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사실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지 않아도 정령을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론슈카는 그 사실을 레온에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말하면 앞으로 더 귀찮게 굴 게 분명했으니까.
소리 없이 정령을 불러낸 론슈카는 바깥을 배회시켰다. 정령술은 쓸수록 늘어나는 능력이라 종종 이런 식으로 불러내곤 했다. 너무 많이 불러내면 본체인 론슈카가 멍해진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잘 조절하면 되었다.
불러낸 정령은 외부를 돌아다니며 보이는 것들을 론슈카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다 한 정령의 시선이 어떤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그는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저택을 감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흐음?’
론슈카는 그에게 정령 하나를 붙였다.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났을 무렵, 레이나가 나타났다.
“회의가 끝났어. 이제 식사하러 갈 시간이야.”
레이나는 명랑한 목소리로 둘을 불러냈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도시락 바구니를 가지고 뒷동산에 올랐다. 그렇게 높은 동산은 아니었지만, 여기 올라오면 보이는 게 있었다.
“여기서 보니까 저택이 한눈에 보이네요.”
아델의 말에 레이나는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맞아요! 조금 부끄럽지만, 이걸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여러분의 도움 덕분에 패트릭가의 저택이 이렇게 복구되었노라고. 그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 때문에 뒷동산에서 점심을 먹기로 기획한 것이었다.
“허허, 멋지군.”
아델의 말을 시작으로 전부 한마디씩 칭찬의 말을 내뱉었다.
“맞습니다. 품위 있어 보이는 저택이네요.”
“예전 모습 그대로군요.”
말이 이어질수록 레이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복구된 저택에 들어선 후에도 느끼지 못했던 현실감을, 지금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패트릭가가 다시 일어서는 거야.’
레이나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레온은 그런 누나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비록 둘뿐이지만, 패트릭가는 이제 시작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있어요.”
레이나는 뒤돌아서 사람들에게 고개를 다시 숙여 보였다.
“그만. 고개는 아까도 숙였잖아요.”
아델은 부드럽게 말하며 레이나를 반듯하게 세웠다.
“그보다 배가 고프니 얼른 식사 준비를 하는 건 어떨까요?”
“네!”
뒤따라온 시녀와 시종들이 빠르게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음식을 늘어놓았다. 레몬과 허브, 꿀을 이용해 만든 시원한 음료수, 두툼하고 맛있어 보이는 파이들, 잘 구워 낸 고기에 샐러드, 빵. 금방 화려한 식탁이 차려졌다.
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무작정 음식에 달려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델은 차분해지려 노력했다.
“론슈카, 론슈카는 뭘 먹고 싶니?”
“고기.”
“그래? 그럼 엄마가 고기를 잘라 줄까?”
그 말에 론슈카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린 고기와 덤으로 샐러드를 론슈카의 접시에 올려놓은 아델은 무엇부터 먹을까 생각하며 음식들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루카스가 접시를 건네왔다.
그 위에는 큼지막하게 잘린 먹음직스러운 미트파이가 올려져 있었다.
“저번에 잘 먹길래.”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가. 아델은 조심스럽게 접시를 받아 들었다. 아버지인 레이긴이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딱히 거절하기도 그렇지 않은가. 자기 합리화를 마친 아델은 미트파이를 포크로 쪼개 입에 넣었다.
바삭하고 향긋한 파이지에 감싸인 잘 익힌 고기와 향신료가 혀를 즐겁게 만들었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다.
“유능한 요리사를 구했군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모두 두 분의 덕이에요.”
한 저택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사용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이제 부활하는 패트릭가가 전부 구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기에 프레데릭가와 도미니크가의 도움을 받았다.
사용인을 나눠 받은 것이다. 물론 그래도 사람이 부족해서 몇은 따로 구해야 했지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희 쪽에서도 동의를 구하고 보낸 거였어요. 그러니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고용한 사용인의 스파이 여부였다. 전부 꼼꼼하게 출생지와 전의 직장을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요.”
레이나는 웃으면서 다음 음식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잠시 시름을 잊고 맛있는 식사를 즐겼다.
식사를 끝낸 후에는 아델이 가지고 온 가벼운 샴페인을 같이 즐겼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샴페인 대신 주스가 주어졌다.
배가 부른 론슈카는 그대로 자리에 벌렁 누웠다. 그러다 레온의 치댐에 끌려가고, 어른들만 남았다.
“나는 볼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이어 레이긴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이도 마중하러 가겠다면서 같이 일어섰다. 그렇게 또 둘이 사라지니 남은 이는 셋이라.
레이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잘 노는지 보고 올게요!”
그렇게 레이나도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자리에는 아델과 루카스만 남게 되었다.
“갑자기 다들 자리를 떠나네요.”
“그러게.”
둘은 잠시 어색하게 마주 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아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루카스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는 뭘 할 거지?”
“도미니크가의 후계자로서 준비하고 뒤를 잇게 되겠지요.”
“결혼을 할 생각은 없나?”
“결혼이요?”
아델은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헤이른 같은 나쁜 사람을 만나 고생했는데, 또다시 결혼하고 싶을 리 없었다. 아델은 고개를 숙여 발끝을 바라보았다.
‘루카스는 좋아해.’
하지만 결혼까지 가고 싶냐면 아직은 모르겠다.
만약 루카스와 파혼하지 않았더라면 결혼까지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도 그는 아델을 버렸다.
아델은 심술을 담아 말했다. 그도 예전의 자신처럼 조금은 괴로워하길 바랐다.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지요. 하지만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카이 경이 될 거예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루카스의 표정이 변했다. 상처받은 얼굴로 그는 말했다.
“아델, 난 그대를 좋아하고 있어. 사랑하고 미래를 함께하길 바라.”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고백에 심장이 뛰었다. 상황도 위치도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데도 열이 올랐다.
“난 그대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로 생각했는데, 틀렸던 건가?”
시무룩해져서 물어 오는 모습이 축 늘어진 대형견 같아 보였다. 아냐, 그래도 한 번에 넘어가진 말자.
“그래도 우린 이미 한 번 파혼했잖아요.”
“그때는 그래야 했어.”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아델의 손을 잡았다. 어느새 주변에서 일을 하고 있던 시녀와 시종도 모습을 감췄다.
“차후에 제대로 다시 청혼하겠지만, 불안한 마음에 미리 말하고자 해. 아델, 다른 이와 함께하지 말아 줘.”
진지한 목소리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루카스와 마주 보았다.
‘괜히 심술부렸나 보다.’
우울한 미인의 얼굴은 생각보다 파괴력이 강했다.
“아델.”
“네?”
“내가 그대에게 입을 맞춰도 될까?”
아델은 잠시 자신이 루카스의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했다. 지금 이 목석같던 남자가 입 맞추고 싶다고 말한 거야? 정말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말을 확인해 줄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델은 루카스에게 물었다.
“진심이세요?”
“나는 언제나 진심이야.”
루카스가 잡고 있던 아델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 맞췄다. 그 입맞춤이 어찌나 진득한지 가슴이 녹아내렸다.
‘이런 데서 매력 발산하지 말라고요!’
틀렸다. 틀렸어. 이건 도무지 피할 수 없다.
“아델.”
아델은 애원하듯 불러오는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맞닿아 오는 단단한 가슴에 손을 얹으니, 커다랗게 뛰는 심장의 울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떨림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이어 가까이 다가온 입술이 아델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입술이 붉은 건 혈관이 지나가는 자리라 그렇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 뜨거움은 붉은 피에서 오는 걸까.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잡념은 사라지고, 감각만이 남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루카스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엄마!”
때마침 아이들도 돌아왔는지 론슈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은 비틀거리며 루카스의 품에서 벗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 모든 행위가 끝나자마자 저쪽 수풀 사이에서 론슈카가 쏙 튀어나왔다.
“론슈카! 수풀 사이로 가지 말라니까!”
이어 잔소리를 하는 레온도 모습을 드러냈다. 뭘 하고 놀았는지 그도 나뭇잎투성이였다.
“얘들아, 같이 가야지!”
마지막으로 레이나까지 나타나니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어머나, 아델 님. 얼굴이 빨개요. 어디 아프신가요?”
레이나는 아델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조금 더워서.”
아델은 얼굴 근처에서 손을 부채처럼 파닥거렸다.
“덥다고요? 그럼 실내로 들어갈까요? 이제 식사도 마쳤으니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식사 자리를 거두고 그들은 다시 저택으로 내려갔다. 레이나가 가장 앞서고 아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아델과 루카스가 걸어 내려갔다.
그 와중에 루카스는 손을 내밀어 아델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가장 마지막으로 걸어 내려가길 잘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