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아델의 말이 맞았다.
풀어 준 남자는 도망치려는 모양이었지만 소용없었다.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낯선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그다음부터는 헤이른의 일이었다.
추적을 막으려 했는지 남자가 수도 외곽을 몇 바퀴 돌긴 했으나, 정령이 붙어 있는 이상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돌아서 도착한 곳은 외곽에 있는 평범하지만 낡은 집이었다. 풀어 준 남자를 포함한 셋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따라 들어간 정령이 그들이 하는 말을 헤이른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어수선하게 떠들어 대는 정령들의 말을 듣고 풀어내어 설명하는 것까지 헤이른의 일이었다.
“어떻게 살아 돌아왔느냐고 화를 내고 있다는군. 같은 편이지만 의심하고 있어. 저런, 금화 주머니를 발견한 모양이야.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은 분위기인데.”
“그러면 슬슬 침투해도 되겠군.”
여기에 온 이들은 수가 많지 않았다. 헤이른, 루카스, 카이. 단 셋뿐이었다. 원래는 주변 퇴로를 막을 기사를 더 데려올 생각이었으나, 헤이른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정령은 생각보다 훨씬 유용하지. 그리고 어차피 말할 입은 하나여도 괜찮잖아?”
그래서 결국엔 단 셋이서 습격 작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가장 먼저 앞선 이는 루카스였다. 이어 카이가 뒤를 따랐고, 헤이른은 가장 뒤쪽에서 정령을 움직였다. 따라오지 못한 기사의 역할을 그가 하는 셈이었다.
“누구냐!”
겉은 평범해 보였지만, 내부는 그렇지 않았다. 사용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집 안에는 부서진 가구 사이로 남자 여럿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중 우두머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루카스는 일단 우두머리를 제압하기 위해 나섰다. 처음에는 멍하니 서 있던 그였으나, 곧 루카스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망가진 가구를 뛰어넘는 모습이 제법 빨라 보였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루카스가 던진 가구 파편에 머리를 맞고 나뒹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극히 짧았다.
“죽여, 죽이라고!”
뒤늦게 외쳐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벌써 반 이상이 항복의 의미로 손을 들고 있었다. 루카스의 유명세 때문이었다. 은발에 보랏빛 눈을 가진 소드마스터는 그들 세계에선 제법 유명한 인사였다.
“살려 주십시오!”
결국 우두머리가 내린 판단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서 실수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용병이란 소리군요.”
“맞습니다.”
정확히는 능력이 애매하여 일거리가 없어 나쁜 일에 손대기 시작한 이들이었다.
“저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협박을 당하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의뢰자가 제시한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보고 움직였다가, 목표가 귀족의 아이인 걸 알았다. 그래서 거절하고자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고 하였다.
의뢰자는 자신의 작위와 무력을 이용해서 용병들을 협박하고, 말을 따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게 누구입니까?”
카이가 물었다. 용병 대장은 슬쩍 눈치를 보면서 입을 우물거렸다.
“함부로 정체를 밝히면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 루카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었다.
“이쪽은 살려 둘 것 같은가?”
“그러게 말입니다.”
카이가 예의 까만 가죽장갑을 끼며 말했다.
“참고로 저는 필요하다면 고문도 가리지 않습니다.”
용병 대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프, 프랑크 후작가입니다!”
답은 금방 나왔다.
“좋아. 그럼 이제 그걸 다른 이들이 물어도 똑같이 대답할 수 있겠지?”
거기서 다시 한번 망설였으나, 생긋 웃는 카이를 본 용병대장은 얌전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어디서든 똑같이 대답하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로군.”
일부 도망치려 한 용병이 있었지만, 그는 헤이른이 잡았다. 그렇게 습격 사건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막을 내렸다.
* * *
“역시 그들이었군요.”
아델은 본 적 없는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뿐인 아이의 목숨을 위협받은 부모로서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모습만 보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들을 후려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이 건은 어떻게 할 거지?”
헤이른의 물음에 아델이 답했다.
“소문을 퍼트려야지요. 영지전을 앞두고 재판을 걸어 봤자 소용이 없어요. 어차피 다 털어 버릴 건데 말이죠. 그러니 평판이나 더 떨어트리죠.”
“그도 나쁘지 않겠군.”
루카스는 아델의 말에 찬성했다. 세 가문의 악행을 폭로하는 건 지금까지 꾸준히 작업하고 있었다. 거기에 하나를 더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일은 끝났지만, 남자 셋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지 않나?”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루카스였다.
“아직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만.”
헤이른은 루카스의 말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카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런 둘의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아델에게 할 말이 있어.”
“아델은 반기지 않을 텐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군. 당사자도 아니지 않나.”
“그야.”
루카스는 더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 경, 잠시 아델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는 길지 않을 겁니다.”
헤이른의 말에 카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건 의심이었다.
“일단 아델 님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카이는 아까 방을 나선 아델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헤이른, 선을 넘지 마.”
그사이 루카스는 헤이른에게 경고했다.
“선을 넘지 말라고.”
헤이른은 루카스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잘도 그렇게 말하는군. 네가 그녀의 배우자라도 되나?”
“아직은 아니지.”
“앞으로도 아닐 수도 있지.”
둘 사이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얼마 뒤, 카이가 돌아왔다.
“잠시라면 괜찮다고 하십니다. 따라오십시오.”
헤이른은 카이를 따라 방을 나섰다. 루카스도 그 뒤를 따라나서고 싶었으나, 이번엔 참아야 함을 알았다.
“이상한 소리는 안 했으면 좋겠군.”
아델과 헤이른의 인연은 끝났다. 헤이른에게 미련이 있긴 했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둘은 더 이상 이어 나갈 수 없는 관계였다.
그를 알고 있는 루카스였건만 어쩐지 불안해졌다.
아델은 집무실에서 헤이른을 맞이했다.
“이야기는 다 끝난 게 아니었나요? 웨더필드가의 영지전 참여라면 거절하겠어요. 도움도 필요 없어요.”
“그렇군.”
“그럼 이제 이야기가 끝난 거지요?”
“아니, 그건 아니다.”
“다른 용건이 또 있었던가요?”
“그래.”
헤이른은 진지한 표정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론슈카의 상처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지?”
뜻밖의 말에 아델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론슈카에게 들었기에 언젠가 헤이른이 이것으로 조건을 걸어오리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순간인 듯했다.
“그걸, 이제야 이야기하는 건가요?”
아델이 분노를 담아 이야기하자 헤이른이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론슈카에게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
“네,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야기는 빠르겠군.”
마법이 사라진 시대. 약을 이용해서 화상 자국을 줄일 수는 있었지만, 아예 없앨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다고? 아델은 간절한 표정으로 헤이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요?”
“정령사가 극에 다다르면, 속성에 따라 특이한 능력이 하나 생기지.”
불은 파괴, 대지는 포용, 바람은 전달,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은 치유. 극에 다다른 물의 정령사는 상처를 치료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거기에 드는 부재료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는 게 대단한 것이었다.
“원래 외부에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지만.”
아델은 비틀거리다가 책상을 짚고 섰다. 론슈카를 치료해 주고 싶다. 하지만 그걸 위해 헤이른이 요구할 걸 생각하면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론슈카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할까. 아델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조건은 뭔가요? 제가 뭘 하면 론슈카를 치료해 줄 건가요?”
“조건.”
헤이른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라면 무엇을 요구해도 아델이 들어줄 가능성이 컸다. 론슈카를 사랑하는 아델이라면 다소 무리한 부탁이라도 들어주려 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걸 안다.
‘안 그래도 멀어진 사이인데 그러면 마음은 더 떠나가겠지.’
그건 싫었다.
“딱 세 번. 세 번만 나와 데이트를 해 줘.”
“네?”
아델은 고개를 흔들더니 재차 물었다.
“뭐라고 하는지 잘 못 들었어요.”
“세 번만 데이트를 해 달라고 했어.”
“원하는 건 그게 전부인가요?”
아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 그게 전부다.”
어째서? 더한 걸 요구할 줄 알았는데. 그 때문에 각오까지 했는데, 요구하는 게 겨우 그것뿐인가?
‘데이트에서 뭔가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다. 헤이른은 지금 그걸 위해 데이트를 하자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그걸 원하는 거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러했다.
“치료에 들어가는 재료도 내가 전부 대도록 하지. 론슈카는 내 아들이기도 하니까.”
“그러면 조건 없이 치료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 그게 맞지.”
헤이른은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아델, 그대를 더 만나고 싶어. 그래서 욕심을 부려 봤다. 안 되나?”
보기 드물게 순수한 얼굴로 물어 오자, 더는 답하기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