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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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그래서 어땠어?”

조심스러운 질문에 론슈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 질문에서 말하는 게 누군지 깨달았는지 입을 열었다.

“그냥 그랬어요.”

별다른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원래부터도 론슈카는 헤이른에게 관심이 없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은 헤이른의 업보였다. 애초에 그가 아델과 론슈카를 버리지 않았으면, 지금 이런 관계가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

아델은 론슈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럼 루카스 님은 어떻게 생각해?”

“싫은 사람.”

론슈카는 단호하게 말했다.

“왜 싫은데?”

“엄마를 독차지하려고 하잖아요.”

“아냐, 론슈카. 그런 게 아니야.”

아델은 작게 웃으며 차근차근 루카스에 대해 말해 주었다.

“루카스 님은 론슈카와도 가족이 되고 싶어 해.”

“아빠가 되고 싶어 하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난 아빠가 없어도 되는데.”

론슈카는 투덜거리긴 했지만, 헤이른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정 아빠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허락해 줄게요.”

“정말?”

“엄마가 그 사람을 좋아하잖아요.”

그 말에 아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니까 나도 노력해 볼게요.”

론슈카는 야무지게 대답하고는 아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니 오늘은 같이 자요.”

“그럴까?”

레이긴이나 시녀들은 이제 론슈카가 혼자 잘 때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델이 보기에는 아직 한없이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가끔 몰래 같이 자곤 했다.

“응!”

론슈카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런 아들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아델은 다시 한번 론슈카를 끌어안았다.

* *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헤이른과의 세 번째 만남의 날도 순식간에 다가왔다. 이번 만남은 조금 특별한 장소에서 가지기로 했다. 수도 외곽의 숲속이었다.

일단 명목은 소풍이다.

“론슈카!”

그렇기에 헤이른이 로잘린을 데리고 왔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로잘린은 금방 론슈카에게 달려들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쌩하니 저편으로 달려갔다.

그 뒤로 당황한 시녀와 기사들이 따르는 것이 보였다.

졸지에 아델은 헤이른과 둘만 남게 되었다.

‘저번에도 생각한 거지만, 로잘린은 눈치가 빠른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계속 이렇게 둘만 남겨 두려고 할 리가 없었다.

잠시 서 있는 사이, 시녀들이 소풍 준비를 마쳤다. 바닥에는 커다란 천이 깔리고, 그 위에 도시락 바구니가 올라왔다.

“갑자기 웬 소풍인가요?”

이런 말은 전해 듣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자꾸 따라붙으려는 눈이 있어서 외부로 나오기로 했지.”

헤이른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바닥에 앉았다. 아델은 그런 헤이른을 바라보다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았다.

“좀 더 가까이 앉아도 되는데.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네.”

답은 그렇게 해도 헤이른 가까이 가기는 싫었기에 아델은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 움직인 건 외려 헤이른이었다. 그는 아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오늘이 세 번째 날이군.”

“그렇네요.”

헤이른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으며, 탁 트인 정경이 제법 보기 좋았다. 그뿐이랴, 어디선가 낮게 우는 새소리가 마치 음악같이 들려왔다.

그래서였을까? 평소와는 다르게 방어가 느슨해졌다.

“아델.”

“네?”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해도 늦은 걸 알아. 하지만 한 번은 말해 보고 싶었어.”

“뭔데요?”

헤이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과거의 일을 묻어 두자고 하는 건 비겁하다는 걸 알아.”

아델은 놀란 표정으로 헤이른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존심 높은 사람이 시녀와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사과를 해도 마음의 응어리를 다 풀 수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아델, 난 그대를 놓치고 싶지 않아. 원한다면 뭐든 주겠어. 그게 가문이든 아니면 나의 능력이든. 모든 것을 손에 쥐여 줄 테니.”

헤이른은 잠시 말을 쉬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나와 일생을 함께해 줬으면 해. 평생 죄를 갚으며 살아갈 테니.”

절절하고 애끓는 목소리가 마음을 울렸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만약 전생을 기억하기 전에, 아니면 하다못해 루카스를 만나기 전에 헤이른의 청혼을 들었다면 마음이 움직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늦었다. 아델은 루카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안타깝네요.”

“너무 늦은 건가?”

“아시잖아요.”

아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렇지. 그럼 만약에 내가 강경하게 나가겠다면?”

헤이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 안에 담긴 진득한 감정이 아델을 짓눌렀다. 그래도 여기서 무너질 생각은 없었다.

“힘이 있으니 뭐든 가능하시겠지요. 그렇지만 그 끝에는 증오만 남을 거예요.”

“아무런 감정도 받지 못하는 것보단 증오라도 받는 게 낫지 않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증오만을 받아도 좋다고?”

아델은 헤이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변했다. 화가 난 듯도 하고, 답답한 듯도 하고, 괴로운 듯도 한 그런 표정이었다.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던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증오가 아니야.”

소름 끼치게 주변을 감싸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헤이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상하지? 예전엔 원하지도 않던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 간절해졌을까.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오도록 하지.”

그리 말한 헤이른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숲 한편으로 사라졌다.

아델은 그제야 크게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헤이른은 그 모든 걸 참아 냈다.

‘미안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가.’

그래도 너무 늦었다. 아델은 헤이른과 같이할 수 없었다.

그쯤 되어 로잘린과 론슈카가 돌아왔다. 양손에 꽃을 가득 안은 아이들은 무척 신나 보였다.

“잘 놀다 왔니?”

“네! 그런데 아버지는요?”

“잠시 산책하러 가셨어.”

“산책이요?”

로잘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델은 웃음으로 때웠다.

“론슈카도 잘 놀았어?”

“응.”

론슈카는 아델에게 꽃을 불쑥 내밀었다. 정원에 핀 꽃 같은 화려한 맛은 없었지만, 단아한 느낌이 좋았다.

“엄마 주는 거야?”

“응!”

“고마워, 론슈카!”

“저도 드릴게요!”

론슈카가 준 꽃에 로잘린의 준 꽃이 더해지니 치맛자락이 화려해졌다.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 * *

“따라오지 마라.”

헤이른은 뒤따르려는 기사도 떼어 놓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한참을 걸어 인적이 없는 조용한 공간에 도착했다.

아델에게는 감정을 추스르고 오겠다 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지금도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아델을 사랑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피어난 감정은 헤이른을 괴롭게 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이미 때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인제 와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아델에게서 조금이라도 증오를 덜어 내는 일.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그걸 아는데도.’

저도 모르게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어리석다.’

사랑은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우라 배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을 견디기 힘든 건 이미 그도 변했기 때문이리라. 헤이른은 눈을 감았다. 새까매진 세상이 그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했다.

헤이른은 한참이 지나서야 되돌아왔다.

“아버지!”

로잘린은 그런 헤이른을 반기며 소풍 바구니를 열었다. 그 안에는 소풍을 위해 준비된 음식들이 정갈하게 들어 있었다.

먹기 편하게 잘린 샌드위치, 키쉬, 타르트, 하얀 빵과 버터, 치즈, 마멀레이드 잼. 마실 것으로는 베리 주스와 레모네이드가 준비되어 있었다.

뛰어노느라 지친 아이들은 음식을 잔뜩 먹어 치웠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아델도 덩달아 많이 먹어 버렸다.

‘요리사 실력이 뛰어나네.’

역시 웨더필드가라고 해야 하나. 아델은 감탄했다.

“아버지는 안 드세요?”

“나는 배가 불러서.”

그런 음식을 거의 먹지 않은 건 헤이른뿐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온 뒤로 내내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아델은 그를 모르는 척했다. 내내 말이 없던 헤이른이 다시 입을 연 건 헤어지기 직전이었다.

“아델, 괜찮다면 론슈카의 상처 치료는 내일로 잡아도 될까?”

“좋아요.”

아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내리누르며 답했다. 드디어 론슈카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상처 치료요?”

그 소리를 들었는지 론슈카가 물어 왔다.

“그래, 상처 치료. 그동안 힘들었지. 내일이면 론슈카도 상처가 사라질 거야.”

아델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으나, 론슈카는 생각보다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난 치료 안 해도 되는데.”

그러더니 덜컥 내뱉는 말이 그런 것이다.

“뭐?”

아델은 당황하여 론슈카를 바라보았다.

“치료 안 해도 된다고요.”

론슈카는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왜?”

아무리 옅은 화상 자국이라 해도 얼굴에 난 것이니만큼 불편할 것이다. 그런데 필요 없다니.

“그러니 엄마도 더는 저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돼요.”

그제야 아델은 론슈카가 상처 치료를 거부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론슈카는 아델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헤이른과 만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미 약속은 모두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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