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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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거짓말이 아니라고 반박해야 하는데, 분위기에 눌려 그러지 못했다. 루카스는 몸을 다시 원래대로 돌리며 말했다.

“글씨는 아마 일부러 엉망으로 썼을 테고, 나르는 건 론슈카가 했지?”

곤란하다. 긴장감에 몸이 차갑게 식었다. 아델은 손을 들어 팔을 문질렀다.

‘들키면 안 되는데.’

들켜 버렸다. 좀 더 일찍 아니라고 뻔뻔하게 답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델.”

루카스가 재차 아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의구심을 숨김없이 내놓았다.

“어떻게 이런 걸 전부 알고 있는 거지?”

아델은 루카스를 만나기 전에는 글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과거에 일어난 일을 알고 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가장 그럴싸한 이야기는 아델이 과거 패트릭가의 시녀였다는 것이겠지만, 그도 불가능한 일이다.

아델은 불을 다루는 론슈카 때문에 화전민 마을을 돌며 힘겹게 살아왔다. 게다가 공작가의 시녀 자리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자리였다. 아델이 그 일을 했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아델.”

루카스가 재차 이름을 불러 왔다. 대답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의심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아델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뭐라고 이야기해?’

내가 사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고? 그때 읽은 책이 지금 당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야기했다가는 당장에라도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아델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그로 인해 루카스와의 관계가 일그러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말할 수 없어요.”

“나에게도?”

“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

답을 들은 루카스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델, 손을 잡아 봐도 되겠나?”

난데없는 요청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말이기도 했다. 소드마스터는 손만 잡아도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나? 이야기 속에 그런 설정이 없는 걸 알면서도 불안해졌다.

“잠시만.”

아델은 심호흡을 하고 가늘게 떨리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루카스는 그 떨리는 작은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이 차군.”

긴장해서 그렇다. 루카스는 아델의 손을 감싼 채 가만히 있었다. 그 행동에서 다정함이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나는 믿고 있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말했다.

“아델은 나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을 거란 걸. 이번 일도 이유가 있으니 말하지 못하는 거겠지. 그러니 재촉하지 않겠어.”

고개를 숙인 아델과 눈을 맞추기 위해 루카스는 몸을 더 낮춰야 했다. 그 말은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단 소리였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

그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무척이나 궁금할 텐데도 루카스는 아델을 위해 묻지 않는 걸 택했다.

“언젠가 마음이 편해졌을 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할 때. 그때 말해 줘.”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다정한 걸까. 그 다정함에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더불어 그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자신보다 훨씬 큰 남자인데 이런 감정이 들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아델은 여전히 손을 잡고 있는 루카스의 손 위에 다른 손을 얹었다.

“고마워요.”

묻지 않아 줘서.

“천만에.”

보라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며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 영롱함이 보석 같다고 여겨졌을 때, 아델은 깨달았다. 자신이 루카스를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그가 다른 사람 곁에 간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가짜 약혼자니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옆에서 비켜 주겠노라고.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이 사람의 옆은 내 자리야.’

아델은 루카스의 손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이제 누가 와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루카스 님.”

“그래, 아델.”

“저 좋아해요?”

툭 튀어나온 질문에 루카스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금방 답이 되돌아왔다.

“좋아하지.”

“그럼 사랑해요?”

루카스의 드러난 귀에 붉은 물이 들었다.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수줍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루카스가 심호흡을 했다.

“지금 상황은 계산하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아델이 선수를 쳤다.

“사랑하고 있어. 평생 내 곁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옆에 당신이 있어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만약의 경우는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모든 게 잘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죠.”

“그래, 그러지. 언젠가 그대에게 하얀 로델리 꽃을 바치고 싶어.”

아델은 원하는 말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제국에서 하얀 로델리 꽃은 청혼할 때 꼭 필요한 꽃이었다. 가장 흔하고 보기 쉬운 꽃이지만, 뜻깊은 의미를 품고 있는 꽃.

“그렇다면 저는 기꺼이 그 꽃을 받을 테죠.”

자연스럽게 청혼을 이야기하는 루카스가 사랑스러웠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기뻐서 춤을 추겠지.”

“루카스 님이요?”

아델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청혼에 성공했다고 춤을 추는 루카스라니, 웃음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원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혼자 추기엔 쓸쓸할 테니 같이 춰 드릴게요.”

그렇기에 아델도 루카스의 춤에 동참하기로 했다. 둘이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마차는 계속 천천히 굴러갔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릴 때, 아델은 루카스로부터 요청 하나를 받았다.

“다음부터는 원래 글씨체로 글을 써 줬으면 좋겠는데. 그전까지는 글씨를 알아보기 너무 힘들었어.”

“왼손으로 썼거든요.”

“힘들었겠군.”

“조금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조금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 하지만 마차는 이미 도미니크가에 도착했고, 저 멀리서 레이긴이 빠른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아요.”

“그러게. 더 있다가는 레이긴 경이 날 죽이려 들겠군.”

“설마요.”

“아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

루카스는 그대로 고개를 내려 아델의 이마에 입 맞췄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지.”

그 자리를 떠나는 루카스를 보며 아델은 멍하니 서 있었다. 물론 겉과 달리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아!’

이마에 입 맞춰 주었다. 입술이 아닌 건 안타까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아델!”

어느새 옆까지 다가온 레이긴이 멀리 떠나는 루카스를 보며 펄펄 날뛰었다.

“저, 저놈이 감히 내 딸에게 입을 맞춰?”

“아버지.”

“아델, 내가 저 놈을 혼내 줄까? 그럴까? 어떻게 감히 숙녀의 이마에 허락도 없이 입을 맞추느냔 말이다!”

“제가 허락했어요.”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델?”

레이긴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너 설마 저 사람이 좋은 거냐?”

“네.”

아델은 당당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언젠가는 제 옆에 세울 거예요.”

“그 반대가 아니라 다행이구나.”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맙소사!”

레이긴은 한숨을 쉬긴 했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델이 카이와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그게 원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딸이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괜찮다. 앞으로 내가 이 두 눈 똑바로 뜨고 살펴보마.”

그러니 하나뿐인 딸 아델이 행복하기를, 레이긴은 기원했다.

* * *

한편, 프레데릭가의 저택. 그곳에서는 한창 케일라의 자료를 뒤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때문에 루카스를 지지하는 이들은 불려 나와 그녀가 머물던 남측 건물을 전부 다 들쑤셨다.

“콜록. 자료 조작이 상당히 많군요. 프레데릭가의 많은 돈이 케일라 님께로 흘러 들어갔는데요.”

서기관들의 장이 자료를 취합하여 루카스에게 내보이며 하나하나 설명을 덧붙였다.

“문제는 그 돈이 어디로 갔느냐, 입니다. 일부는 케일라 님이 사용하셨지만, 일부는 다른 쪽으로 나갔습니다. 이쪽은 조사가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액수군요.”

옆에서 조사를 돕던 키슈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프레데릭가니까 이 정도 금액을 버텨 낸 겁니다. 다른 곳이었다면 힘들었을 테지요.”

“회수는 가능한 돈입니까?”

“누구한테 흘러 들어갔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 부분에 대해선 따로 정리하여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딱 한 군데, 여기는 사안이 심각하다 생각되어 미리 전달드립니다.”

“그믐달의 밤.”

루카스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암살 단체로군요. 오래전에 루카스 님이 거의 정리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살아 있는 곳이 있다니. 끈질긴 게 마치 벌레와도 같군요.”

“대상은 누구지?”

“이번 사건으로 보아 아델 님은 확정이신 것 같고, 그 외 돈이 더 오간 걸 보아선 목표가 하나 더 있는 듯싶습니다. 아마 케일라 님께서 알고 계시겠지요.”

“그쪽으로 전서구를 보내도록 하지.”

“케일라 님은 쉽게 입을 열지 않으실 텐데요.”

루카스의 말에 키슈가 회의적인 말투로 답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 봐야지. 목숨을 앗아 가거나 해치는 것 빼고는 뭐든 해도 된다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더는 어머니란 이유로 보호해 줄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냉정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믐달의 밤을 정리하도록 하지.”

암살 단체는 한번 돈을 받으면 성공할 때까지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니 아델의 안전을 위해선 그들을 전부 쓸어 버리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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