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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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케일라도 그를 눈치챘다. 재판은 승리했지만,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추측은 어렵지 않지.’

루카스가 현장에 달려가지 않았으면 모를까. 암살자를 하나라도 살려 잡았다면 위험하다. 아무리 어머니라 하여도 암살까지 시도했는데, 가만히 내버려 둘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방법은 많았다. 시녀와 시종을 매수하여 가문의 인장을 훔치고, 다른 가문에 몸을 위탁한다. 그렇다면 루카스도 인장 때문에 제대로 손을 쓰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들이 제대로 인장을 훔칠 수 있을까?’

한때 가주 대리 역할을 했기에 인장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예전 기억이다. 이후 루카스가 돌아온 뒤에 인장은 철저히 관리되어, 케일라가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다.

‘이 방법은 글렀군.’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다른 가문에 몸을 위탁하는 것뿐이었는데. 케일라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백작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로드린은 틀렸다. 브뤼노나 프랑크를 선택하는 것이 나으리라.

그들이라면 케일라를 기꺼이 받아 줄 것이다. 일단은 침착하게 움직이는 게 필요했다. 저택에 있는 수많은 물건이 아쉬웠지만, 그를 가지러 갔다가는 그대로 연금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케일라는 저택에 들렀다 가는 건 피하기로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은 그저 하나뿐인 아들이 잘되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끝이 이렇다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직 아냐.’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다시 반등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케일라 앞으로 빼돌려 둔 재산도 제법 되었기에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일단은 밖으로 나가 마차에 올라타야 했다.

케일라는 최대한 차분한 태도로 재판장을 나섰다. 건물 앞은 이제 막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로 인해 복잡했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이래도 체면을 생각하는 것이 귀족인지라. 그녀가 탈 마차가 가장 앞에서 오고 있었다.

마부도,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도, 시녀도 전부 케일라의 사람이었다. 무심결에 돌아본 뒤로 루카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케일라를 발견하자마자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늦었어.’

케일라는 루카스에게 살며시 웃어 보이곤 마차에 올라탔다.

‘언젠가는 저 아이도 내 마음을 알아줄 테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루카스가 가까이 오기 전에 마차는 순조로이 출발했다.

케일라는 의자에 가만히 몸을 기대며 몸을 의탁할 곳을 생각했다. 로드린이 앞서 나서는 쪽이었다면, 브뤼노는 뒤에서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프랑크는.

“그들은 음험하지.”

겉보기에는 도미니크가처럼 제대로 된 기사 가문처럼 보이나 그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음험하다.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다른 이를 앞세우는 걸 좋아했고, 그렇게 생긴 이득 중 가장 맛있는 부분을 삼켰다.

그걸 고려하면 브뤼노에 가는 게 최선같이 느껴졌다.

“마부에게 브뤼노가로 가라고 전해라.”

시녀에게 이르고 잠시 눈을 붙였다. 어쩐지 몸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잠에서 깬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마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케일라는 커튼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이 컴컴했다. 재판장이 외곽인 걸 고려해도 벌써 브뤼노가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밀리.”

케일라는 맞은편에 있는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릴 때부터 같이해 온 유모의 딸. 밀리는 유령같이 창백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리, 마부에게 확실하게 말은 전했지?”

“네, 전했어요.”

“그런데 이쪽은 브뤼노가로 가는 방향이 아닌 것 같은데?”

“케일라 님.”

밀리가 허공에 머물던 시선을 내렸다.

“저희는 브뤼노가에 가지 않아요.”

“뭐?”

“가주님께서 명하셨어요. 마님이 가실 곳은 브뤼노가가 아니라 룩스론 지방의 작은 별장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지?”

케일라는 아직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그녀의 사람인데, 어째서 저렇게 말하는 걸까?

“별장에 들어가면 가주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다시는 나오실 수 없답니다. 외부와의 연락은 철저히 차단될 거고, 감시인이 붙을 거예요.”

“그걸 왜?”

밀리가 이야기하고 있단 말인가.

“죄송해요, 케일라 님. 하지만 사실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그래서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맞은편에 앉은 밀리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어깨를 흔들었다. 충실하던 시녀는 지금 울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밖에서 달리고 있는 기사도 다른 이란 소리였다.

케일라는 그대로 커튼을 확 걷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곁에서 달리는 말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 타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기사가 아니었다.

“매튜!”

“깨셨습니까?”

첩자라고 생각해 온 매튜가 거기 있었다. 사실은 이중 첩자였던 건가? 아직 어린 것이 제법 연기를 잘해 냈다.

케일라가 기가 막혀 숨을 토하자, 매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더 주무십시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네, 무사할 겁니다. 케일라 님, 더 이상 케일라 님께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부당하게 취득한 재산은 대부분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매튜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특히 패트릭가의 재산은 다시 복구하여 레이나 님과 레온 님께 돌려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프레데릭가에서 받으신 것 또한 전부 회수할 겁니다.”

“말도 안 돼!”

“그래도 루카스 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어머니란 이유로 케일라 님을 살려 두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 남은 인생은 조용하게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럴 순 없어!”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케일라는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마차의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성이 마비된 채 빠져나갈 생각만 앞선 탓이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밀리가 몸을 던져 막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 뛰어내리면 죽어요!”

그제야 이성이 돌아왔다.

“이대로,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는가. 케일라는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 *

루카스는 멀어지는 마차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어머니인 케일라는 더 이상 가문의 일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미 장로들과도 협의한 사항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 루카스에게 접근한 레이나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루카스 님이 아니었더라면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이 재판을 위해 도움을 준 사람은 많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런 결과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지.’

루카스는 느지막이 나선 아델을 바라보았다. 신록을 닮은 눈동자가 그를 마주 보았다.

“아델.”

“그러고 보니 아델 님께도 인사 못 드렸네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나는 아델에게도 인사했다.

“아니에요, 그래도 이번 일이 잘 해결되어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두 여자는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레이나는 루카스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델을 마냥 미워할 수도 없었다. 동생인 레온에게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 줬는지 들었으니까.

‘내가 없는 동안 레온을 보살펴 줬어.’

그것만으로도 아델 또한 은인이었다. 둘의 인사가 끝나자, 루카스가 아델에게 물었다.

“아델, 잠시 이야기 가능할까?”

“여기서요?”

아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떠나지 않은 귀족들이 잔뜩인데, 하나같이 이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다른 곳에서 하지. 레이나 양.”

“네?”

“레이나 양은 마차를 타고 돌아가십시오. 레온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제가 마차를 타고 가면 루카스 님은요?”

“저는 괜찮습니다. 마차는 이쪽에도 있거든요.”

루카스는 아델을 바라보았다. 능글맞긴.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그럼 저는 먼저 돌아가 볼게요!”

사랑에 빠진 어린 아가씨는 당황하다가 다가온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이제 남은 이는 둘뿐이었다.

아델이 도미니크가의 마차에 올라타자, 루카스가 덩달아 올라탔다. 레이긴이 붙여 준 기사가 당황하긴 했으나, 그런 루카스를 말리진 않았다. 덕분에 아델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은혜를 모르진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한테 제법 잔소리를 듣겠는걸.’

아델은 불쌍한 기사들을 위해 짧게 기도했다. 너무 심하게 혼나지 않기를.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이번 일의 도움, 감사하다.”

아무래도 루카스도 배심원의 매수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비난받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사고방식이 유연하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다,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그러니까 루카스에게 미움받지 않는 게 왜 중요한데?’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 아델은 떠오른 생각을 한구석에 밀어 넣었다. 그래도 그 생각은 풍선처럼 자꾸자꾸 떠올랐다.

‘그를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좋아하는 사람과 마차에 단둘이 있는 상황이다.

‘새삼 부끄럽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지만 루카스의 눈치를 보아선 이어질 이야기는 로맨스 스토리가 아닌 것 같았다.

“아델.”

루카스는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아델은 그걸 보자마자 자신이 새로 접어 날려 보낸 쪽지라는 걸 깨달았다.

“이걸 알고 있나?”

잠시 망설였지만, 아델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럴 리가 있나.”

루카스가 종이를 손에 쥔 채 아델에게 몸을 기울였다.

“거짓말.”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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