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충동을 거부할 수 없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아델은 슬며시 루카스에게 다가가 그의 뺨에 입 맞췄다. 그러자 그는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밤이 늦었어.”
“그러게요, 늦었네요.”
“마차를 부를까?”
여기선 당연히 그러자고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 가시지 않은 축제의 열기, 루카스에 대한 마음이 합쳐져 망설임을 만들어 냈다.
루카스는 그 망설임을 읽어 낸 모양이었다.
“축제는 끝났지만, 남아서 여운을 즐기는 사람들은 있지.”
“그러게요. 즐거운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네요.”
“우리도 좀 더 머물다 갈까?”
“좋아요.”
아델은 루카스를 따라 다시 방 밖으로 나섰다. 등은 대부분 꺼지고 불꽃은 사라졌지만, 아직 거리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은 잘 마시나?”
“조금.”
전생 기준으로 이슬 한 병 가량 즐길 정도는 되었다. 그렇기에 아델은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면 저기로 가 보지. 겉은 허름해 보여도 제법 괜찮은 포도주를 들이는 곳이야.”
결론적으로 루카스의 말은 맞았다.
귀족들이 마시는 포도주만큼은 아니지만, 가게에서 마시는 포도주도 제법 맛있었다.
술이 약간 들어가니 다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가는 취기에 당황했지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전생의 아델과 현생의 아델의 주량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결국 아델은 가게의 테이블 위에 축 늘어졌다.
머리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으나, 도저히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이런.”
위에서 난처해하는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
자신을 부르는 듣기 좋은 목소리에 아델이 배시시 웃었다.
“아니, 거기 애인이 취한 모양이군. 그래,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얼핏 다른 취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취해서 루카스가 귀족인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집에 데려다줘야지요.”
“아니, 아냐. 그건 아니라고!”
취객이 버럭 소리쳤다.
“내가 장담하건대 아가씨의 아버지가 무척 화를 낼걸. 나도 예전에 그랬었거든!”
“이 사람아, 그만해.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짓인가.”
“그러니 난 하룻밤 자고 들여보내는 걸 추천하네. 이른 새벽에 데려다주면 되지. 그럼 술도 어느 정도 깨고 좋지.”
“그때 자네 걸려서 엄청 혼나지 않았었나?”
“아니라니까?”
그 뒤로는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얼핏 루카스가 자신을 안아 든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단단한 가슴이 근사하다. 아델은 소리 죽여 웃었다.
“내 가슴이 근사한가?”
어라? 속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어떻게 들은 거지? 아델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루카스에게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생긴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렇게 더듬으면 걷기가 힘들어.”
자신이 더듬고 있었던가? 아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부터는 포도주는 한 모금만 마시도록 해. 이 정도로 취할 줄은 몰랐군.”
싫다. 포도주가 얼마나 맛있는데 왜 조금만 먹으란 말인가. 아델은 투덜거렸다.
“싫어도 그렇게 해. 레이긴 경에게 죽기는 싫거든.”
아버지가 왜 루카스를 죽인단 말인가. 아델은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조금 쉬도록 하지.”
루카스는 푹신한 침대 위에 아델을 내려놓았다.
“같이 자요.”
이번에는 소리 내어 말했다. 혼자 자기엔 외롭고, 쓸쓸하다. 같이 잘 만한 베개나 인형이 필요했다. 아델은 그걸 설명하려 했지만, 혀가 꼬여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루카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델의 손을 떼어 놓았다. 그러고는 포도주로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에 입 맞췄다.
그 감촉이 좋아 아델은 루카스의 목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는 입맞춤이 간질간질하다.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던 것 같다.
이후 기억이 끊겼다.
“으음.”
밖에서는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어디선가 경쾌하게 우는 새소리가 들려온다.
몸을 옆으로 돌리고 입을 우물거리던 아델은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어쩐지 몸이 불편한데.’
느릿하게 몸을 더듬어 보니 옷이 만져졌다. 밖에서 놀 때 입었던 옷 그대로이다. 이러니 불편할 수밖에 없지.
뒤늦게라도 옷을 벗어 던지려던 아델은 순간, 현실을 깨달았다.
“헉!”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보는데, 저 멀리 의자에 기대어 자는 루카스가 보였다. 그 또한 모든 옷을 그대로 입은 상태였다. 같은 침대를 쓰진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매너 있는 사람!’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서서히 간밤의 추태가 기억나기 시작했다.
‘난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아델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밤새 한 행동을 생각하니 천년의 정도 떨어졌을 것 같았다.
술주정도 적당히 했어야지! 아델은 머리카락을 죽죽 잡아당겼다. 그 와중에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나?”
“네? 네!”
“몸은 괜찮고?”
“괜찮은 것 같아요.”
속이 좀 답답하긴 하지만, 이 정도야 버틸 만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프라도 먹도록 하지.”
루카스는 이미 아델을 위해 아침 식사도 주문해 둔 모양이었다. 고기는 없는, 주정뱅이를 위한 식단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의자에 앉은 아델은 루카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러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뜨끈하고 부드러운 수프는 아픈 속에도 잘 넘어갔다. 거기에 음료 또한 적당히 달콤하고 시원해서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제가.”
아델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어제 실수를 많이 했지요?”
“딱히 실수한 건 없는데.”
배려심이 너무 좋다. 지금도 어젯밤에 벌인 일이 전부 생각나는데 실수한 게 없다니.
이대로 모르는 척 넘어가도 되겠지만, 아델은 그럴 수 없었다. 루카스와는 앞으로도 계속 같이할 사이였으니까.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요.”
“정말이야. 아, 대신 이건 약속해 줘야겠어.”
“뭔데요?”
아델은 긴장한 얼굴로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내 앞에서만 취하기.”
“네?”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떨어트릴 뻔했다. 저 말은 취한 모습이 그리 나쁘지 않았단 걸까? 아니면 너무 추해서 단속하겠단 소리인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데 루카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아델은 그런 루카스에게 배시시 웃어 주었다.
그래도 해프닝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다. 만약에 거기서 더 사고를 쳤다가는 큰일 났을 것이다.
아델은 얌전히 식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소 시녀가 입혀 주던 옷이라 혼자 매무새를 다듬기는 어려워 조금 구깃구깃했지만,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루카스도 옷을 갈아입고 축제 때 입었던 옷을 따로 정리했다.
“그래, 어제는 즐거웠어?”
“즐거웠어요.”
“그럼 다음에 또 오도록 하지.”
“저는 좋아요.”
“다만.”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이렇게 끝나진 않을 거야.”
“뭐, 뭘요?”
“봐주는 건 이번뿐이란 소리지.”
그러면서 상큼하게 웃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안 봐줘도 되는데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대체 이 남자는 왜 이리 매혹적인 거람.
아델은 재차 헛기침을 하며 그와 함께 숙소를 나섰다.
그렇게 이른 아침 마차를 타고 저택에 도착한 아델은 몰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그 앞은 이미 두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 론슈카.”
아버지인 레이긴과 론슈카였다. 뒤쪽에서 카이가 제스처로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저로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 아델. 밤새 어디 다녀온 거냐?”
“어디 다녀온 거야?”
둘 다 눈을 세모꼴로 뜨고는 아델을 추궁했다. 도움이 필요했으나 여기서 아델을 도와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빨리 말해 보거라.”
“빨리 말해요.”
절대 물러날 기세가 아니다. 그 때문에 아델은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서서 간밤의 일을 이야기했다.
물론 많이 축소했다.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면 레이긴부터 뒷목을 잡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저, 저런 나쁜 놈 같으니!”
“나쁜 놈!”
레이긴의 말에 론슈카가 추임새를 넣었다.
“그런 건 아닌데요.”
어떻게든 루카스를 감싸 주려 했지만, 레이긴에게서 루카스의 점수는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즐거웠는걸요.”
“그게 다 수작 부리는 거란 말이다!”
“어차피 앞으로도 같이할 사람인데요.”
“뭐? 누구랑 같이해? 결혼한다는 소리냐?”
아,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직 정식으로 청혼받은 적도 없고 헤쳐 나가야 할 일은 지독하게 많았지만.
아델은 그 뒤로부터 한참 동안 분노한 레이긴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는 건 그 저변에 깔린 걱정 때문이리라.
‘가족이란 좋은 거지.’
어찌어찌 레이긴에게서 벗어난 아델은 이제 묵직해져 안아 들기도 힘들어진 론슈카를 바라보았다.
“론슈카, 미안해. 엄마가 늦었지.”
론슈카는 입술을 삐죽였다.
“늦었어요. 그래도 뭐, 엄마도 가끔은 쉬어야 하니까.”
어른스러운 말에 아델은 감격하여 론슈카를 끌어안았다.
“어쩜 이렇게 어른스러워졌담! 하지만 론슈카, 엄마는 어린 론슈카도 좋으니까 빨리 자라지 말아 줘.”
“싫은데. 빨리 자라서 더 강해질 거예요.”
“귀여워!”
아델은 론슈카와 뺨을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