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가장 먼저 만나기로 한 사람은 루카스였다. 아무래도 한창 화제의 인물이 된 레이나보다는 루카스를 만나는 게 더 쉽고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은밀히 찾아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미 황제도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대놓고 만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루카스는 미리 말한 대로 조용히 아델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어찌나 조심스러웠는지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델이 놀랐다.
“언제 왔어요?”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아.”
그리 대답하는 루카스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아델은 알 수 있었다.
‘기분이 나쁘구나.’
하지만 왜? 기분이 나쁠 만한 일이 있었나? 그리 생각하며 다가가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오전에는 매번 카이가 전날 도착한 초대장과 편지를 가지고 오는데, 그게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이고.’
아델은 그제야 루카스의 기분이 왜 나쁜지 알 수 있었다.
황제와 대척점에 선 시점에서 들어오는 초대장은 많이 줄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청혼서는 늘어나기만 했다.
예전처럼 작위가 높은 집안의 영식보다는 낮은 집안이 더 많아졌지만 말이다.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아델은 제법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으로 보일 것이다.
대부분 귀족가는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한다. 거의 모든 재산을 한 사람에게 몰아준단 소리였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그 아래 형제들은 받는 게 없다는 소리였다.
첫째가 재산을 물려받고 나면, 집에서 쫓기듯 나가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그들에게 도미니크가의 후계자인 아델이 어떻게 보일까. 비록 아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도전해 볼 법한 것이다.
“오해예요.”
그렇기에 아델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뭘 말하는지 모르겠군.”
눈은 책상 위로 가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아델은 웃으며 말했다.
“지금 저에게 온 청혼서를 보고 있지 않으세요?”
루카스는 위를 잠시 올려다보더니 시선을 바로 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전부 거절할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건 알고 있어.”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쁘실까?”
루카스에게 슬그머니 다가간 아델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이 취급은 좋지 않다만.”
“아이라뇨. 아이랑 어떻게 연애를 하겠어요?”
아델은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런 행동도 하지 말고.”
“기분 나빴어요? 그럼 미안해요.”
“아니,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루카스는 잠시 말을 쉬었다가 이었다.
“너무 귀여워서 곤란해. 내 앞에서는 괜찮지만, 밖에서 그러는 건 안 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루카스, 당신뿐일걸요?”
“그건 아델의 착각이야. 그대는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아야 해.”
내가? 아델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내리눌렀다. 사랑에 빠지면 콩깍지가 씐다더니 루카스는 벌써 그 단계인 모양이었다.
“저보다 매력적인 사람은 여기 있는데요.”
작위도 높고, 힘도 세고, 잘생겼고, 배려심도 깊다. 이런 남자가 어디 또 있을까?
만약에 그가 외부로 떠돌아다니지 않았더라면 많은 영애들이 접근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접근할지도 모르지. 이번에는 아델의 뺨이 부풀었다.
‘이렇게 멋진데 자신의 가치를 모른단 말이지.’
어쩐지 손이 근질근질했다. 뺨이라도 잡아서 늘여 줄까,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일단 제 청혼서를 저리 치워 두고.”
“치워 두고?”
“중요한 이야기를 하죠.”
아델이 가장 먼저 루카스에게 고백한 건 론슈카의 교육 이야기였다.
“론슈카가 주에 두 번 웨더필드가에 가게 되었어요.”
“어째서?”
“더 위대한 정령사가 되고 싶대요. 지금 정령왕을 부르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상태예요.”
“천 년 동안 정령왕을 부른 정령사는 거의 없지 않았나?”
“그래도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해요.”
“그도 그렇지.”
루카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른을 못마땅해하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론슈카의 앞날을 막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문제는 좀 더 심각한데요. 아만다 황녀님께서 저희와 손을 잡고 싶다고 하셨어요.”
“슬슬 그러실 거라 생각하긴 했지. 얼마 전에 다른 나라의 왕이 청혼을 해 왔는데, 폐하께서 승낙하셨거든.”
“그런데 딱히 이득도 얻을 수 없는 나라던데. 왜 보내시려는 걸까요?”
“폐하는 이상하리만치 황녀님을 싫어하셨어. 그래도 살려 두신 걸 보면 나름 남매로서의 정은 가지신 모양인데.”
그런 정이라면 사양이다.
아델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어쩌면 셀렉시온이 아만다를 살려 두는 이유는 괴롭히기 위함이 아닐까?
그리고 그 이유는 아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알려면 황가의 일에 대해 더 자세히 파고들어야 하는데, 지금은 거기에 쓸 시간이 없었다.
“일단 중요한 문제는 그거죠.”
“황녀님과 손을 잡느냐, 마느냐.”
“모아 둔 정보가 제법 있다고 하니 잡는 쪽이 낫겠지만요.”
아무래도 조금 거리낌이 느껴지는 건 아만다가 루카스를 사랑하기 때문이리라. 루카스가 아델의 청혼서를 보고 질투했듯이, 아델도 질투심이 들었다.
“아델은 그래도 괜찮아?”
“제가 뭘요?”
“지금 표정이 안 좋은데?”
“아까의 저와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아델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럼 이로써 둘 다 공평해지겠군. 둘 다 서로의 상황을 질투했으니 말이야.”
루카스는 아델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
“그럼 이제 질투는 접어 둘까요?”
“아니, 나는 아델이 질투를 해 주는 쪽이 더 좋아.”
“사실 저도 그래요.”
“그래도 언제까지 질투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니, 파티를 한번 열어볼까?”
“갑자기요?”
무슨 목적으로 파티를 연단 말인가? 아델은 루카스에게 끌어안긴 채 고개를 들었다.
“성대하게 파티를 열고, 아델과 함께 파트너가 되어 홀로 들어서는 거야.”
“그러고요?”
“먼저 음악에 맞춰 춤을 한 번 추고, 이후엔 내가 로델리 꽃으로 청혼을 하는 거지.”
“그 자리에서요?”
“그래.”
아, 조금 혹했다. 아델은 기쁨에 실룩거리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루카스의 가슴에 냅다 박치기했다.
“갑자기 고개는 왜 숙이지?”
“몰라요.”
황녀와 손잡는 이야기를 하다가 왜 여기까지 온 거람? 새침하게 대답한 아델은 루카스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래야 그가 얼굴을 보지 못할 테니까.
“그럼 파티는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하지.”
“그게 언제 예정이 되었어요?”
“방금.”
루카스는 태연히 대답하며 아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면 황녀님와 손을 잡는 건 아델에게 청혼한 이후면 되겠군.”
안 되겠다. 이미 루카스는 멋대로 일정을 다 정한 모양이었다. 아직 레이긴은 루카스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는데 이러면 곤란하다.
적어도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공개하자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어 루카스의 표정을 보자마자 하려던 말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그렇겠네요.”
아델은 저도 모르게 루카스의 말에 동의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속으로 레이긴에게 사과한 아델은 루카스와 붙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용은 심각했으나 분위기는 여전히 달큼했다.
그렇게 둘은 론슈카가 방해를 위해 난입할 때까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자, 루카스는 해결됐고.’
이제 남은 이는 레이나뿐이었다. 레이나에겐 론슈카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전달했다.
답장은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답장 역시도 론슈카가 수고를 했다. 어리니까 이 일에서 아예 제외하는 게 맞는데, 너무 유능하다 보니 자꾸 부탁하게 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뭐가요?”
놀러 가서 편지를 받아 온 론슈카가 아델에게 물었다.
“엄마가 론슈카를 너무 부려 먹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난 괜찮은데요?”
“그건 알지만. 론슈카, 만약에 조금이라도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 해. 알았지?”
“네!”
어쩜 이렇게 순하고도 귀여운지. 아델은 론슈카를 덥석 끌어안았다.
“수업은 할 만했어?”
“네, 제법 잘 가르치더라고요.”
“누가 가르쳤는데?”
“헤이른.”
“론슈카, 저번에 엄마가 말하지 않았니? 어른의 이름을 그냥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헤이른이 이름만 불러도 된다고 했는데요?”
“그 사람이?”
무슨 바람이람. 아델은 눈을 가늘게 떴다. 헤이른도 정말 많이 변했다. 원래는 후회도 하지 않는 쓰레기로 남았을 텐데.
“그게 편하대요.”
“뭐, 상대가 그렇다면야. 그래도 남이 볼 때는 존칭을 붙이기로 하자.”
헤이른을 편하게 부르는 론슈카를 보고 망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아델은 하늘이 무너져도 그와 다시 이어질 생각이 없었다.
“네.”
론슈카는 얌전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오늘 뭘 배웠는지를 이야기했다. 그중 반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아델은 끈기 있게 들어 주었다.
아델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론슈카였지만, 정령술에는 많은 관심을 보였으니까.
“그래, 즐거웠다니 다행이네.”
“네!”
정말 다행이다. 아델은 그리 생각하며 론슈카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이제 귀족이 되었으니 이런 행동은 그만두는 게 낫다는 걸 알지만, 어떻게 멈춘단 말인가.
아들이 이렇게 귀여운데 말이지. 아델은 마지막으로 론슈카의 이마에 입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