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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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헤이른은 아델에게 고민만 남겨 둔 채 저택을 떠났다.

“아델.”

헤이른이 떠나자마자 루카스가 아델을 찾아왔다. 평소라면 레이긴이 그를 내쫓았을 터이나 며칠간 영지전 문제로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둘이서 이야기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루카스는 헤이른이 한 이야기가 궁금할 만도 한데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델이 먼저 말해 주기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이걸 말해도 되는 걸까?’

정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루카스와 아델의 사이는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 데이트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도 말해야 해.’

언제까지 감추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델은 집무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사실은 말이죠.”

그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듣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카스 님?”

“치료를 빌미로 만남을 요구하는 건 불순하다. 내가 헤이른과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아니, 그런데 왜 검 손잡이를 쥐고 계세요? 거기다 손등에 핏줄이 선 게 제법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정말 이야기만 하실 건가요?”

“될 수 있으면 그럴 생각이다.”

안 그럴 수도 있단 소리잖아! 아델은 일단 루카스를 말리기로 했다.

“일단 진정해 보세요.”

“나는 충분히 침착하다.”

거짓말! 이대로 내버려 두면 당장이라도 헤이른을 썰러 갈 기세면서.

아델 역시 헤이른이 밉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명색이 한 가문의 가주였다. 살해당하면 곤란해진다. 이왕 죽일 거면 차분하게 결투를 신청해 끝을 보는 게 나았다.

“일단 다시 앉아 보세요.”

루카스는 화가 난 상태에서도 아델의 말을 따랐다.

“루카스 님이 가서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그는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냥 딱 세 번만 만나면 끝날 일이에요.”

“나는 그게 싫어.”

루카스가 불퉁한 얼굴로 답했다.

“그가 품은 마음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대를 보내겠나.”

마음, 마음이라.

“그 사람이 노리는 건 론슈카예요. 그 때문에 엄마인 저를 공략하려는 거죠.”

헤이른에게 다른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있을 리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동안 해 온 짓이 있는데 이리 쉽게 마음을 바꾼다고?

‘말도 안 돼.’

아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만은 아닐 거다.”

루카스는 아델의 말을 부정했다. 그가 보는 헤이른은 전형적인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고약한 성격에 가려져 아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러했다.

“헤이른, 그는 그대를 좋아하고 있어.”

“설사 진짜 좋아한다고 해도 제 마음은 바뀌지 않아요.”

언제나 후회는 너무 늦다. 헤이른은 이미 때를 놓쳤고, 아델은 그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나야 믿고 있지만.”

잠시였지만 루카스의 얼굴에서 불안감을 엿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루카스에게 직접적으로 마음을 고백한 적이 없네.’

천천히 가까워져 가고 있었지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는 과거에 헤이른이 준 상처 때문인 듯했다.

‘하여간 나쁜 사람이라니까.’

아델은 소파에서 일어나 루카스의 옆에 앉았다. 옆에 있는 건장한 몸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 손등에 얹자 그의 감정이 한층 가깝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루카스 님.”

잠시 여유를 둔 아델은 말을 이었다.

“좋아해요.”

단 네 글자의 말을 내뱉었을 뿐인데, 그녀의 얼굴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헤이른에게 사랑을 노래했었다. 그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리 부끄러울까.

아델은 헛기침을 하며 부끄러움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러다 문득 옆을 바라보니 새빨개진 귀가 보였다. 그 색이 마치 사과와도 같아서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매만졌다.

둥그렇게 모양이 잘 빠진 귓바퀴를 부드럽게 매만지는데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

그저 이름을 부를 뿐인데 목소리가 떨린다. 그제야 아델은 자신이 하는 행동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죄송해요!”

이게 희롱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다급히 사과하는데 이번에는 루카스가 아델의 손을 잡아 왔다. 긴장했는지 힘이 들어간 탓에 손이 아파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델.”

“…….”

“나도 그대를 좋아해. 아니, 사랑하고 있어.”

이쪽은 고백이 좀 더 열렬하다.

창가로 스민 햇빛에 보라색 눈이 반짝인다. 그 눈이 보석 같아서, 너무나도 예뻐서 아델은 웃었다. 이런 미인이 자신만을 바라본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연 둘의 몸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델!”

아버지인 레이긴이었다. 아델은 다급히 루카스와 떨어져 반대편 소파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잽싸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그 말에 안으로 성큼 들어온 레이긴은 루카스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카이가 급하게 연락을 넣어 달려왔다. 론슈카는 무사하지?”

“네, 무사해요.”

“그런데 루카스 경은 왜 여기 있는 거지?”

“조금 도움을 받았어요.”

레이긴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보면 기함할 모습이었다. 언제나 예의 바른 그가 무려 공작가의 가주가 왔는데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니.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취급에 익숙해진 루카스는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긴 경.”

“안녕하십니까, 루카스 경.”

레이긴은 뒤늦게야 못마땅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소파의 남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왕 오신 김에 영지전에 대한 이야기나 좀 하고 가시죠.”

그 말에 아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슬슬 식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 식사를 준비할까요?”

“그 전에 이야기를 끝내마.”

루카스가 여기서 식사까지 하고 가는 건 싫다는 소리였다. 나중에 자신과 루카스가 사귀는 걸 밝히게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두려울 정도였다.

* * *

“쓸모없는 것들!”

프랑크 후작은 물건을 집어 던지며 길길이 날뛰었다. 조금 전에 용병들이 대부분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그것도 사로잡은 이가 헤이른과, 루카스다.

대단한 가문의 둘이 증인이 되면 자신의 처지가 곤란해진다. 용병이 입을 열지 않기를 바랐지만, 과연 그럴까 싶었다. 돈에 미쳐 움직이는 천박한 놈들. 그들은 명예를 모른다.

“곤란해, 곤란하다고.”

당장 영지전이 코앞이니 따로 재판을 걸어오진 않을 테지만, 그걸 퍼트린다면 평판이 나빠질 것이다.

“하나같이 도움이 안 돼!”

돈을 긁어모아 용병을 잔뜩 사들였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상대는 소드마스터였으니까. 어쩌면 애써 끌어들인 용병들은 단순한 인간 방패로 전락해 버릴지도 모른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도 황제에게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대로 버린 패가 되는가.’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다가오는 영지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 * *

레이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델은 그런 그녀를 보더니,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럼 이제 움직여 보세요.”

어색하게 움직이자 몸에 딱 맞게 만들어진 갑옷이 반짝 빛났다.

“좋아요. 완벽해요.”

그 모습에 아델이 손뼉을 쳤다.

“정말 괜찮은가요?”

레이나가 입고 있는 부분 갑옷은 일반적인 기사의 것과 달랐다. 가슴과 하체의 일부만 가려 주는 데다가 가볍다. 방어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나, 발키리 같아.”

그러나 다른 효과가 있었으니. 갑옷을 입은 레이나가 마치 신전 성화에 나오는 발키리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네, 괜찮아요. 원래 목적이 이거였으니까요. 사실 좀 더 제대로 된 갑옷을 입힐까, 생각도 했었는데요.”

기사 훈련을 받지 않은 20대 초반의 여성이 입기엔 너무 무거웠다. 입고 다니다 낙마라도 하게 되면 위험했다.

“아무래도 위험하니까요.”

그 사실에는 레이나도 동의했다. 처음 완성된 걸 입어 봤을 땐 몸도 가누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안전은 걱정 마세요. 곁에 기사들이 지키고 서 있을 거예요.”

화살이 날아들 수도 있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은 어느 정도까지 사병을 허용하고 있었다. 영지를 지키고 질서를 잡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병의 규모는 작위에 따라 결정되지.’

그 말은 공작인 프레데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사병 규모가 후작인 프랑크보다 크단 소리였다. 거기에 더해서 도미니크가의 사병도 프랑크 후작가보다는 수가 많고 수준이 높았다.

‘이게 기사로서 인망이 높은 사람의 힘이지.’

그 빈자리를 메꾸려 상대 쪽에서 용병을 끌어모으는 모양이었지만, 그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용병들은 시류에 예민하기에 질 것 같은 싸움에는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이들을 끌어들이려면 어쩌겠는가?

‘돈을 많이 들여야 한다.’

하지만 돈 싸움 하면 이쪽도 지지 않는다. 프레데릭가나 도미니크가나 부유한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다 이긴 싸움이야.’

그러니 패트릭가의 부활만 화려하게 알리면 된다.

‘그걸 위해 이 노력을 한 거고.’

아델은 남몰래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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