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아델의 말에 헤이른은 입을 다물었다. 루카스와 아델 사이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서로 예의를 차렸다면, 지금은 그 경계가 허물어진 느낌이었다.
방금만 해도 그렇다. 루카스의 입을 틀어막는 데 굳이 몸을 움직일 필요가 있었을까? 헤이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뒤늦게 깨닫게 된 마음이 그를 찔러 댔다. 로잘린의 도움을 받아 이 자리에 서 있기는 하지만, 아델은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만약에.’
과거에 그리 굴지 않았다면, 아델은 지금과 다른 모습을 보여 줬을까?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돕도록 하지.”
“괜찮다니까요.”
“로잘린이 이상하게 여길 거야.”
이런 일에 딸을 내밀 수밖에 없는 현실도 비참했다. 그러나 헤이른은 그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역시나 아델은 로잘린에게는 약했다.
“이번만이에요.”
루카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델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 또한 어린아이에게는 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언제부터인가 헤이른은 변하고자 하고 있었다. 로잘린에게 좀 더 신경을 쓰고, 타인에 대한 시선을 바꾸려고 애썼다.
변화의 원인은 아델이나, 아델이 그 변화를 느끼는 일은 없겠지.
헤이른은 말없이 저택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루카스도 같이 따라 나왔다.
정령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미니크가의 저택이 훤히 보이는 맞은편 저택 사이. 그 사이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이른이 느끼는 건 루카스도 느낄 수 있다. 둘은 곧바로 성큼성큼 그리로 향했다.
[저 사람 도망치는데.]
헤이른의 귓가에 정령이 속삭였다.
제법 빠르게 움직인 모양이었지만, 놓칠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재빠르게 나선 이가 루카스였으니까. 소드마스터를 피해서 도망칠 수 있다면 당장 여기서 기사 작위를 내려 줘도 될 터였다.
헤이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겉은 멀쩡해 보이는 남자 하나가 끌려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는 태연한 모습으로 항의를 했다. 그냥 보기에는 결백 그 자체로 보였으나, 헤이른과 루카스는 알고 있었다. 그가 범인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게 결백하다면 어째서 패트릭가와 도미니크가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설명해 보지.”
헤이른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해입니다! 저는 그냥 저택이 멋있다고 생각하며 지켜봤을 뿐입니다. 패트릭가는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럴 리가 있나.”
루카스가 혀를 찼다.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알려 주는 것인데, 패트릭가에서부터 도미니크가까지 내내 정령이 붙어 있었어.”
그 말에 남자가 기겁하며 자신의 어깨를 털어 댔다.
[하하, 이 사람 웃겨!]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면서.]
정령들이 꺄르륵 웃으며 남자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허공에서 스르륵 움직이는 옷자락은 마치 유령이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남자는 그를 보더니 안색이 새파래졌다.
“오해, 오해입니다.”
그러고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거기에 몸마저 떨리기 시작하니 이제는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아니라고 횡설수설하던 남자는 중간에 갑자기 뛰어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루카스가 그를 붙잡았다.
이어서 그가 반지 뚜껑을 열어 죽으려고 했으나, 그는 정령들이 막았다.
그에게 더 이상 퇴로는 없었다. 그는 루카스와 헤이른의 감시 아래 도미니크가로 들어가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들어가자마자 그를 맞이한 이는 카이였다. 그는 두 사람과 함께 남자를 도미니크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의 방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생각보다 아는 건 많지 않더군요.”
카이는 까만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합니다. 이 사람의 목표는 론슈카 님이셨습니다.”
“내 아들을 왜?”
헤이른의 물음에 루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론슈카는 네 아들이 아니야.”
“내 피를 이어받은 건 사실이지 않나.”
“그게 다지.”
루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후 자기 아들이 될 론슈카에게 헤이른이 달라붙는 게 반갑지 않았다. 다소 유치할 수 있으나, 마음을 전부 감추지는 못했다.
“아델 님은 최근 반드시 기사 여럿을 대동하고 움직이시거든요. 저택에서도 주의하고 계시고요. 그에 비해 론슈카 님께는 상대적으로 호위 인력이 덜 붙어 있습니다. 그 때문인 모양입니다.”
카이는 잠시 쉬었다 다시 대화를 이었다.
“아마 론슈카 님을 납치해서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었던 듯합니다. 궁지에 몰린 쥐가 할 만한 생각입니다.”
프랑크 후작에 대한 평가가 매우 신랄했다.
“일단은 아델 님께 이 건에 대해 보고하겠습니다.”
“같이 가지.”
루카스가 움직이자 헤이른도 같이 움직였다. 카이는 그게 못마땅했지만, 일단은 도움을 받은 것이 있기에 떼어 놓지는 않았다.
레이긴은 아델에게 나쁜 짓을 한 헤이른을 무척이나 싫어해서 접근시키기를 싫어했다. 하지만 카이는 일단 이렇게 된 이상은 헤이른을 최대한 이용한 뒤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 * *
“론슈카를요?”
이야기를 들은 아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 역추적해 근거지를 파괴하고 피해를 줄지, 아니면 영지전까지 기다릴지를요.”
“기다렸다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르면 어떻게 해요. 역추적하도록 하죠.”
아델은 과감하게 말했다.
“역추적에는 정령이 가장 빠르지.”
그런 아델에게 헤이른은 슬며시 자신을 어필했다. 아델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번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도움을 받아들이지만, 본인도 그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않았다.
“일단은 그 남자를 돌려보내도록 하죠. 상태는 어떤가요?”
카이가 고문에도 능함을 아는 아델이 물었다.
“일단 겉보기엔 멀쩡합니다.”
고통을 주되, 보이는 곳은 피했다.
“그러면 뒷문으로 고이 내보내세요. 옷도 깔끔한 걸로 갈아입히고, 금화 주머니도 쥐여 주고요.”
아델의 말에 헤이른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거 생각보다.’
예전의 순진하기만 하던 어린 아가씨는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느낌이 또 나쁘지 않았다.
“같은 동료에게 의심받게 만들려는 거군.”
“저택에 끌려 들어간 동료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오면 의심이 가잖아요? 살아 나오면 안 되는데.”
남자는 상황을 파악하고 도망치려 하겠지만, 상대측은 그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깔끔한 옷과 금화 주머니를 보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거면 된다.’
이후는 정령을 붙여서 감시하다가 그들의 아지트까지 가면 되는 것이다. 아델의 의견에 헤이른과 카이는 찬성했다. 루카스는 조금 못마땅한 모양이었지만.
“추적은 나도 할 수 있다만.”
소드마스터니 오죽할까.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더 은밀한 능력이었다. 그렇기에 아델은 헤이른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 * *
남자는 몸을 벌벌 떨었다. 기사란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사람을 괴롭힐 줄은 몰랐다.
‘이 일을 맡지 말았어야 했나.’
하지만 최근 일거리가 떨어진 용병인 그로서는 이만큼 먹음직스러운 일도 없었다. 그 때문에 용병단장도 이 일에 뛰어든 것이기도 했고.
남자는 고통에 괴로워하며 조용하고 차가운 방에서 버텼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모습을 감췄던 기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떨림이 잦아들고 있던 몸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제 뜻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는 다시 얼씬도 하지 않을 테니 살려만 주십시오.”
여기서 죽기엔 너무 억울했다.
“좋아, 살려 주지.”
기사는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따라 나오도록.”
그는 남자를 씻기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으며, 새 옷과 묵직한 주머니를 주었다.
“이걸 입고 뒷문으로 나가면 된다. 그러면 살 수 있겠지.”
“저, 정말 살려 주시는 겁니까?”
“나는 거짓말을 하진 않아.”
그렇게 남자는 해방되었다. 뒷문을 지키던 기사도 남자를 못 본 척해 주어 문을 통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저택에서 멀어진 뒤에야 뒤늦게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돈에 눈이 멀어 저도 모르게 입이 찢어졌다.
“도, 돈이다!”
그 고생을 했던 이유도 돈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여기 있는 돈은 그 일을 하고 받기로 했던 돈보다 액수가 훨씬 많았다.
‘이거면 인생을 바꿀 수 있어!’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다 얼른 빠르게 이동했다. 어디 조용한 데 가서 금화를 세어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해.’
고문까지 하면서 정보를 빼내 놓고 왜 이리 멀쩡하게 밖으로 내보내느냔 말이다. 남자의 발걸음이 다시 서서히 느려졌다.
고통으로 굳어 있던 머리를 팽팽하게 돌렸다.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써 본 끝에 남자는 기사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건 미끼다.’
자신을 의심받게 만들 미끼. 그걸 알면서도 남자는 금화 주머니를 버릴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버려.’
이것만 있으면 인생이 달라지는데!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