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아델은 복잡한 마음 그대로 웨더필드가의 앞에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수 있는 상점가에서 만나는 건 아닐 것 같아 거절했더니, 헤이른은 아델을 제 집으로 초대했다.
그것도 아델 혼자만 초대한 것이 아니었다. 론슈카와 레온, 그 둘도 같이 초대했다. 겉보기엔 딸인 로잘린을 위해서 친구를 초대한 모양새였다.
‘이래도 되는 건가?’
아델은 이쪽이 훨씬 나았지만, 헤이른에게는 아닐 텐데.
‘아니, 그는 배려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야.’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아델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세 번, 단 세 번만 버티면 론슈카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다.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을 가장 먼저 반긴 이는 로잘린이었다.
“론슈카!”
로잘린은 그대로 론슈카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어디로 데리고 가는가 싶어 따라가려는데, 헤이른이 나타났다.
“온실로 가는 거다. 거기에서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으니까. 친구들이랑 같이 놀게 되었다고 며칠 전부터 들떠 있더군.”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원래 로잘린에게 큰 관심이 없던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 아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헤이른이 말했다.
“난 어렸을 적에 가문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버티고 정령사가 되었다. 그래서 로잘린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요?”
“최근에 아니란 걸 알게 되었지.”
또한 아델에게 거절당하면서 로잘린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 뒤로는 평소보다 좀 더 온화하게 구는 중이었다. 로잘린은 그런 헤이른을 무척 반겼다.
아빠와 딸은 조금씩 사이가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저택의 분위기도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그럼 아이들은 저들끼리 놀게 놔두고, 우리도 티타임을 가지도록 하지.”
아델은 헤이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로잘린은 온실에 준비된 작은 의자에 앉아서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티타임은 그녀가 직접 준비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론슈카의 반응이 기대되었다.
“레온은 좀 늦을 모양인가 봐.”
“그러게.”
론슈카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정령을 움직였다. 헤이른의 이야기를 엿들을 셈이었다.
그러나 바로 앞의 로잘린도 정령사. 대놓고 정령을 움직이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안 돼!”
로잘린이 단호하게 말하며 론슈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너 지금 정령을 보내서 두 분 이야기를 엿들으려는 거지?”
“그렇다면?”
“말려야지. 그런 건 옳지 않은 행동이야.”
그 말에 론슈카는 입을 다물었다. 그도 많이 성장했다. 그게 육체적인 의미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로잘린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헤이른은 싫은걸.’
남들은 전부 자신이 그와 닮았다고 하지만, 론슈카는 그게 싫었다. 왜냐하면 엄마가 그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그 때문에 자신도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불안해졌다.
“정령은 꺼내지 말고 차나 마시자.”
“그럴 기분 아닌데.”
“대체 넌 왜 그렇게 아버지를 미워하는 거야?”
론슈카가 헤이른을 싫어하는 건 로잘린도 알고 있었다. 남들이 뭐라 해도 그녀에겐 소중한 아버지인데. 헤이른이 미움받는 걸 보니 절로 시무룩해졌다.
“아버지도 반성하고 있어.”
“무슨 반성?”
“몰라. 하지만 아이카 님이 그렇게 말했어. 그러니 론슈카도 아버지를 너무 많이 미워하지 마.”
론슈카는 눈시울을 붉히는 로잘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쯤 레온이 도착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레온은 도착하자마자 둘을 보더니 물어 왔다.
* * *
아델은 직접 차를 우리는 헤이른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여기.”
그런 상황과 별개로 차는 무척 맛있었지만. 둘은 잠시 조용히 차를 마셨다.
“오늘은 론슈카가 얌전하군.”
“무슨 말인가요?”
“알잖아. 평소 론슈카가 정령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엿듣곤 한다는 거.”
그래, 그건 최근 아델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번 날을 잡아 그래선 안 된다고 이야기할 참이었다.
“아직 호기심이 많을 나이라서 그래요.”
“그런가.”
“어리잖아요.”
귀족 사회에서는 아이도 작은 어른처럼 취급되곤 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여러 공부를 시키고, 사교계에서 인간관계를 다지길 원한다.
이는 사랑받는 집 아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통은 아델처럼 굴지 않는단 소리였다. 그래도 헤이른은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 아직 어리지.”
둘 사이의 대화는 중간중간 끊겼다. 아델이 헤이른을 어색하게 여기는 데다가 공통적인 주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헤이른이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게 있었지.”
“뭔가요?”
그런 게 있었나? 아델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무엇일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아델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한 거지?
“제대로 사과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뭐가 미안한데요?”
“모든 것이. 널 두고 떠나온 것도. 그걸 잊고 지냈던 것도. 론슈카만을 탐냈던 것도.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사과할 게 한두 개가 아니군.”
“저는 악당의 회개는 믿지 않아요.”
“그래, 내가 악당인 건가?”
헤이른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저에게는 나쁜 사람이죠.”
론슈카를 낳고 가장 힘들었을 때, 가족 외에 생각난 이는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델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스쳐 지나갈 인연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인제 와서 사과를 한다고?
‘차라리.’
그런 말은 하지 말지.
언제나 나쁜 사람으로 남아 주었으면 했다. 그래야 자신도 그를 마음껏 미워할 수 있을 테니까.
“용서를 바라진 않아.”
“용서를 해 줄 생각도 없어요.”
아델은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냉정하군.”
“각오한 것 아닌가요?”
“그래, 각오했지.”
헤이른은 찻잔을 들었다.
“그보다 슬슬 그가 올 시간이군.”
“그라니요?”
“루카스. 입구에서 막으라고 해 두긴 했지만, 얼마 막지는 못하겠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뭐라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루카스?”
진짜 왔다. 아델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카스는 내부를 둘러보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당당하군.”
“그쪽이야말로 슬슬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아델이 다시 너에게로 돌아갈 일은 없어.”
루카스는 냉정하게 현실을 말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말이지.’
그걸 타인, 그것도 루카스에게 들으니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이유로 헤이른은 루카스를 좀 골려 주기로 했다.
“왜 그리 확신을 하지?”
“아델은 나와 함께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마음이란 언제나 변하는 거지.”
“그럴 일은 없다.”
“왜 그렇게 장담하는지 모르겠네.”
헤이른은 빈정대며 말했다.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건 금방이었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더한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은 헤이른은 아델에게 말했다.
“티타임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군.”
“좋아요.”
아델은 서슴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따라 루카스도 일어났다.
“하지만 잊지 말아요. 이로써 기회는 한 번 끝났어요.”
“알고 있어. 오늘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했으니 괜찮다.”
소중한 기회 한 번을 사과로 날려 버린다고? 헤이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남은 기회는 두 번. 그동안 헤이른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난 세월 내내 쌓인 증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직 론슈카는 로잘린과 놀고 있는 것 같으니, 괜찮다면 남는 시간 동안 정원을 둘러보지. 웨더필드가의 정원은 아름답고 화려하기로 유명하니까.”
“그러도록 하죠.”
소설 속에서도 웨더필드가의 정원은 아름다웠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이 기회에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아델은 그대로 문밖을 나섰다.
“아델.”
“네.”
슬쩍 돌아보니 루카스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어쩐지 심통 난 것처럼 보여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웨더필드가는 위험해.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거지?”
“약속했으니까요.”
“무슨 약속?”
“세 번 만나 주면 론슈카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로 했어요.”
“그걸 볼모로 잡다니, 여전히 헤이른 웨더필드다운 행동이군.”
그 말은 맞았지만, 오늘 헤이른은 사과하는 것 외에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 사과를 했지.’
그 순간 울컥하며 눈물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어할 수도 없었다. 갑자기 볼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에 루카스가 당황했다.
“아델? 괜찮아?”
“괜찮아요.”
“헤이른 때문에 우는 건가?”
루카스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아니에요.”
그저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아, 나는 헤이른에게서 사과를 받고 싶었구나.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사과 한마디로 보상받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아델은 뺨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연신 눈물을 흘렸다. 루카스는 그런 그녀의 옆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