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아델은 나름 차분하게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루카스가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떨고 있어.’
가늘게 떨리는 손이,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여려 보여서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아마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아델이 늘어놓은 이야기는 허황된 망상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그녀의 이야기가 충분히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믿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 말이다.
‘행복’이라는 부분에서 더 그러했다. 확실히 루카스는 예전보다 훨씬 행복했다.
주변을 둘러싼 상황은 더 복잡해졌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그런 사람을 내내 떨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생각나는 것이 있어 아델에게 말을 걸었다.
“저녁에는 시간이 좀 되나?”
“저녁에요? 오늘은 일정을 더 잡지 않았기에 비어 있어요.”
아델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침 잘됐군. 나도 비어 있거든.”
루카스는 아델을 바라보며 웃었다. 마침 강변 근처에서 야시장이 서는 날이다. 그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의 사람들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었다.
“데이트 신청인가요?”
아델이 루카스와 마주 보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레이디. 데이트 신청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기꺼이.”
루카스는 가장 먼저 강변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이미 대부분의 숙소가 다 차긴 했지만, 귀족이 사용하는 비싼 숙소라 그런지 방 하나가 비어 있었다.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사용인을 불러 새 옷을 구해 오게 하였다.
“이런 자리에는 편한 옷을 입고 가는 게 좋지.”
아델은 연두색의 외출복을 벗고 좀 더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루카스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의상은 시선을 모은다. 루카스는 그보다 순수하게 야시장을 즐기게 해 주고 싶었다.
“그나저나 강변에 야시장도 서는군요? 몰랐어요.”
“귀족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으니까.”
“왜요?”
“고루한 체면 때문이지. 해 봤자 숙소에서 야시장을 바라보는 게 전부일 거야. 하지만 장담하지. 야시장은 바라보는 것보다 직접 참여하는 게 재미있어.”
“아이들도 데려오면 좋았을걸요.”
아델의 중얼거림에 루카스가 답했다.
“그러면 데이트가 아니게 되잖아. 가끔은 둘만 있는 것도 좋지 않아?”
“그런가요?”
“론슈카에게는 카이를 붙여 줬다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가 알려 줄 거야. 그는 유능한 기사니까.”
이때만은 평소에 못마땅해하던 카이를 추켜세웠다. 그래야 아델이 안심하고 움직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가 유능한 기사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긴 하지.’
그러니 오늘만은 아델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랐다.
“그렇죠. 카이는 유능한 사람이죠.”
본인이 치켜세워 놓고 아델이 동조하니까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래도 루카스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럼 이제 야시장을 둘러볼까?”
“아직 준비가 다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준비를 살펴보는 것도 즐거움이지.”
루카스는 아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은 잠시 망설이다 그의 손을 잡고 발을 내디뎠다.
한동안 귀족다운 옷만 입었다가 편한 옷을 입으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어느새 제법 시간이 지나 하늘을 올려다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희 저녁은 어떻게 해요?”
“야시장이 섰는데 어떻게 하겠어?”
다른 귀족들이라면 치를 떨 행동을 루카스는 태연하게 하고 있었다.
‘확실히 야시장의 묘미는 가판대에서 여러 가지를 사 먹는 데 있지.’
아델은 강원도에 살았던 어릴 때를 떠올렸다. 거기서도 매달 강변에서 야시장이 서곤 했다.
보기 드문 삶은 번데기에 커다란 소시지, 핫도그. 때로는 구운 옥수수를 팔기도 했다.
‘그리고 또 뭘 팔았더라?’
기억났다. 게임을 하면서 상품을 따는 코너도 있었고, 엿을 파는 각설이도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서커스도 봤던 것 같다.
‘여기도 비슷할까?’
아델은 하나둘씩 세워지는 가판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판대가 세워지는 동시에 등불도 여기저기에 걸렸다. 그래서 아주 어둡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아델은 루카스의 손을 놓지 않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아롱거리는 불빛 아래에서 둘은 사람이 가득 찬 야시장을 누볐다. 겉면을 바싹하게 구운 감자 구이를 사 먹고, 돼지고기로 만든 꼬치구이도 먹었다. 거기선 도수가 낮은 과실주도 팔고 있어, 그도 마셨다.
루카스는 힘을 쓰는 게임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외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긴 기사가 여기서 힘을 쓰면 그 자체로 치트지.’
아델은 그런 루카스를 이해했다. 대신 다른 게임에는 참여할 수 있었으니 되었다. 루카스는 아델에게도 게임을 권유했다.
“이 화살을 저 항아리 안에 넣으면 됩니다!”
루카스는 다섯 개를 전부 한 번에 넣었다.
“와,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주인도 찬사를 내뱉었다.
“이쪽 아가씨 실력도 대단하시네요!”
입바른 말이었다. 루카스와 달리 아델은 두 개를 겨우 넣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열 번 정도 던져서 성공했다.
‘꼭 투호 같네.’
익숙한 놀이라 그런지 배는 재밌었다. 상품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루카스는 머리핀을, 아델은 나무를 깎아 만든 조잡한 인형을 받았다.
“서로 교환할까요?”
아델의 말에 루카스는 서슴없이 머리핀을 내밀었다. 게임 상품치고는 제법 괜찮게 만들어진 머리핀이었다. 아델은 그걸 받아서 머리에 살며시 꽂았다.
“어때요?”
“내 눈에는 더없이 예쁘지.”
장난삼아 물었다가 돌아온 답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아델은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루카스를 이끌었다.
“저거도 해 봐요!”
그다음에 한 건 통 안에 든 주사위의 홀짝을 맞히는 것이었다.
‘이건 도박 아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환하다. 이 정도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우리도 걸어 볼까요?”
아델은 화폐의 최소 단위가 되는 동전을 몇 개 꺼냈다. 숙소에서 나올 때 루카스가 쥐여 준 것이었다.
돈을 걸자마자 남자는 현란하게 통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탁 내려놓고 물었다.
“홀? 짝?”
처음 시작할 때 주사위의 면을 보여 주긴 했으나, 저렇게 흔들면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래도 아델은 나름 고심하여 말했다.
“홀? 루카스는요?”
“나는 짝.”
일부러 다른 면에 거는 전법인가. 나쁘진 않다. 홀이든 짝이든 어느 하나엔 걸릴 테니까.
아델은 반짝이는 눈으로 열리는 통을 바라보았다.
“이런, 아깝습니다! 짝!”
그 말에 누군가는 한탄하고, 누군가는 웃었다.
이거 의외로 재밌다. 이래서 사람들이 도박에 빠지는 걸까? 아델은 이후에도 몇 번 더 돈을 걸었다.
일부는 틀리고 일부는 맞혔다. 그렇지만 루카스는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가게 주인의 표정이 좋지 않다.
“여기까지 할까요?”
“그러지.”
루카스는 아델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뭔가 할 것처럼 굴던 가게 주인도 둘이 떠난다니 잡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운이 좋네요! 어떻게 전부 맞힌 거예요? 혹시 요령이라도 있나요?”
“소리를 듣고.”
“그게 가능해요?”
“난 가능하지.”
“대단하네요.”
이게 바로 소드마스터! 아델은 감탄했다. 실상 홀짝을 하던 이들은 반쯤 사기꾼이라 열심히 주사위를 조작했지만, 그녀는 그걸 알지 못했다. 조작에도 불구하고 루카스는 맞혔기 때문이었다.
야시장을 즐기는 동안,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화려하게 밤을 비추던 등불도 하나둘씩 꺼지고, 가판대도 접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너무 즐거웠어요!”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루카스는요?”
“나도 당연히 즐거웠지.”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보다 이제 돌아가야겠는데.”
“아직 마지막 볼거리가 남아 있는데 돌아가려고?”
“그게 뭔데요?”
“불꽃놀이. 규모가 크진 않지만 강변에서 보면 근사하지. 그래서 숙소도 미리 잡아 둔 거였고.”
“세상에!”
루카스는 이미 생각이 다 있었구나. 아델은 감탄했다.
“그럼 숙소로 돌아갈까?”
“네!”
아델은 그대로 루카스와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불을 끈 채 숙소의 커다란 창에 자리 잡고 앉아 어두운 강변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야시장도 좋지만, 예전에 살던 곳 생각나지?”
“네, 당연히 기억하죠.”
“그 근처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도 제법 괜찮아. 규모는 작지만 알차지. 사과가 주요 상품이라 대부분 그에 관련된 것들이 나오는데 그중 사과주가 일품이야.”
“멋지네요.”
“다음에 같이 갔으면 좋겠군.”
“그러게요.”
갈 수 있으려나? 루카스도 자신도 앞으로 많이 바빠질 텐데. 예전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한 가문을 짊어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아, 시작하나 봐요.”
강변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게 몇 번 반복되더니 불꽃이 점점 커지면서 펑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갔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아델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하늘에 피어오른 주황색의 불꽃. 그걸 멍하니 응시하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루카스가 불꽃이 아니라 아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꽃이 피어오를 때마다 루카스의 얼굴이 반짝 빛났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아델은 어떠한 충동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