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지금 살아남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어요. 이대로 개죽음당할 생각이세요?”
리사의 말에 아만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말은 어느 하나 틀린 게 없었다. 여기서는 도망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러면 리사는?’
지금까지 계속 같이 있어 주었던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아만다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리사가 말을 덧붙였다.
“살아남으세요. 그리고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시면 그게 제 기쁨입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지금 울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만다는 리사가 이끄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리사 또한 귀족가의 영애였던지라 드레스가 무척 잘 어울렸다. 하지만 저 드레스는 리사를 위험으로 이끌 터였다.
리사는 가까이 다가와 아만다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그런 후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비밀 통로는 알고 계시죠?”
각 궁에는 비밀 통로가 있고, 그는 그 궁을 받은 황족만이 알고 있었다. 아만다 또한 어릴 적에 이 궁을 받으면서 어머니에게 비밀 통로에 대해 배웠다.
“리사, 반드시.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해. 다시 돌아올 테니까!”
“물론이에요. 누가 죽는다고 했나요?”
리사는 여유롭게 웃으며 아만다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아만다를 보며 처음으로 표정을 무너트렸다.
“잘 가요, 저의 황녀님.”
마지막 인사를 한 리사는 뒤돌아섰다. 지금 리사와 아만다가 뒤바뀐 걸 아는 건 이 방에 있는 시녀 하나뿐이었다.
시녀는 서글픈 미소를 짓다가 리사에게 가까이 다가와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황녀님, 도망치셔야지요.”
“그래.”
리사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비밀 통로를 알지 못하는 그녀는 시선을 끌면서 다른 곳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시선을 오래 붙들어 둘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 정도면 아만다가 이 궁을 벗어났을 테니까. 리사는 시녀와 함께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은 이미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리사는 아만다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혼란을 가중했다. 저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두 도망치도록 해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절반은 도망을 쳤으나, 나머지 반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긴 세월 동안 함께한 그들은 오래지 않아 리사를 알아보았다. 그래도 그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황녀님!”
이래서 좋다니까. 리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만다는 충분히 황제가 될 자격이 있었다. 대체 어느 누가 이런 절대적인 충성을 받을까. 리사는 그리 생각했다.
참겠다고 그리 맹세했는데 결국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리사.”
두고 온 시녀이자, 가장 친했던 친구인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다리가 무거웠지만, 여기서 무너져서는 안 됐다. 아만다는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통로의 끝에 도달했다.
이제 문만 열고 나가면 바깥이다. 아만다는 있는 힘껏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절망했다. 비밀 통로의 바깥에는 이미 기사 여럿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만다 님, 이만 포기하시지요.”
아만다의 얼굴을 아는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아니,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은 무력하기만 한 사람일 뿐인데. 전투 관련 기술은 배운 적이 없었다. 인제 와서 그게 후회되었다.
그때였다. 바로 앞을 화염이 휩쓸었다. 기묘하게 바로 앞에서 타오르는데도 아만다에게는 열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반면 기사들은 불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화상도 문제였지만, 그 전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사라도 사람이다. 오랫동안 숨을 쉬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다. 결국 기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이어 숲에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헤이른 경?”
“그냥 얌전히 외국으로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처음부터 곱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 경계하여 아만다의 몸이 뒤로 물러났다.
“해칠 생각이었으면 진작 같이 해치웠지요. 따라오십시오.”
아만다는 가늘게 떨면서도 헤이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조금의 배려도 없이 수풀을 헤치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카스 경!”
헤이른과 루카스는 마주치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이상 뭔가를 하진 않았다.
“이번에는 도움에 감사하지.”
“너 때문에 도움을 준 건 아니다.”
“빚은 내 앞으로 달아 두도록.”
“말을 듣질 않는군.”
헤이른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이는 아만다와 루카스뿐이었다.
“뒤늦게 폐하의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아만다 님께서는 무사하셨군요.”
자신은 무사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말하려던 아만다는 끝내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금 헤이른과 루카스가 여기까지 그녀를 데리러 와 준 것만 해도 위험을 감수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건 아만다 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요. 반역의 죄를 뒤집어썼다면 그를 현실로 만들어 주는 편이 낫겠네요.”
“이미 아만다 님과 저희가 포섭한 귀족들의 수만 해도 상당합니다.”
“그랬죠. 그럼 일단 이동하기로 해요.”
“알겠습니다.”
루카스는 앞장서서 아만다를 안내했다. 아까 전의 불친절한 헤이른과 다르게 그는 아만다가 걷기 편하게 길을 내주고 있었다.
그렇게 황궁 외곽에 다다랐다. 거기서는 이야기가 더 쉬워졌다. 루카스가 아만다를 등에 업고 그대로 벽을 타 넘었기 때문이었다.
“루카스 경은 소드마스터가 아니던가요? 소드마스터는 혼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던데, 이번에도 그러면 안 되나요?”
“아만다 님은 그걸 원하십니까?”
그래, 원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다른 이들의 복수를 했으면 했다. 하지만 루카스의 표정을 보고 이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약에 루카스 경에게 그렇게 도움받는다면 저는 허수아비 황제가 되겠지요?”
“제가 나서면 그렇게 되겠지요.”
“좋아요. 그렇다면 저는 정석적인 길을 따르겠어요.”
“그리 생각하셔서 다행입니다. 소드마스터라 해도 결국은 인간. 언젠가는 싸우다 지치기 마련입니다.”
소드마스터가 강하기는 하지만 황궁에도 강자들이 제법 많다. 그들이 한 번에 달려들면 루카스는 묶이게 되는 것이다.
다소 피해가 있더라도 아만다가 다른 귀족의 도움을 받아 황제의 자리를 쟁취해 내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둘은 일단 프레데릭가로 대피했다.
* * *
초조하게 방을 맴돌던 아델은 창밖을 보곤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루카스가 황녀를 제대로 구출해 왔다.
“어서 오세요, 황녀님.”
“지금은 반역자에 불과한걸요.”
“그건 전부 현 황제의 누명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황녀님은 여전히 황녀님이십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보다 병력은 이미 대부분이 이동한 상태입니다.”
루카스와 아델은 청혼을 위한 파티를 열면서도 다른 귀족들과의 교류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황제의 소식을 듣자마자 빠르게 각 귀족의 사병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게 진작 제대로 했으면 좋았잖아.’
황제인 셀렉시온이 그 모양이니 일이 이렇게까지 번진 것 아니겠는가.
아델은 알게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다 살다 반역까지 해 보게 될 줄이야.
일단 론슈카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레온과 함께 웨더필드가에 보내 두었다.
“가기 싫어!”
론슈카는 가지 않고 돕겠다고 했지만, 그건 말도 안 된다. 론슈카는 아직 너무나도 어렸으니까. 그래서 그 부분은 헤이른의 도움을 받았다.
헤이른에게 폐를 끼치는 건 너무나도 싫었지만, 그곳만큼 안전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머무는 사람의 대부분이 뛰어난 정령사인 만큼 천연 요새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이상의 도움은 거절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마음은 편해졌다.
“황녀님, 무사한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 주세요. 일단 옷부터 갈아입는 게 좋겠네요.”
아델은 새 옷을 가져오라 이르고 황녀의 치장을 부탁했다. 시녀들은 재빠르게 움직여 아만다를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쪽입니다.”
이후 아델은 아만다를 깊숙한 곳에 위치한 회의실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이미 손잡기로 한 귀족들의 대표들이 와 있었다.
“황녀님!”
“오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황녀님이 무사하니 앞으로의 계획은 변함이 없겠군요.”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만다를 반겼다.
“네, 계획은 빈틈없이 실행될 것입니다.”
아델은 단호히 말했다.
“그러니 모두 준비해 주세요. 사병은 그 날짜가 되기까지는 감춰 주시고요.”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요.”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귀족 앞에 서서도 변함없이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아델의 모습에 루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지금 웃어요?”
그런 루카스에게 아델이 작게 소곤거렸다.
“그대가 사랑스러워서.”
묻지 말 걸 그랬다. 아델은 흐린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럼 일단 첫 번째 계획을 시작하죠.”
바야흐로 반격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