군요.”
“셀렉시온.”
“맞습니다.”
루카스도 똑같은 사람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담겼다. 지금 그는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를 보낸 곳은 수도에서 거리가 제법 멀다. 이곳에서 미친 듯이 말을 달려도 며칠은 걸리는 위치였다.
“일단 전서구는 띄워 보냈습니다. 병력을 통솔하는 기사가 예전에 스승님 밑에서 같이 수학하던 자입니다.”
“그래도 알아내지 못하면.”
“반드시 알아낼 것입니다.”
루카스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아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의원, 아델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
“길어야 일주일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도 삶에 대한 의지가 있으셔서 어떻게든 버티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겨우 일주일이다. 루카스는 치솟아 오르는 절망을 내리누르며 뒤돌아섰다. 아델이 쓰러진 이후로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눈을 뗀 것이다.
“내가 다녀오지.”
“네?”
“아무리 폐황제라 하여도 고문은 하지 못할 것 아닌가.”
그러니 직접 가서 고문하여 알아내겠다는 것이었다.
“루카스 경! 진심이십니까?”
“어차피 자네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 말에 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같이 수확한 동기를 믿긴 했지만, 과연 그가 셀렉시온을 고문해서라도 알아낼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루카스에게 사실만 알려 주고 황제를 향해 달려갈 생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황제는 아직 길 위를 달리는 중이란 것이었다. 거리가 먼 만큼 아직 시골 마을에 도착하려면 한참은 더 달려야 할 것이다.
“그래도 한때 황제였던 만큼 병력들도 속력을 내진 못했을 거야. 거기다 보병도 섞여 있으니까.”
보병은 말을 타지 못한다. 그만큼 전투마는 비싸고 귀한 존재였기에 기사나 기병들만이 탈 수 있었다. 그러니 보병이 끼어 있으면 속도가 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루카스 경은 여기 계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에 마지막은 지키셔야 하지 않습니까.”
덤덤한 듯 들리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배려가 담겨 있었다.
“염려 마십시오. 어떻게든 따라잡아 해독제를 알아 오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믿습니다.”
그 말에 카이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후 그는 미리 준비된 루카스의 전투마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자신의 말이 더 빠를 것을 알기에 루카스가 빌려준 것이었다.
카이는 말을 타고 달려 나가고, 루카스는 다시 아델의 곁에 자리 잡았다.
“죽으면 안 돼.”
루카스는 아델의 손을 잡고 간절히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자 아델이 눈을 뜨며 숨을 몰아쉬었다.
‘죽지 않을 거예요.’
아델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직 그녀는 삶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론슈카는 초조하게 아델의 방 앞을 맴돌았다.
아델이 쓰러졌단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갔었으나,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 폭주할 뻔했기에, 이후 레이긴은 그의 출입을 막았다.
‘엄마.’
정령을 이용하여 정보를 끌어모은 결과, 아델은 독을 마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해독제가 없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엄마를 잃을 순 없었다. 론슈카는 한참을 자리에서 맴돌다가 훌쩍 저택을 나섰다. 다들 한 군데에 신경이 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