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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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한쪽은 초조해하고, 한쪽은 웃는다. 그 상황에서 마지막 모래가 떨어지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루카스와 아델이었다.

‘아니, 잠깐!’

힘껏 달린 탓에 모자란 숨을 들이마시던 아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까지 달릴 필요는 없었잖아?’

루카스는 재판의 중요 인물이었지만, 아델은 단순한 참관객이었다. 같이 달릴 필요가 없었단 소리다.

‘이게 뭐람.’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루카스가 손을 잡아 잠시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델은 루카스가 앞으로 나서는 걸 보며, 뒷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하필 비어 있는 자리가 케일라 옆이다.

“용케도 무사했군.”

스치듯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케일라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야기하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이거겠지.

아델은 사근사근 웃으며 대답했다.

“루카스가 구해 주러 왔거든요.”

미안해요, 루카스. 잠시 존칭은 뺄게요. 아델은 오늘 목숨을 위협받은 터라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거기다 케일라가 시비를 걸어왔으니, 그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녀의 속을 긁어 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아델의 말을 들은 케일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아이는 책임감이 강할 뿐이야.”

“루카스 나이가 몇인데 아이래요? 슬슬 품에서 떠나보낼 나이 아니에요? 그도 그러고 싶은 모양인데.”

“네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

“과연 그럴까요?”

이 와중에 아델이 들고 온 부채를 살랑이며 비웃자 케일라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감히! 천박한 것이!”

뭐래? 진짜 천박한 게 누군데. 아델은 지지 않았다.

“그건 제가 할 말이죠. 저는 도미니크가의 후계자가 될 몸이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다니. 예의범절을 다시 배우셔야겠어요.”

만약에 재판정이 아니었으면, 케일라는 벌떡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재판이 준비되고 시작까지 가는 과정 내내 옆에서 연인처럼 루카스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아델은 실컷 케일라의 속을 긁어내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탕탕탕!

마침내, 커다란 나무 망치 소리와 함께 재판이 시작되었다.

기본적인 틀은 현재의 재판과 크게 다른 것 같진 않았다. 양쪽에서 대리인이 한 명씩 나서서 이야기를 하고, 가끔씩 증인을 세운다. 그 과정에서 귀족이 몇 마디씩 더하기도 한다.

가장 먼저 반박을 시작한 이는 로드린 백작가의 대리인이었다.

“로드린 백작가의 대리인 폴입니다. 저는 사실 오늘 이런 재판이 일어났다는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몇 년 전, 패트릭 공작가가 망했을 때 갈 곳 없이 헤매던 레이나 님을 누가 거둬 줬습니까?”

폴은 과장된 동작으로 백작 쪽을 돌아보았다.

“백작님이십니다! 먹여 주고, 재워 주며, 교육까지 시키신 자비로움. 심지어 미래를 위해 계획까지 세워 두신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프레데릭가에서 레이나 님을 데려간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능숙하게 이끌어 가는 이야기는 얼핏 들으면 타당해 보이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뇨.”

이번엔 프레데릭가의 대리인이 나섰다. 그의 이름은 롤린. 그는 사전에 받은 정보대로 말문을 열었다.

“레이나 님은 로드린 백작가에서 고통받으셨습니다. 백작가는 기본적인 교육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했으며, 수시로 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건 전부 레이나 님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서라면 매맞이를 두셨어야죠. 어째서 귀족 영애가 고통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시대는 변해 가고 있습니다. 매맞이를 두는 귀족가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중 아닙니까?”

“대체 줄어든다는 근거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롤린이 날카롭게 공격했다. 짐짓 자애로운 척하긴 했지만, 로드린 백작가의 아들과 손자까지 매맞이를 두고 있단 걸 알고 있었다. 귀족가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매맞이를 두지 않는 가문은 극소수일 뿐이었다.

“근거가 충분히 있으니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델은 이 부분에서 그래프나 통계 같은 게 나올까 조금 기대했다. 하지만 폴은 입으로만 떠들어 댈 뿐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이런 건 현대랑 다르네.’

그 사이에도 의견은 격렬하게 오고 갔다. 그리고 마침내, 롤린이 증인을 요청했다.

“로드린 백작가의 시녀, 유라입니다.”

유라는 양손을 꼭 잡고 벌벌 떨고 있었다. 아무리 프레데릭가에서 이후의 모든 걸 보상한다 하였더라도, 귀족 앞에서 증언하는 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유, 유라입니다.”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네, 네.”

“로드린 백작가에서 레이나 님은 편안하게 생활하셨습니까?”

롤린의 질문에 유라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니요.”

“그러면 어떻게 생활하셨는지,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네.”

유라는 그동안 레이나에게 있었던 불행을 이야기했다. 그 불행은 보통 귀족 영애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라, 여기저기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조용, 조용해 주십시오!”

재판장이 외쳤다. 이 일은 제법 충격적인 모양인지 그가 세 번이나 조용하라고 외치고 난 뒤에야 장내가 조용해졌다.

“이래도 할 말이 있으십니까?”

롤린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폴에게 물었다. 그러자 폴이 대답했다.

“저도 증인을 요청합니다.”

물론 재판장은 허락했다. 새로 들어온 증인은 단정한 옷을 차려입은 여인으로 제법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로드린가의 시녀장인 마야라고 합니다.”

마야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방금 전 증언한 유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라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워낙 욕심이 많은 아이라, 많은 대가를 받고 거짓을 말한 것 같습니다. 저희는 언제나 레이나 님을 최선을 다해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증언을 하다니요. 억울합니다.”

“들으셨습니까? 유라라는 시녀는 평소에도 거짓말을 일삼는 종류의 사람입니다. 필요하다면 또 다른 증인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증인 싸움이 되었다. 로드린 백작가는 유라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애썼고, 프레데릭가는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재판이 지지부진하게 길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프레데릭가에선 마지막 증인으로 레이나를 세웠다.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재판정에 울려 퍼졌다.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어린 영애를 동정하기 시작했고, 로드린 백작가는 서서히 밀렸다.

백작의 표정은 갈수록 험악해졌고, 폴은 이마에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모래시계, 모래시계가 문제였다.’

조금만 더 빨리 모래가 떨어졌으면, 그랬다면 루카스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리인만 남았을 테고, 압박하기 훨씬 좋았을 것이다. 원래 대리인들은 바로 뒤에 있는 귀족에게 의지하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군.’

백작은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유라를 거짓말쟁이로 모는 작전은 제법 괜찮았으나, 레이나까지 나설 줄은 몰랐다. 그가 아는 레이나는 소심하고, 조용하고, 겁이 많은 여자였으니까.

저렇게 앞에 나서서 제대로 이야기를 할 줄 몰랐다. 이미 대부분은 레이나의 이야기에 감화된 모양이었다. 배심원들도 그런 듯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아요.”

“그렇죠? 그녀의 말에는 독특한 울림이 있어요. 가슴을 건드리는 그런 울림 말이에요.”

소곤거리는 소리가 짜증 났지만, 그를 티 낼 순 없었다.

‘배심원을 더 매수했으면 좋았을걸.’

로드린 백작은 애초에 제대로 재판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증인을 조작하고, 루카스를 붙잡아 두었으며, 배심원을 매수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고작 두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존재할 리가. 틀림없이 프레데릭가가 먼저 손을 써 놓았을 것이다.’

정확히는 아델이 손을 썼다. 이 시대의 재판은 생각보다 야만적이었다. 정확한 증거나 자료를 내세워 승리를 얻어 내는 일도 있었지만, 이번과 같은 재판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아델도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돈과 권력으로.’

이 맛에 권력을 탐하는 모양이었다. 도미니크가는 표면상으로는 조용했지만, 뒤로는 내실을 다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델이 쓸 수 있는 금액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뿐이랴. 아버지의 인맥도 무시무시했다.

어디서나 존경받는 기사. 그게 레이긴이었기에 아델도 덩달아 존중받았다. 자연 과반수의 배심원을 매수하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루카스에게 언질을 주고 배심원을 매수하라고 할까도 싶었지만.

‘바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보면 배심원 매수는 비리에 가까운 일이기에 루카스가 반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느새 재판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배심원들은 프레데릭가의 손을 들어주었고, 재판장은 그 결과를 발표했다.

레이나는 안도한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곁에 있는 루카스는 재판이 진행될수록 기분이 나빠 보이더니, 이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언가 불쾌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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