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레이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레온이 말했다.
“누나,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자.”
“그래, 그러자.”
폐허가 된 집 안에서 남매는 맹세했다. 언젠가 패트릭의 작위를 되찾게 되는 날, 이곳으로 돌아오자고. 둘은 한참이나 저택을 살펴보다가 뒤돌아섰다. 안타깝지만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돌아온 저택의 입구에는 몇 번인가 본 적 있는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서 있었다. 손님이 온 모양이었다.
‘누가 왔지?’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레온이 환한 얼굴로 뛰쳐나갔다.
“론슈카!”
그러고는 빨강 곱슬머리의 작은 아이를 덥석 끌어안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엄마가 잠시 볼일이 있다고 해서.”
그 말에 레온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레이긴 님이 허락해 주셨어?”
“아니.”
“그래도 괜찮아?”
“뭐, 어때. 할아버지도 나가고 싶을 때 나가는걸.”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레이긴이 루카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레온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방문을 허락하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레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론슈카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런데 왜 너 혼자 밖에서 있어?”
“안에 있는 것보단 밖에 있는 게 편하거든.”
“너 설마?”
레온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론슈카를 바라보자 갑자기 어디선가 작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은 론슈카가 가리키는 대로 움직였다.
‘이 녀석, 지금 스승님과 아델 님의 대화를 엿듣고 있구나.’
밖에 있는 이유는 방 안에서 바람이 부는 것보단 외부에서 부는 게 의심을 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안 돼.”
레온이 엄한 표정으로 말해 보았으나, 론슈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마디 더 하려는데, 레이나가 말을 걸어왔다.
“레온, 이쪽이 네가 말하던 론슈카니? 나에게도 정식으로 소개시켜 줄래? 큰 도움을 받았는데 제대로 이야기도 못 해 본 것 같아.”
“응! 론슈카, 이쪽은 내 누나인 레이나. 누나, 이쪽은 내 동생인 론슈카.”
“누가 네 동생이야?”
“너! 나보다 어리잖아. 키도 작고.”
그러자 론슈카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키는 금방 클 거거든? 너보다 더 클 거야.”
“뭐, 크면 좋은 일이지. 하지만 아직은 더 작잖아.”
레온이 놀리듯 이야기하면서 웃었다. 그 모습이 둘의 친밀도를 나타내는 듯하여 레이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자신이 없는 동안 친한 사람이 여럿 생겼구나.
“그만 놀려, 레온.”
레이나는 앞으로 나서서 레온을 나무라며 론슈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온이 놀려서 미안해. 그래도 널 좋아해서 그러는 거니까 속상해하지 마.”
“알아요.”
“안다고?”
론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외려 부끄러워지는 건 레온이었다.
“그보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군요.”
“뭐?”
“론슈카 님~.”
론슈카의 말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들렌이 밖으로 나왔다.
“어머, 레온 님과 레이나 님도 계셨네요. 마침 잘됐어요. 두 분도 찾고 계셨거든요. 시간이 딱 맞았네요. 이리 오세요.”
마들렌은 신나 보이는 얼굴로 셋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레이나는 들어가 보지도 못한 루카스의 집무실 앞에 데려다주었다.
“어서 들어가 보세요.”
뒤에서 미는 손길에 레이나는 엉겁결에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뒤늦게야 노크를 깜박했단 걸 알았지만, 이미 늦었다.
“죄송해요!”
당황한 레이나는 사과를 했다.
“괜찮아요. 올 줄 알고 있었는걸요.”
먼저 도착해 있던 손님, 아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보다 오늘은 중요한 걸 결정해야 할 것 같아서 레이나 양을 불러왔어요.”
“중요한 것이요?”
“네, 페트릭가의 일이니 레온도 같이 듣는 게 좋겠지요?”
“레온도요?”
레이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아델의 손짓을 따라 소파에 레온과 함께 나란히 앉았다. 자연 맞은편에는 아델과 론슈카, 루카스가 앉게 되었다.
“이걸 보세요.”
아델이 서류 몇 가지를 내밀었다.
“네!”
레이나는 서류를 집어 들고 글씨를 읽어 내렸다.
“다이아몬드 광산, 은광, 자작나무 숲, 펜디 지방의 포도나무 농장.”
처음에는 이게 뭔가 했지만, 뒤로 갈수록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패트릭가가 예전에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었다.
당시 패트릭가에는 자식이 단둘뿐이라, 레온도 레이나와 함께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하나가 잘못될 경우, 다른 하나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하니 말이다.
그렇기에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레이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끝까지 서류를 읽어 나갔다. 그리고 그걸 다 읽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요?”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패트릭가의 자산이에요. 그중에서도 회수 가능한 것만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미 상대측의 잘못은 전부 찾아 기록해 두었어요.”
“증인도 찾아 두었지.”
“그러니 가까운 귀족 회의 때 패트릭가의 부활을 제의할 거예요.”
“예전 재산은 정식으로 회수한다. 폐하께서 회수한 영지도 마찬가지다. 물론 상대 쪽에서 반항을 하겠지만, 그것도 전부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해 뒀다.”
아델이 말하면, 루카스가 뒤를 잇는다. 그렇게 둘은 차근차근 현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 모든 걸 진행하자면 패트릭가가 새 출발을 할 저택이 필요해요.”
“혹시 원하는 장소가 있나?”
“장소.”
레이나는 옆자리에 앉은 레온을 바라보았다. 레온도 레이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예전의 저택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예전 저택에요? 가능한가요, 루카스 님?”
“거긴 현재 소유자가 없이 방치되어 있으니 가능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것이 부서지지 않았던가?”
“다시 세우면 됩니다.”
레이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임시로 지낼 저택을 빌리고, 이후 그 저택을 수선하는 방향은 어떤가요?”
“아니요, 저희는 원래의 집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마음은 이해되지만요.”
“제가 알기론 돈이면 뭐든 된다고 들었어요. 빠른 공사도 가능할 거예요. 부탁드립니다. 돈을 빌려주세요! 나중에 재산을 다시 돌려받으면 반드시 갚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레온까지 고개를 숙이고 부탁하니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쩌죠?’
아델은 루카스를 바라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좋아, 그럼 그러도록 하지. 키슈.”
“네, 루카스 님.”
“지금 이야기는 들었을 테지.”
“네, 사람을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키슈는 그길로 저택을 나가 목수 조합 상위권의 사람을 전부 고용했다. 돈이면 유령도 부린다고 했던가. 그들은 키슈가 제시한 액수를 듣고 당장 수리를 하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나는 힘차게 외쳤다.
“그리고 두 분 참 잘 어울려요!”
“네?”
레이나는 아직 루카스를 좋아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 마음이 그녀에게로 향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할 시간도 없어.’
목표가 생긴 이상,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잊혀 가는 패트릭가를 다시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해낼 것이다. 레이나는 단단히 결심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레이나는 레온과 함께 씩씩하게 집무실을 나섰고, 아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발랄한 아가씨네요.”
“그런가?”
평소에는 워낙 얌전히 있었던 터라, 발랄하다는 단어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예전의 레이나와 지금의 레이나는 다르다. 그녀는 큰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저런 사람은 원하는 걸 반드시 이뤄 내지.’
그러니 됐다. 그리 생각하며 루카스는 옆에 앉은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행동은 중간에 불쑥 솟아오른 작은 두 손에 의해 방해받았다.
“론슈카?”
“왜요?”
“갑자기 손은 왜 드는 거지?”
“들고 싶어서요.”
론슈카는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요즘 론슈카가 장난이 심해졌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델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전엔 레이나보다 더하던 론슈카기에 이런 장난조차 사랑스럽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론슈카의 행동에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아이가 밝으면 좋지.”
“그렇죠? 루카스 님은 어릴 때 어떠셨나요?”
“나? 나는.”
루카스는 말을 잠시 쉬었다. 그의 어릴 적은 별다른 게 없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빡빡한 스케줄을 따라 공부를 하던 나날들. 이야기할 만한 건 죄다 우울한 일들이다.
‘걱정시킬 수야 없지.’
그렇기에 대충 둘러대려고 했지만, 그 전에 루카스의 머뭇거림을 아델이 눈치챘다.
“많이 힘들었어요?”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그 케일라다.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 같지 않았다.
‘괜히 물었네.’
아델은 난처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루카스가 손을 들어 론슈카의 귀를 막아 버렸다.
“악!”
론슈카가 악을 쓰며 버둥거렸으나, 루카스는 놓아주지 않았다.
“나중에. 나중에 둘만 있을 때. 그때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루카스는 그렇게 말하며 뭔가를 바라는 것처럼 아델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대형견이 생각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알았어요. 그런데 겨우 그거 이야기하려고 론슈카의 귀를 막은 거예요?”
“안 그러면 자꾸 엿듣는단 말이지.”
론슈카가 정령을 붙여서 엿듣는 걸 루카스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나마 론슈카가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아이는 아니라 내버려 뒀지만, 적어도 이 약속만은 아델과 둘이서만 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때는 론슈카는 빼고서 만날 수 있을까?”
“안 될 건 없지요.”
아델은 작게 웃으며 루카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