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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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

새벽이 되었다. 레이나는 밤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오늘은 그녀가 로드린 백작가에서 풀려나고 난 뒤, 첫 파티를 맞이하는 날이었다.

‘루카스 님은 배려심도 많으셔.’

레이나는 배시시 웃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두긴 했지만, 설레서 더 자지는 못할 것 같았다.

‘혹시나 나를 에스코트해 주실까.’

아직 에스코트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충분히 기대할 만했다.

“즐거워 보여, 누나.”

레이나가 기분이 좋으니 레온도 그런 모양이었다. 요즘 들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가 싶었다.

“오랜만의 파티니까.”

“패트릭가의 파티면 더 좋았을 텐데.”

레온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지만, 레이나는 지금으로도 만족했다. 평생 로드린 백작가의 방에 갇혀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때도 있었으니까.

동생인 레온과 식사를 마치고 그 뒤부터는 이른 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프레데릭가는 그 명성에 걸맞게 시녀가 많았고, 그녀들은 전문가였다. 아직 다소 마른 레이나를 치장하고 가려 평범해 보이게 만들었다.

드레스는 분홍색으로 골랐다. 얇은 원단이 여러 겹 겹쳐 마치 꽃잎 같아 보였다. 전부 꾸미고 나니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조금은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아.’

레이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어느덧 파티의 시간이 가까워져 갔다. 누가 자신을 에스코트하게 될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들어온 이는 덩치가 큰 기사 같은 남자였다.

“매튜라고 합니다. 프레데릭가 철갑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레이나 님의 에스코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루카스가 아니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시무룩해져 있다가 얼른 표정을 고쳤다. 그래도 도와주러 온 이에게 이런 표정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다.

루카스도 뭔가 생각이 있으니 이 사람을 보낸 것 아니겠는가.

“패트릭가의 레이나라고 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색한 대화가 끝나고 레이나는 매튜가 내민 팔을 잡았다. 곧 파티가 시작된다.

* * *

마음 같아서는 빠지고 싶었지만, 상대가 무려 프레데릭가다. 이제 제국에서는 둘만 존재하는 공작가란 소리였다. 그런 이유로 아델은 파티에 참여했다.

에스코트는 당연히 카이가 해 주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은 레이나와 루카스의 이야기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 간간이 아델의 이름도 들려온다.

‘아주 신나는 소재겠지.’

아델은 한숨을 푹 쉬며 부채를 흔들었다. 그렇게 카이와 멍하니 서 있는데, 누군가가 가까이 접근했다. 헤이른이었다. 저번에 뺨을 맞은 이후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방심했는데.

‘하긴 그도 귀족이니 참석하는 건 당연한가.’

아델은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헤이른은 집요했다. 어떻게든 아델의 눈에 들고 싶은 모양인지 고개를 돌리는 방향마다 몸을 움직이고 있다.

“뭐 하는 건가요?”

결국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아델이었다.

“이제야 날 보는군.”

“그렇게 돌아다니면 안 볼 수가 없거든요?”

그 말에 헤이른이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답했다.

“그러니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뭐라 말해도 제 마음은 바뀌지 않으니 저리 가세요.”

“내 마음도 그러한데.”

이 사람이 뭐라는 거야? 아델은 부채를 위협적으로 흔들었다.

“그나저나 오늘 첫 춤 상대는 있나? 없다면 나는 어떤가?”

“옆에 있는 제 파트너가 보이지 않으신 건가요?”

“데려올 사람이 없어 데려온 것 아닌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세간의 소문대로 그와 결혼이라도 할 셈인가?”

이야기가 왜 그렇게 가는 거야? 아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헤이른을 바라보았다.

“제가 인제 와서 누구와 결혼하건, 그건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상관있다만.”

“착각이겠지요.”

둘이 실랑이를 하는 사이, 레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나 드 패트릭 님과 매튜 경 드십니다.”

레온의 누나답게 뛰어난 미모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쪽으로 몰렸다.

“의외군.”

정말 의외였다. 아델은 당연히 레이나의 에스코트를 루카스가 할 줄 알았다. 그게 지금 상황에서는 더 유리하니까.

그런데 막상 모습을 드러낸 레이나의 옆에 서 있는 건 예전에 잠시 모습을 본 적 있던 기사 매튜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루카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그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습을 드러낸 루카스의 모습에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그는 더없이 멀쩡해 보였으니까.

아니, 멀쩡하다 못해 튼튼해 보였다. 루카스는 레이나를 이끌고 여기저기에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그 절차를 어느 정도 끝마치고 나자 가신에게 그 역할을 넘겼다. 그러더니 아델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도망쳐야 하나?’

아델은 조금 당황했다. 한동안 소 닭 보듯 한 사람이 누구였는데. 고민하는 사이에도 루카스는 가까워졌고, 마침내 아델의 앞에 도달했다.

그 때문일까. 레이나에게 집중되던 시선이 이쪽으로 돌려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반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슬쩍 들렀다가 몰래 떠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첫 춤 상대는 선택했나?”

예전 그대로의 말투로 루카스는 물어 왔다. 존중하는 의미의 존대도 좋았지만, 그래도 이게 마음은 더 편했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마음이 들었기에.

아델은 잠시 망설이다가 카이를 바라보았다. 파트너가 있는데 첫 춤을 다른 사람과 추는 건 매너가 아니었다.

“첫 춤 상대는 있어요.”

“그렇습니다. 저와 함께 춤을 추실 겁니다.”

카이는 아델의 말에 맞춰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 춤이라도.”

“그건 내 자리다만.”

거기에 헤이른이 끼어들었다.

“헛소리가 참신하게 늘었군.”

루카스가 헤이른에게 말했다. 둘은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사이 카이는 태연하게 아델을 에스코트하며 홀 중앙으로 나아갔다.

“저대로 둬도 되나요?”

“안 될 것 있겠습니까?”

카이는 그리 말하며 아델과 떨어져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와 춤을 춰 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아델은 작은 한숨을 삼키며 카이의 손을 맞잡았다.

“카이, 일부러 그러는 거죠?”

그 말에 카이가 작게 웃었다.

“괘씸하지 않습니까?”

“네?”

“상황을 보고 재는 모습들이요. 그래서 조금 등을 떠밀어 보기로 했습니다.”

조금이 아닌데. 아델은 저도 모르게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가 아델 님에게 어찌 마음이 없다고 확신하십니까?”

이건 또 의외의 이야기다.

“저들에 비해선 제가 훨씬 낫지 않습니까?”

평소 기사답게 굳어 있던 표정이 풀어지니 제법 장난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에 아델은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했다.

첫 춤이 끝나고 다음은 루카스가 먼저 다가왔다. 헤이른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버티고 서 있는 걸 보니, 뭔가 이야기 중에 밀린 모양이었다.

“레이디, 저와 춤을 추시지 않겠습니까?”

괜스레 심술이 돋아났다. 아델은 옆에 서 있는 카이의 팔에 손을 얹었다.

“두 번째 춤도 이분과 출 거예요.”

루카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아델.”

“왜요?”

아델이 당당하게 대답하자 루카스의 가슴이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그러면 또 그다음을 기다리지.”

“그다음도 카이 경과 춘다면요?”

“그래도 기다리지.”

“좋아요. 그렇다면 기회를 드리죠.”

루카스는 정말로 자신이 말한 대로 아델을 기다렸다. 몰려드는 여성들을 뿌리친 채 말이다. 그리고 네 번째 춤에서 아델을 쟁취해 냈다.

“이제야 간신히 얼굴을 제대로 보는 군.”

“그건 제가 할 말이네요.”

간만에 루카스의 단단한 팔뚝에 손을 얹으니 기분이 묘하다. 그뿐인가. 그의 다른 손은 아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

“뭔데요?”

“이 춤이 끝나고 나서 이야기하지.”

그렇게 말하니 제법 흥미가 돋는다. 춤이 끝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루카스는 아델과 떨어져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난데없는 행동에 놀라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아델, 나와 다시 한번 약혼해 주지 않겠나?”

그걸 이런 자리에서 말하세요? 세상에! 아델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 있을 카이를 눈으로 찾았다. 그러나 하필 이럴 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아, 이 바보 멍청이 같은 남자가!’

이런 날에 청혼이라니. 게다가 사람들이 전부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지금 이런 말을 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작게 속삭여 보았지만, 루카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 더는 상황을 따지지 않기로 했다.”

“따져야죠!”

“그랬다가 다른 사람에게 뺏길 것 같았다.”

카이랑 자신은 그런 사이가 아닌데! 아델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한다?’

이 자리에서 약혼을 받아들이기도, 받아들이지 않기도 애매했다.

‘노리고 한 거 아냐?’

괜히 루카스가 얄미워졌다.

“아델, 대답을.”

“일단 보류하도록 하죠.”

“언제까지?”

“제 마음이 내킬 때까지요.”

“약혼 신청을 보류하는 사람은 처음이군.”

“그래서, 싫어요?”

“아니, 거절보다는 낫지.”

루카스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헤이른이 이쪽으로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헤이른까지 얽히는 건 질색이라, 다시 카이를 찾아보았다. 이번에는 다행히 저편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카이를 찾았다.

아델은 종종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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