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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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그래, 아만다를 놓쳤다고.”

셀렉시온은 왕좌에 앉아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어쩐지 불쾌해 보이는 그 모습에 기사는 다급히 무릎을 꿇고 잘못을 고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저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기사의 말에 셀렉시온의 눈가에 살의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기사를 처리하라 명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병력이라도 더 있는 편이 낫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도망쳤는지는 확인했나?”

“그는 잘 모르나 현장에서 불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웨더필드.”

“네, 아마도 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셀렉시온은 낮게 웃었다.

“오냐오냐해 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배신을 하는군.”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병력을 보내고 싶었으나, 웨더필드가는 만만치 않은 이들이었다.

지금까지 왜 그들을 풀어놓으며 존중해 줬던가.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함부로 손댈 수 없었으니까.

가까이 접근한다면야 검을 든 기사가 강하겠지만, 그 거리를 좁히는 게 쉽지 않았다.

거기에 헤이른은 이미 최고급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실력자 아니던가.

그뿐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간다는 소리는 헤이른이 루카스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이유는 아마도 도미니크가의 아델 때문이겠지.’

절대로 서로 협력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프레데릭가의 견제에 웨더필드가를 사용했건만. 일이 틀어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

지금부터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병사를 끌어모을 때까지 그들이 가만있을까?

‘아니.’

가만있을 리가 없다. 귀족 회의가 곧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거기서 뭔가를 저지르려 들 것이다.

‘진작 내리눌렀어야 했는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폐하.”

옆에서는 호위 기사인 아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에도 분노가 치밀었다.

“고개 돌려.”

“네?”

아켄은 의아해했지만, 셀렉시온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그제야 부글부글 들끓던 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수도에 있는 기사를 최대한 끌어모은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리겠다.”

그들이라면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 줄 것이다. 셀렉시온은 그렇게 믿었다.

황제 측과 다른 측이 그렇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을 때, 수도에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남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는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에 대한 소문 말이야.”

“폐하에 대한 소문?”

황족에 대해 잘못 이야기하다가는 경비대에 끌려간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노예 제도가 금지된 제국인데, 황제는 뒤로 노예를 거래하고 있다더라.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사람을 죽이거나, 가문을 멸문시킨다더라.

“하지만 그거야 귀족 나리들이 고민할 일 아닌가?”

“아니지, 아니야! 내 친구의 동생에게 딸이 있는데. 그 딸이 어느 날 사라졌단 말이지.”

“설마?”

“그래, 노예 시장으로 끌려 간 거야! 딸 하나 바라보던 아버지는 어떻게든 구해 보려고 했지만, 맞아 죽었다는군.”

“세상에, 맙소사!”

그제야 남자는 경악하며 한탄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그러니까. 이런 황제라면 차라리 그분보다 마음이 넓고 착하신 황녀님이 황제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쉿쉿! 그런 이야기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큰일 난다고!”

“에이. 자네가 날 경비대에 넘길 사람인가? 그리고 이미 소문이 파다해.”

“그런가?”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황제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걸 알아차린 경비대가 뒤늦게 나섰으나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된 뒤였다.

* * *

“우으, 힘들었어요.”

아델은 한숨을 내뱉으며 몸을 쭉 폈다.

“시간이라도 좀 있었으면, 더 제대로 작업했을 텐데.”

그랬다. 현재 돌고 있는 소문을 퍼트리는 데 앞장선 이는 아델이었다.

그녀는 정보전의 중요성을 알고 카이와 의논해 바람잡이를 고용해서 소문을 퍼트렸다.

시간이 아슬아슬해서 어떻게 될까, 싶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는 본 것 같았다.

이제 황제를 끌어내리고 아만다를 올려도 아래쪽에서의 반발은 크지 않을 것이다. 귀족들이야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은 괜찮을 테고.

“문제는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인데요. 이들은 어쩔 수 없네요. 일단 지켜보다가 방해가 된다 싶으면 밀어내는 수밖에요.”

“훌륭하십니다.”

“그 말은 그만해요. 며칠 전부터 저한테 계속 칭찬만 한 거 아세요?”

“그럴 만하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모두 아만다를 황제 위에 올리는 것에만 신경 쓰고 있을 때, 아델만은 지지대를 견고하게 다지고자 했다. 카이는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됐어요. 이제 폐하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사병과 기사를 모으고 있을 테죠. 하지만 저희가 더 빨랐어요. 적어도 힘으로 저희를 짓누르진 못할 거예요.”

그럼 이제 남은 건 귀족 회의뿐이다.

“그때 끌어내려야 해요.”

“이유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맞아요.”

이번 황위 교체는 피를 흘리지 않고, 무난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아델은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루카스가 위험하니까 오면 안 된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루카스가 하는 말은 한 귀로 흘리던 레이긴도 그 말에 찬성했다.

“이럴 때만 죽이 잘 맞지.”

“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델은 고개를 내저으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흐르고, 귀족 회의 날이 되었다.

* * *

아만다는 심호흡을 하였다.

드디어 그날이다.

‘리사는 살아 있을까?’

리사를 위해서라도 물러나서는 안 됐다.

‘내가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어.’

아만다의 역할은 어찌 보면 간단하고, 어찌 보면 어려웠다.

지금까지 알아낸 황제의 악행을 읊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걸 황제 앞에서 해야 한다.

“난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뇌며 아만다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가는 도중에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차가 멈출 일은 없으니 앞만 바라보십시오.”

루카스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

“믿을게요.”

나중엔 어찌 될지 모르나 지금은 그들을 믿어야 했다.

아만다는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미리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제법 무게가 있는 마차인지 말 여섯 마리가 끄는 마차였다.

“출발!”

루카스의 목소리에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만다는 양손을 꽉 잡았다.

* * *

귀족 회의가 열리는 회의실은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기사들이 그들을 검사하고 들여보냈으며, 주변에는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군.”

“그럴 수밖에 없지. 상황이 상황이니까.”

“정말 아만다 님이 모습을 드러내실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

몇몇 귀족들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황제는 그런 그들의 입을 막지 않았다. 그보다 다른 데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보냈을까. 문밖에서 난폭한 소리가 들려왔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로 보아 전투가 일어난 것 같았다.

“괜히 왔어.”

몇몇은 회의장에 온 걸 후회하기도 했다.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이후 문이 열리며 단아한 드레스 차림의 아만다가 안쪽으로 들어섰다.

“아만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황제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황녀의 이름을 불렀다.

“폐하.”

“그래, 반역자가 여긴 무슨 일이지? 목이라도 바치려고 왔나? 네 시녀처럼?”

그 말에 아만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을 뿐이다. 그녀는 분노에 잠긴 눈동자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루카스와 레이긴, 헤이른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앉아 있던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체 인원의 절반이 훌쩍 넘는 수였다.

그중에서 진중하게 생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황녀님을 지지합니다.”

그 말에 셀렉시온의 표정이 구겨졌다.

“반역자가 우글우글하군. 그렇지 않나, 아켄? 이들을 어찌 처리하면 좋겠나.”

“처리하실 수는 있으시고요?”

아만다가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못 할 것 같은가?”

“네, 못 하실 겁니다. 이미 밖의 기사들은 제압당한 지 오래고, 병사들도 포기했습니다.”

“뭐라고?”

“포기했단 말입니다.”

“누구 맘대로?”

“자기 뜻대로겠지요. 그들도 당신 같은 모자란 황제를 모시고 싶지 않은 겁니다.”

“허?”

셀렉시온은 기가 막혀 한숨을 토해 냈다. 가늘게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아만다가 우습기도 했고, 짜증 나기도 했다.

“당신은 제국의 법을 어겼어요. 금지된 노예 제도를 이용해 막대한 재산을 빼돌렸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사람을 해쳤어요.”

“나는 황제다.”

“황제이기에, 가장 높은 곳에 선 자이기에 오히려 어기면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아만다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세요.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나보고 황제 위에서 내려오라고? 아만다, 미친 거냐?”

“전 미치지 않았어요. 미친 건 당신이겠지요.”

따가운 시선이 셀렉시온에게 닿아 왔다. 중도를 지키고 있던 귀족들도 상황이 달라졌단 걸 깨달았는지 태도를 달리했다.

황제파였던 이들은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나서는 이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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