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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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끝났습니까?”

“끝나긴 뭐가 끝나요! 일단 보류예요, 보류.”

“그것도 나쁘진 않군요.”

“뭐가 나쁘지 않아요! 일부러 날 두고 간 거죠?”

아델의 말에 카이는 느른하게 웃어 보였다.

“됐어요. 이제 돌아가요.”

“아직 밤은 깁니다만.”

“지쳤어요.”

“그럼 당연히 모셔다드려야지요.”

카이는 벽에서 등을 떼고 팔을 내밀었다. 둘은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카이 경은 가문에는 관심이 없나요?”

아델은 그동안 고민하던 것을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녀가 오기 전에는 카이가 실질적인 도미니크가의 후계자였다. 그로서는 갑자기 나타난 여자 때문에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된 셈인데. 괜찮은 걸까?

“원래도 탐내던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스승님께서 마음이 편안해지시길 바랐던 거죠.”

그 말에 아델은 카이를 올려다보았다. 담담히 말하는 얼굴은 진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군요.”

이런 사람이기에 믿을 수 있다. 아델은 작게 웃었다.

* * *

오랜만에 치러진 프레데릭가의 파티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당장 로드린 백작가의 동향만 봐도 준비해야 하는 건 많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그쪽에 레이나를 뺏기지 않는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루카스는 문득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옴을 느꼈다. 그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을 향하니, 열린 창문으로 종이 새 하나가 날아들어 왔다.

위험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종이 새를 집어 들었다. 새의 꼬리 부근에 루카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차근차근 종이 새를 도로 풀어내니 그 안에는 괴발개발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로드린 백작가의 유라라는 시녀를 캐 봐요.」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날아들어 오는 과정은 신비했지만, 펼쳐 본 이상 이건 그저 종이에 불과했다. 이것만으로는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누가.”

루카스는 열린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딱히 수상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 * *

“엄마, 했어!”

방금 전까지 바람의 정령을 움직이던 론슈카가 신나는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해냈으니까 이제 내일 나랑 놀러 나갈 거지?”

“그래, 론슈카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아이에게 도움을 받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첫 편지는 카이의 도움을 받아 몇 군데를 거쳐 발송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금방 그걸 되짚어 오기 시작했고,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론슈카의 도움을 받았다. 정령의 흔적이 남지 않게끔 최대한 멀리서 밀어 넣은 종이 새는 수월하게 창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건 뭐야?”

“종이 새?”

“종이로 새도 접을 수 있었어?”

“물론이지. 론슈카도 가르쳐 줄까?”

“응!”

론슈카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아델은 저도 모르게 론슈카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론슈카도 아델을 마주 안았다.

“엄마, 좋아.”

“엄마도 론슈카를 사랑해.”

“그럼 나도 사랑해!”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헤헤 웃었다.

* * *

유라라는 시녀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그녀는 로드린 백작가의 시녀였고, 밖으로 나올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녀인 이상 언젠가는 하루라도 쉬는 날을 가지기 마련이다.

루카스는 그걸 노렸다. 그리고 기다리던 끝에 결국은 유라를 만났다.

모르는 사람에게 끌려온 유라는 처음에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걸, 레이나가 만나 보겠다고 나섰다.

“유라.”

“레이나 님!”

유라는 놀란 표정으로 레이나를 바라보다, 이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많이, 많이 좋아지셨네요.”

“전부 루카스 님 덕분이야.”

“아아, 다행입니다.”

유라라는 시녀는 유독 마음이 심약했던 듯했다. 그래서 레이나를 돌보던 중 그녀에게 정을 붙이고 말았다.

레이나가 도망치다 걸려서 연금되어 있을 때, 몰래 음식을 넣어 주던 것도 유라였다고 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고마워. 난 유라 덕분에 거기서 버틸 수 있었어.”

“아니에요, 아닙니다. 저는 한 게 없어요.”

유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 레이나 님이 꿋꿋하게 버틴 덕분입니다. 레이나 님은 강한 분이세요.”

“유라.”

이제는 레이나마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재회를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기에, 루카스가 끼어들었다.

“유라, 혹시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는가?”

“무슨 도움이요?”

유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까지 레이나가 겪었던 일들에 대한 증언이 필요하다.”

“증언, 증언이요.”

내내 웃던 유라의 얼굴에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제가 어찌 그런 걸 하겠어요.”

유라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돌렸다.

“저는 못 해요.”

“유라, 난 유라를 믿고 있어. 유라는 강한 사람이야.”

“그냥 부탁하는 건 아니다. 이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주고, 보상을 주지. 다음 대까지 먹고살 수 있는 돈을 주겠다.”

루카스의 말에 유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그래도.”

유라는 로드린 백작가가 무서웠다. 레이나를 곁에서 돌보며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보았기에 더 그러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못 한다고 하고, 여길 벗어나는 게 최선임을 안다.

‘그걸 아는데도.’

유라는 선뜻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혹시라도 이미 자신이 여기 잡혀 온 걸 로드린 백작가에서 눈치챘으면 어쩌나. 그렇다면 돌아가도 평탄한 인생을 즐기기는 어렵다.

레이나가 불쌍하기도 했다. 고귀한 가문의 아가씨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다 한 걸 아니까. 유라는 서서히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이건 좋은 일이니까.’

잘만 되면 레이나도 행복해지고, 자신도 평화로워질 수 있다. 다음 대까지 먹고살 수 있는 재물, 사실 그것도 좀 탐났다. 그 정도면 대체 액수가 어느 정도 되려나.

그렇게 약간의 정, 공포, 재물로 인해 유라는 마음을 바꾸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유라, 고마워!”

“아니에요, 그동안 계속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 기회에 털어 낼 수 있다면 좋겠지요.”

유라는 레이나에게 웃어 주었다. 그렇게 재판에서 유리한 증인을 한 명 손에 넣었다. 모든 것이 종이 새에 적혀 있던 그대로였다.

* * *

밤이 되자 외출했던 로드린 백작가의 시녀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음?”

“왜 그러세요, 시녀장님?”

“유라가 오지 않았는데.”

“이미 도착해서 방에 있을지도 몰라요. 원래 외출이 길지 않은 아이잖아요. 제가 한번 보고 올게요.”

유라와 같은 방을 쓰는 시녀는 방으로 돌아가 유라를 찾았다. 짐도 돈을 모아 둔 상자도 모두 그대로 있었지만, 외출복 하나가 없었다.

아직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았단 소리였다.

“유라, 방에 없니?”

“네, 없네요. 오늘은 조금 늦게 들어오려나 봐요.”

“이럼 곤란한데.”

시녀장이 혀를 찼다. 최근 로드린 백작가는 사용인의 통제가 심해졌다. 그 때문에 오늘도 오랜만에 외출을 허용해 준 것인데 나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니. 불안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한 명이라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보고하라 하셨는데.”

망설이던 시녀장은 그걸 위쪽에다가 보고했다. 그리고 돌아온 건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시녀가 하나 돌아오지 않았다고?”

“네.”

“이름이 뭐지?”

“유라입니다.”

“유라, 유라. 그래, 기억나는군. 레이나를 돌보던 시녀 중 하나였지.”

“네, 맞습니다.”

백작은 사나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 시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미 늑대에게 물려 간 모양이군. 이래서 풀어 줘서는 안 됐는데.”

하도 사용인들이 답답해한다고 하여 아량을 베풀어 하루 여유를 주었건만, 괜한 시도였던 것 같았다.

백작은 기사와 시종 몇을 추려 밖으로 내보냈다.

“찾아라. 될 수 있으면 살려서 데려오면 좋겠지만, 그게 힘들다면 죽여도 좋다. 상황에 따라 알아서 판단해라.”

“네!”

이후 그들은 흩어져 유라의 흔적을 추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하고 나갔던 후드를 찾아내긴 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찾지 못했다.

“귀찮게 되었군.”

바로 오늘 재판을 접수했다. 레이나를 도로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그랬는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너무 방심한 모양이었다.

“케일라 님이 아시면 또 화를 내시겠는걸.”

백작은 혀를 찼다. 케일라, 그 독한 여자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여자였다. 실제로 저지르기도 했고 말이다.

이번에 레이나를 이용해서 루카스를 압박하자는 소리도 그녀가 내놓은 의견이었다.

“루카스도 슬슬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되었지요.”

아들한테까지 그러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노리는 게 그것만은 아닐 텐데.”

레이나를 이용해서 루카스를 압박? 말이야 그럴싸하지만, 상대는 잘나가는 공작가다. 심지어 케일라도 그곳에 소속되어 있다. 압박해 봤자 무슨 이득이 있을까.

뭔가 다른 걸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간 케일라의 성정을 생각해 본다면 짐작 가는 건 있었다.

아델 드 도미니크의 살해. 한쪽에서 크게 사고를 일으키고 시선이 몰린 틈을 타서 그녀를 살해하려 함이 틀림없었다.

“뭐, 평민의 피가 꺼림칙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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