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재판일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술렁였다. 프레데릭가와 로드린가 둘과 상관없는 귀족들도 재판을 구경하기 위해 자리를 구하려 들었다.
“아델 님도 가십니까?”
“네, 루카스 경이 와 주기를 원하더군요.”
사실 이리저리 걸리는 것이 많아 만남을 미루려 들었는데, 루카스가 그걸 눈치채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재판소는 상당히 외곽에 있군요.”
아델의 의문에 카이가 대답했다.
“정확히는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중심부에 있고, 하나는 외곽에 있는데 그쪽이 더 낡았죠. 하지만 전통성은 그쪽이 더 있기에 귀족들은 재판을 할 시 그쪽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잡하기도 하지. 그냥 한 군데 딱 정해 놓고 쓰면 편하지 않은가. 아델은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외출 준비를 하였다.
단정한 옷을 입고 양산을 들었다. 에스코트는 오늘도 카이의 담당이었다.
“엄마!”
론슈카가 따라오고 싶어 했지만, 오늘은 두고 가기로 했다. 재판에서 지저분한 꼴은 전부 보고 올 텐데, 그걸 자라나는 새싹에게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안 돼. 오늘은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자.”
론슈카는 금방 시무룩해졌지만, 얌전히 물러났다. 이제 그도 가끔은 물러서야 한다는 걸 배워 가는 것 같았다.
사두 마차에는 아델과 카이가 올랐다. 그리고 호위를 설 기사 몇 명과 시녀, 마부 하나가 일행의 전부였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마차는 저택이 위치한 수도 중앙을 지나 빠르게 나아갔다. 무수히 많던 건물은 외곽으로 향할수록 줄어들어 갔고, 어느새 주변은 고요해졌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말이 바닥을 박차는 소리와 바퀴 굴러가는 소리뿐이었다.
‘이상하게 조용하네.’
혹시 시간을 잘못 알았나, 싶은 아델은 카이에게 물었다.
“저희 지금 가는 게 맞는 거죠?”
“네, 맞습니다. 시간은 제대로 전달해 들었습니다.”
“누가 전달했나요?”
“프레데릭가에서 보낸 사람에게 전해 들은 뒤, 따로 확인 과정을 한 번 거쳤습니다.”
“혹시 그 시간이란 거 급박하게 수정할 수 있는 건가요?”
“가능이야 하지만 쉽진 않습니다.”
시간을 수정한 뒤에 다른 시간으로 알고 있던 귀족가 전부에 사람을 보내야 한다. 그러다 하나라도 빼먹으면 난리가 날 터였다.
“쉽진 않지만 해낸 모양이네요.”
아델은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지었다. 커다란 나무가 길 한복판을 가로막고 있었다.
‘너무나도 정석적인 방법.’
하지만 무력에 자신 있다면 그만큼 위협적인 방법도 없다.
“마차에서 내리지 마십시오.”
카이는 그 말만을 남기고 혼자 내려섰다.
새도 울지 않는 숲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었다.
마차에 부딪힌 화살은 난폭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애초에 안전을 위해 지어진 마차라 안쪽까지 파고든 화살은 없었다.
아델은 슬며시 창가에서 떨어져 중앙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어느덧, 밖에서는 싸우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차분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 쪽 수가 너무 많습니다!”
“아무래도 작정한 것 같군요.”
그걸 끝으로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운 건 금속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 목숨을 노릴 만한 사람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케일라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루카스와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것도 아닌데 지독하게 구는 걸 보니 속이 쓰리다.
‘이래서 계급제 사회는!’
투덜거리는 사이,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고민하던 아델은 그대로 바닥을 기어가 창문에 쳐진 커튼을 살짝 걷었다.
‘뭐가 저렇게 많아?’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런데 거기에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더 합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카이와 다른 기사들에게 미안해졌다.
아무것도 못 해 보고 끝나긴 싫은데. 아델은 양산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누구든 가장 먼저 안쪽으로 들어오는 이를 후려치고 도망갈 셈이었다. 제법 오래 울리던 금속 소리는 점점 잦아들어 갔다.
절로 두 손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감에 등이 뻣뻣해졌다.
“아델.”
이어 문이 열리는 순간, 아델은 손에 들고 있던 양산을 놓쳐 버렸다. 바로 앞에 있는 남자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까만 제복을 걸친 루카스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몸을 가까이 붙이자 피비린내가 확 풍겼다.
“다쳤어요?”
아델이 기겁하여 묻자 루카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 피가 아니다.”
그럼 다른 사람의 피란 소린데.
“될 수 있으면 밖을 보지 말도록. 볼만한 모습은 아니다.”
“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다른 이가 도우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루카스일 줄은 몰랐다. 지금 그는 재판정에 있어야 하는데!
“말을 하자면 긴데.”
“그래도 듣고 싶은데요?”
목숨을 위협당한 건 이쪽이란 말이다. 아델의 말에 루카스가 마차를 훑어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일단은 가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델은 루카스의 도움을 받아 마차를 갈아탔다. 그동안 루카스는 아델이 다른 쪽을 돌아보지 않게 하려 애썼다. 혹시라도 시체를 보고 충격받을까 봐 그러는 모양이었다.
마차의 주변에는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수가 아델이 데려온 기사보다 훨씬 많다. 적어도 기사단의 절반 이상은 데려온 듯싶었다.
“저쪽은 알겠지?”
루카스가 가장 가까이 붙어서 말을 몰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저희 약혼식에 오셨던 분이네요.”
“그래, 매튜가 최근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 첩자 노릇을 하고 있었지. 덕분에 이번 계획도 늦게나마 알게 된 거야.”
로드린 백작가는 레이나를 다시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리고 케일라는 아델을 죽이길 원했다. 그래서 둘은 합의하에 사건을 벌였다.
재판을 열어 레이나의 거처를 정한다. 그리고 아델에게만 다른 시간대를 알려 주는 것이다. 그건 대단히 수고스러운 일이었지만, 로드린 백작가는 무난하게 해냈다. 다른 귀족가의 도움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계획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루카스를 재판장에 묶어 둔 이후, 잘못된 시간에 오는 아델을 쓱싹할 계획이었다. 그 때문에 제법 유명한 용병도 고용한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 재판정에는 누가 있는 거예요?”
“나의 대리인이 시간을 끌고 있지.”
“그러다 레이나 양이 그쪽으로 넘어가면 어쩌려고요!”
“그렇게 두진 않아. 이쪽도 나름 준비는 많이 해 왔으니. 그보다 아델.”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아델의 손을 잡아 왔다. 그제야 아델은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괜찮아?”
차마 괜찮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델은 입만 몇 번 벙긋거리다 도로 다물었다.
떨리는 손을 잡아 오는 커다란 손이 너무나도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먼저 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조금 정도는 늦게 가도 괜찮아.”
“아니, 아니에요. 그냥 가세요.”
“아델.”
아델은 루카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그쪽 일이 급하잖아요.”
“하지만 아직 두렵지 않나. 몸이 떨리고 있어.”
“마차 진동 때문이거든요?”
“이 마차는 고급품이라 그렇게까지 몸이 떨릴 정도는 아니다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세요.”
왜 하필 이럴 때 심장은 떨리고 야단인지 모르겠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에 귓가가 시끄러웠다.
떨림은 잦아들었지만, 심장이 너무 날뛰어서 감당이 되질 않았다. 그런 아델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카스는 아델의 손을 놓지 않았다.
* * *
재판정. 백작은 비어 있는 루카스의 자리를 보며 히죽 웃었다.
‘계획이 틀어진 것 같은데?’
비어 있는 자릴 보니 루카스에게는 용건이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용건이란 건, 아델을 구하는 것이겠지.
대충 짐작은 했다. 케일라는 태어나면서부터 강한 권력을 가져서 그런지 섬세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원하는 건 뭐든) 이루어졌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손을 잡은 건 로드린 백작가의 이득을 위해서였다. 만약에 루카스가 아델을 해치려는 사건을 몰랐으면, 그가 직접 알려 줬으리라.
‘시간을 조금만 더 끌어라.’
재판 도중에는 밖에서 사람이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았다. 내내 태연하던 프레데릭가의 대리인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장은 다 떨어져 가는 모래시계를 보며 외쳤다.
‘이제 끝이다.’
백작은 한결 느긋해져 의자에 몸을 기댔다. 케일라는 큰일을 당하겠지만, 무슨 상관이랴. 정보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잘못이지.
‘그냥 레이나만 도로 데리고 가면 된다.’
패트릭가가 망하면서 그 재산은 갈기갈기 찢겨 사라졌지만, 아직 남은 것이 좀 있었다. 그것도 레이나를 손에 넣으면 전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백작은 입을 쭉 찢으며 웃었다.
모래시계의 모래는 이제 손톱만큼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