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곧 영지전이 시작되겠네.”
음유시인 파라보.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나와 있었다.
얼핏 보면 양쪽의 병력이 비슷해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다르다. 프랑크 후작 쪽은 용병의 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어쩐지 결과가 보이는걸.”
그걸 알면서도 파라보는 물러나지 않았다.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많은 돈을 받기도 했거니와,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제국에서 영지전을 언제 또 보겠어.’
왕국에선 종종 일어나곤 하는 영지전도 제국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이 특수한 상황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팔 소리가 크게 울러 펴졌다. 영지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각각의 진영에서 대표가 앞으로 나섰다. 한쪽은 커다란 덩치를 지닌 브뤼노, 다른 쪽은 여성이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하얗고 커다란 말에 올라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갑옷을 입고 깃발을 들고 있었다.
깃발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건 이미 사라진 패트릭가의 것이었다. 그를 깨닫자마자 숨이 턱 막혀 왔다.
지금, 여기서 과거에 사라진 공작가가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앞장선 여성은 마치 발키리와도 같이 늠름한 모습으로 깃발을 흔들었다.
‘악상이 떠오른다!’
파라보는 황급히 악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투는 훗날 전설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전설이 시작되는 현장에 나와 있었다. 그게 더없이 기뻤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용병들은 사병들보다 적극적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상대편에는 규격 외의 사람이 하나 있었다.
‘루카스 경.’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로 소드마스터로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대체 누가 이기랴.
브뤼노가 멧돼지처럼 달려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낙마했다.
‘그래도 제법 괜찮은 기사였는데 말이지. 금방 무너지는군.’
브뤼노가 무너지자, 나머지도 금방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용병들이 뒤로 물러서고, 사병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패트릭가가 속해 있는 진영이 승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황궁에서 파견된 중재자가 곧 깃발을 치켜들었다.
“승리자는 패트릭, 프레데릭, 도미니크가이다!”
로드린, 브뤼노, 프랑크가는 이번 영지전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동안 그들이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 * *
패트릭가의 부활은 화려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레이나가 전투에서 활약한 모습은 음유시인과 당시 영지전에 참여한 병사들에 의해 넓게 퍼졌다.
실제로는 얼굴을 보이고 깃발을 흔든 게 다였지만, 원래 입 두 개를 거치면 없는 일도 생기는 법이었다.
“좋아요. 압도적인 승리였어요.”
아델은 박수를 치며 사람들을 맞이했다.
“레이나 양도 잘했고,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요.”
“나는?”
루카스가 중간에 끼어들어 물었다.
“루카스 님도 잘하셨어요.”
아델은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자, 그럼 이제 이겼으니 그 결과를 수확할 시간이군요.”
“패트릭가는 재물의 일부만 받으면 됩니다.”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래는 패트릭가의 재산을 모조리 돌려받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지나치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기에 고민 끝에 받는 몫을 줄이기로 한 것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이번은 패트릭가를 위해 나선 거였는데. 그냥 원래 패트릭가의 자산은 전부 가지고 가요. 그래도 모자라면 다른 가문의 것으로 채워 줄게요.”
“아니요,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 같아요.”
“이번만 이기적이 되세요. 나중에는 달라고 해도 안 줘요. 패트릭가를 바로 세워야 할 거 아닌가요?”
“그야 그렇지만.”
레이나가 망설이자 레이긴과 루카스도 끼어들었다.
“재물이 탐나서 도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니 받으십시오.”
어쩜 이리도 상냥한 사람들이 있을까. 레이나는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요. 잊지 않기만 하면 돼요.”
“잊지 않아요.”
아델의 말에 레이나는 재차 다짐했다.
“자, 그럼 일단 그들의 재산 목록을 볼까요?”
혹시라도 빼돌리는 것이 있을까 봐 철저하게 조사한 재산 목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은 과거 패트릭가의 재산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그들이 따로 모은 재산들이에요. 규모가 제법 크네요.”
패트릭가의 재산을 빼고도 남는 것이 많았다. 사병을 움직인 대가는 치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들은 그걸 보며 신중하게 재산을 나눴다. 루카스는 제 몫의 대부분을 도미니크가에 양보하려 했지만, 아델이 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결론적으로는 적절히 나누게 되었다.
“그럼 이제 다음 문제. 패배한 세 사람은 어떻게 하죠? 레이나 양은 어쩌고 싶어요?”
레이나는 양손을 힘주어 꽉 잡았다.
‘어쩌고 싶냐고?’
지나간 세월 동안 원한은 쌓이고, 쌓였다. 그들을 가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영지전에서 패배한 귀족은 다른 사유가 없는 한 건드리지 않는 게 규칙 아닌가요?”
“그렇죠. 영지전의 대가로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뺏기고 나면 몰락한 셈이니까요.”
패트릭가의 일이 예외였다. 보통은 영지전에서 이긴 뒤에 그렇게까지 하진 않는다.
“그래도 이번은 특수한 경우니 레이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저들도 한 걸 우리가 못 할 이유는 없죠. 원하는 게 있나요?”
레이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모두, 그 사람들 모두 힘들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미리 뒤로 빼돌려 둔 재산도 흡수하자는 소리였다.
“그건 어차피 계획 내였어요. 다른 원하는 건?”
“그거면 됐어요.”
오랜 시간 고생하며 자라 왔음에도 레이나의 선량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특하네.’
만약에 같은 일을 아델이 겪었으면 상대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가만둘 생각은 없지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들을 가만둔단 말인가. 아델은 그들을 철저하게 꺾어 버릴 생각이었다. 더는 덤벼들 기운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내가 너무한 걸까?’
하지만 이 의견에는 레이긴과 루카스도 동의했다.
며칠 전의 이야기였다.
“그런 자들은 일어설 힘만 생기면 다시 덤비려 들 것이다. 그러니 이 기회에 짓눌러 둬야지.”
가장 먼저 레이긴이 말했다.
“찬성입니다. 아델에게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저들을 가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내 딸을 이름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아델은 곧 공식적으로 도미니크가의 후계자가 될 몸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리 편히 부를 셈입니까?”
그 말에 루카스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아델을 도미니크가의 후계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후계자가 되면 더 바빠지는 데다가 차후 결혼할 때 꼬이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아델 영애.”
일단은 호칭부터 고쳐 보았다. 그러나 아델은 몸을 오소소 떨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아델이라고 부르세요. 새삼 그러니까 어색하네요.”
“그럼 그대도 나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건 어떤가.”
“이름으로요?”
아델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눈을 깜박이던 아델은 잠시 망설이다 루카스의 이름을 불렀다.
“루카스.”
“듣기 좋군.”
“정말요? 그럼 앞으로도 루카스라고 부릅니다?”
“얼마든지.”
루카스가 허락해 주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는 제대로 존칭을 붙여야 할 것이다. 일단은 현재 놓인 자리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나저나 이름만 부르다니.’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레이긴은 또다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꾸 아델이 루카스와 가까워지는 모습이 싫었던 탓이었다.
“일단은 중요한 일이나 마저 이야기하죠.”
아델은 헛기침과 함께 다시 토론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날 셋은 상대를 철저히 무너트리기로 합의하였다.
* * *
한동안은 영지전의 뒤처리로 무척 바빴다. 그리고 그 일이 해결되자 미뤄 두었던 일을 해결할 때가 다가왔다.
‘헤이른과의 약속.’
그걸 지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일단 첫 장소는 헤이른이 지정했다.
“여기는 상점가인데.”
바로 앞에 작은 강이 지나고 있어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덕분에 카페도 몇 자리하고 있었고, 데이트 장소로는 최적인 곳이다.
‘정말 나랑 데이트를 하고 싶은 건가?’
그걸로 되는 건가. 아델은 의자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차라리 다른 걸 요구했으면 마음은 편했을 텐데.’
아델은 한숨을 쉬며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언제까지 현실 도피를 하고 있을 순 없지.”
헤이른의 편지에 답장을 한 아델은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잔뜩 쌓인 서류를 쓱쓱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아델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내가 어째서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지 루카스에게 털어놓아야 해.’
그 부분은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었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
사실 나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데, 여긴 내가 읽은 소설 속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거예요.
‘와, 아무도 안 믿어 줄 것 같은 소리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거짓을 말해도, 진실을 말해도 방법이 없었다.
“복잡하네.”
정말 복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