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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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론슈카, 론슈카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러니 치료는 받도록 하자.”

아델은 차근차근 론슈카를 설득했다.

“정말?”

“그래.”

그제야 론슈카는 몸에서 힘을 빼고 아델에게 기댔다.

“그럼 치료받을게요.”

“잘 생각했어.”

아델이 론슈카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언제나 론슈카의 얼굴 상처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그러니까 얼른 치료했으면 했다.

그리고 헤이른은 그런 아델의 기대를 깨지 않았다.

“상처 치료는 내일 본가에서 진행하도록 하지.”

헤이른의 말에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헤이른을 만난 보람이 있었다.

* * *

“아아, 가주님은 너무 나를 부려 먹으신다니까요.”

“아이카 님.”

바동거리는 아이카를 바라보던 시녀가 난처한 듯이 이름을 불렀다. 왜냐하면 불평을 늘어놓는 아이카의 바로 앞에 헤이른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카는 거리낄 게 없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만큼 오늘 할 일이 고되고 힘들었다.

“아이카.”

“왜요, 뭐요!”

“바닥을 뒹구는 건 품위 있는 행동이 아니다. 일어나.”

“쳇.”

아이카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 겨우 세 번만 만나고 치료해 주는 거요. 그 세 번도 제대로 된 만남은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치료를 약점으로 삼아 만나는 건 정상이 아니지. 그러니 세 번이면 충분해.”

“와아, 우리 가주님이 변했어요!”

“헛소리는 그만하고.”

“네, 얌전히 의식 준비를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카는 흐트러진 옷 그대로 사전 점검을 하였다. 구하기 힘들어 웨더필드가에서도 보물 취급받는 재료가 들어가는 것 빼고는 완벽했다.

“도미니크가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때맞춰 아델과 론슈카도 도착했다.

“그래, 좋게 생각해야죠. 이럴 때가 아니면 제가 언제 정령석을 써 보겠어요.”

아이카는 태도를 바꾸며 론슈카를 맞이했다.

“오늘 의식은 어렵지 않아요. 론슈카 님은 그냥 중앙에서 얌전히 계시면 되고요. 어떤 힘이 몰려들어 와도 거절하지 마세요. 거절하지 말란 게 무슨 뜻이냐면요?”

“그쯤은 알아요.”

“어머나, 역시나 똑똑하신 분!”

평소에는 못마땅하던 아이카의 수다가 이번만은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덕분에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럼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세요! 재료가 많이 들어서 그렇지, 어려운 건 아니니까요.”

아델은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지하의 커다란 연무장에는 단 셋만이 남았다. 헤이른, 아이카, 론슈카.

아이카는 아델이 멀어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양팔을 활짝 펴고 정령들을 불러 모았다.

“이리 오렴!”

여기저기 준비해 둔 깨끗한 물이 담긴 항아리를 통해 정령들이 튀어나왔다. 원래도 물의 정령을 부르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카는 정령석을 이용해 그를 증폭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평소에는 단 한 번도 부르지도 못했던 물의 정령왕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힘이 쭉쭉 빠져나가네.”

아이카는 힘든 표정을 지으며 왕에게 부탁했다.

“저 아이의 상처를 치료해 주세요.”

정령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나온 인간 세상의 공기가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정령왕을 지탱하고 있는 아이카가 반 죽어 가는 사이, 론슈카의 치료가 끝났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아이카는 잽싸게 정령왕을 돌려보냈다.

정령사로서 정령왕을 불러들인 건 참으로 기쁜 일이었으나, 이건 수많은 제물에 의해 일시적으로 부른 것에 불과했다.

제물이 대부분 소진된 이상, 더 버텼다가는 목숨마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으으.”

모든 일이 끝나자마자 아이카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들어오도록.”

헤이른의 말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령사들이 아이카를 곧바로 데려갔다. 이제 그녀는 한동안 요양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한편, 진의 중간에 서 있던 론슈카는 기이한 기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생전 처음 본 정령왕의 존재가 아직도 그의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언젠가 그도 걸어야 할 정령사의 마지막 길. 그걸 엿본 셈이었다.

“론슈카.”

론슈카가 정신을 차린 건 아델이 오고 나서였다.

“엄마.”

“론슈카!”

아델은 론슈카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동안 론슈카를 괴롭히던 얼굴의 화상 자국이 깔끔하게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처음으로 아델은 헤이른에게 진심이 담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니, 결국은 내 핏줄이기도 하니까.”

헤이른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오늘 소모된 재료들은 하나같이 막대한 금액을 자랑했다. 게다가 구하기도 힘들다.

그런데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ⵈ고맙습니다.”

론슈카 또한 못마땅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헤이른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론슈카를 잠시 내보내고 헤이른은 아델과 말을 나눴다.

“갑자기 얼굴의 흉터가 사라졌으니 당분간은 말이 돌지도 모른다.”

“그건 각오하고 있어요.”

“만약에 사람들이 궁금해하면 웨더필드가에서 치료해 주었다고 해.”

소문의 후폭풍까지 자신이 떠안겠다는 소리였다.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그렇게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인제 와서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답은 뻔하지 않은가. 그리고 아델은 그 답을 들어 줄 수 없었다. 모르는 척하는 게 최선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건 감사 인사를 다시 한번 하는 것뿐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아델은 당분간 론슈카의 대외 활동을 자제시키기로 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면, 당장은 시끄러운 일을 피하는 게 맞았다.

‘황제의 약점을 찾아야 해.’

소설 속에서 황제는 흑막이었다. 겉으로는 제대로 된 황제 노릇을 하는 듯 보였지만, 뒤로는 나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걸 찾아내 증거를 잡아야 했다.

‘그래야 황제를 끌어내릴 수 있을 테니까.’

아니면 하다못해 함부로 굴지 못하게라도 할 수 있었다. 제국에서 황제의 명은 절대적이라 어겨서는 안 된다. 당장은 운명을 바꿔 론슈카가 무사하지만, 미래엔 어찌 될지 아직 모른다.

그렇기에 아델은 조금이라도 론슈카의 앞날에 문제가 될 법한 것들은 전부 치우고 싶었다.

그중 제일 까다로운 상대가 황제였다. 일단 루카스는 아델의 의견에 동의했다.

‘레이나도 그렇고.’

이제 막 작위를 물려받아 한창 바쁜 레이나도 아델의 의견에 동의했다.

“저는 황제를 믿을 수 없어요.”

충성을 맹세한 신하도 한순간에 내치는 황제를 어떻게 믿을까. 레이나는 분노가 담긴 눈으로 말했다.

“황제는 지금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 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만다 님이요.”

최근 레이나는 황궁에 다니면서 아만다와 안면을 튼 모양이었다.

“어째서 그분인지 물어도 될까요?”

“그분은 야심을 가지고 있어요. 황제의 명에 흔들려야 하는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그분이 루카스 님을 사모하는 것 때문이지요?”

“아시네요.”

그래, 그게 문제였다. 아만다는 루카스에게 호감을 표하고 있었고, 루카스와 앞날을 약속한 아델로서는 그녀가 위로 올라가는 게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라면 괜찮을지도 몰라요. 아만다 님은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선 황제 위가 필요하니까요. 거기서 약속만 잘 받아 내면 되지 않을까요.”

“사람의 마음은 약속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일단 이 부분은 보류해 두기로 해요.”

아델은 아만다를 직접 만나 보기로 했다. 도미니크가의 후계자였기에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황제의 의심인데.

“마침 얼마 뒤에 아만다 님이 티파티를 주최하시는군요.”

거기에 초대받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같이 갈까요?”

“아뇨, 혼자 가 볼게요.”

아델은 레이나의 호의를 거절했다.

* * *

명색이 황녀인지라 가벼운 티파티임에도 제법 화려했다. 금과 같은 값을 지닌 차가 준비되고, 다양한 디저트가 테이블 위를 장식했다.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제법 잘나가는 가문의 영애들이었는데, 거기에 아델은 다소 이질적인 존재였다.

결혼을 하지 않아 혼자이긴 하나, 이미 자식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가문의 후계자로 확정되어 있었다. 또한 영애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름 따로 공부하긴 했지만, 익숙지 않아.’

아무래도 유행은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아델 양.”

아만다는 그런 아델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태도였다.

“여기 앉으세요. 우리 대체 얼마 만에 만나는 거지요?”

생글생글 웃으며 친근감을 표시하는 게 어색했다. 그래도 아델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아만다의 환대를 받았다.

아만다가 환대를 하니 다른 영애들도 아델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오늘 날씨가 제법 좋지요?”

물론 거기엔 어느 정도의 계산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도미니크가 정도라면 친해져서 나쁠 것 없는 가문이었으니까. 덕분에 일은 좀 더 편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가문을 물려받기 어려운 귀족 영애들을 인형처럼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듣고 생각한다.

별 수확이 없을 것 같은 티파티는 생각보다 괜찮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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