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답은 알고 있지 않나.’
그래, 루카스는 답을 알고 있었다. 어떤 방법이 가장 효율적으로 레이나와 레온을 지킬 수 있는 일인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아델에게 오해받고 싶지 않으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모든 일이 해결되면 다시 아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 펜이 종이를 긁는 사각거리는 소리, 미지근한 홍차 한 잔, 그 속에서 아델과 같이 일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당연히 앞으로도 계속 그런 날이 지속될 줄 알았다. 행복에 잠겨 있었기에 그걸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말이다.
‘움직여야 한다.’
로드린 백작가보다 선수 쳐서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그걸 사람들이 상상하는 방식으로 이루긴 싫었다.
‘상대도 내키지 않을 테고.’
나이 차이가 몇이던가. 루카스는 피식 웃으며 생각을 지웠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약혼하는 건 아델이면 되었다. 다른 여자까지 그렇게 하긴 싫었다.
‘그러니 방법을 찾는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 말이다. 그러자면 일단 로드린 백작가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만행을 파헤쳐야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교계를 떠나 있던 루카스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사교계에는 실체 없는 소문도 빠르게 퍼진다는 것 말이다. 이미 세간에서는 루카스와 레이나에 대한 소문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루카스가 알게 된 건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였다.
* * *
“루카스 님!”
마들렌이 불안한 표정으로 다가와 루카스에게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요?”
“뭘 말하는 거지?”
“아니, 저는 아닌 걸 알고 있습니다만. 아래 아이들이 몰래몰래 떠드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아래 아이들이라면 시녀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이리 다급히 달려온 걸까. 루카스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려다가 이어지는 말에 멈칫했다.
“레이나 님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시죠?”
“그게 무슨 말이지?”
“사교계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해요.”
가끔은 시녀들이 주인보다 소문에 빠를 때가 있었다. 다른 가문의 시녀와 교류를 하는 경우였다. 마들렌은 루카스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글쎄, 루카스 님이 레이나 님이랑 약혼하게 될지도 모른단 소문이요.”
“대체 왜?”
루카스도 기겁할 이야기였다.
“얼마 전에 옷을 사 주셨잖아요.”
“입을 옷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는 레온도 있었어.”
“몇 번인가 밖에 같이 다니셨잖아요.”
“로드린 백작가가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미끼 역할을 한 거지. 역시 레온도 같이 있었다.”
누나와 떨어지는 걸 두려워하는 아이였으니까.
“그걸 누가 보고 소문을 퍼트렸나 봐요.”
대체 어떻게 소문을 퍼트리면 약혼까지 이야기가 흘러간단 말인가. 루카스는 기가 찬다는 듯이 혀를 차다가 곧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소문이 많이 퍼졌나?”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에요.”
마들렌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루카스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문을 나섰다.
“말을 준비해.”
“어디 가시게요?”
마들렌이 종종걸음으로 따라가 물었다.
“도미니크 후작가.”
“네? 지금 차림새로요?”
“내 차림새가 어때서.”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흐트러지고 땀에 젖은 셔츠에 바지만 걸치고 있었다. 당사자가 워낙 외모가 뛰어나니 그도 보기엔 좋았으나, 적어도 다른 귀족가를 방문할 만한 옷차림은 아니었다.
“그 차림새로 후작가에 가시는 건 아니죠!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세요!”
마들렌의 말에 루카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촉박한데 왜 방해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원래 저런 분이 아니었는데.’
딱 한 사람과 관련되어서는 표정이 풍부해지셨다.
“그리고 가서 뭘 어쩌시려고요.”
“아니라고 말해야지.”
“위험할지도 모르니 당분간 멀리하겠다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야.”
루카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자신이 그랬다. 하지만 이런 오해를 받은 채 버틸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아델의 곁에는 그녀를 노리는 늑대 같은 남자들이 여럿 있는데.
아델이 이 소문 때문에 혹시라도 다른 사람을 선택한다면, 가만있을 자신이 없었다. 아마 검을 들고 결투라도 신청하려 들지도 몰랐다.
‘아니, 잠깐.’
루카스는 곧 자신의 생각의 문제점을 찾아냈다. 이 모든 건 아델이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는 전제하의 일이었다.
절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맙소사.’
더 우선되어야 하는 일을 잊고 있었다. 아델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미래에 대한 약속을 받아 내야 했다.
‘다행인가.’
마들렌이 말려 주지 않았으면 이대로 후작가에 쳐들어가서 아델만 곤란하게 만들 뻔했다. 일단은 씻은 뒤 정신부터 차려야 할 것 같았다.
* * *
레이긴은 분노로 펄펄 날뛰고 있었다.
“감히 그놈이!”
루카스가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델이 기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둘은 파혼했으니,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만 레이긴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델이 루카스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말이다.
더불어 루카스도 아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괜찮은 기사라 생각했는데, 틀린 생각이었다. 이리 문란한 인간이었을 줄이야!”
“스승님, 아직 소문일 뿐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사교계에서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는 걸 말입니다.”
“무슨 소리냐! 다 그놈이 헤프게 굴어서 이런 일이 생긴 거다!”
레이긴의 머릿속에서 루카스는 이미 헤이른과 함께 폐급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아델을 위해서라도 네가 나서야겠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깟 놈이 없어도 아델은 평화롭게 산다는 걸 보여 줘야지! 그러니 카이야.”
“네, 스승님.”
“아델과 만나 보면 어떻겠느냐.”
잠시 심호흡을 한 레이긴이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아델 님이 원하지 않으실 텐데요.”
“그럼 사귀는 척이라도 해! 그놈 속을 긁어 놓으란 말이다!”
“아델 님이 동의하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냥 태도만 조금 달리하면 될걸. 이 요령 없는 것.”
“그래서 제자가 좋은 것 아니셨습니까?”
카이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도 그렇지만.”
레이긴은 꿍해서 중얼거렸다. 그나마 아델의 상대로 가장 마음에 드는 게 카이인데, 정작 그는 배려를 한다고 필요 이상 접근하지 않는다.
“대체 네 마음은 어떤 거냐?”
“무슨 마음 말입니까?”
“아델에 대한 마음 말이다.”
“으음.”
카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는 아델을 싫어하지 않았다. 외려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아델은 그저 여리기만 하지 않고 제법 능력이 있으며, 독한 면도 있다.
‘가끔 웃는 얼굴도 나쁘지 않고.’
적어도 지금까지 만나 본 영애 중에서는 가장 나은 것 같았다. 그런데 결혼까지 하고 싶은 거냐고 묻는다면, 아직 모르겠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제법 발전한 거구나. 어릴 때는 감정도 제대로 표현 못 하더니.”
“스승님 덕분이죠.”
정말 레이긴 덕분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비참하게 버려진 평민 고아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으리라. 그러니 카이는 말과는 다르게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이라도.’
그런 이유로 카이는 당분간 아델과 좀 더 붙어 다니기로 했다. 루카스보다야 못했지만, 카이도 제법 훈훈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거기에 기사로서 훈련을 받았기에 키도 크고 잔근육도 잘 잡혀 있었다.
신분 문제 빼고는 제법 인기 있을 만한 사람이란 소리였다.
‘큰 변화는 필요 없다.’
조금만 태도를 달리하면 된다. 그래서 아델의 뒤에서 걷던 걸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만날 뒤에서 걷더니 이제야 옆에서 걷네요.”
그 모습에 아델이 웃으며 말했다.
“아델 님이 좀 더 편해졌나 봅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티타임이나 파티에 갈 때는 언제나처럼 카이가 에스코트했다. 그리고 때로는 아델과 함께 춤추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쪽 일도 서서히 소문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둘이 결혼하는 걸까요?”
“레이긴 경의 입장에선 둘이 결혼하는 게 가장 좋긴 하겠죠. 하나는 아끼는 제자고, 다른 한 명은 간신히 되찾은 딸이잖아요? 게다가 힘든 일이 있기도 했잖아요.”
“그렇죠? 그럼 헤이른 경과 루카스 경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한쪽은 파혼했고, 다른 쪽은 미움 받는데 어떻게 되겠어요? 보나 마나 뻔하죠.”
이어 그 소문은 헤이른과 루카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새로운 남자라고.”
헤이른은 느른한 표정으로 웃었으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방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그냥 기사 노릇만 하면 좋았을 것을.”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턱을 쓸었다. 최근 아델이 가는 파티에는 전부 참여하고 있었지만, 카이의 견제로 접근하지 못해 부아가 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소문이 번지니 가만있을 수가 있나.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겠군.”
루카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건 안 돼.”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더라도, 루카스에겐 끔찍한 일이었다.
“뭘 그리 겁내세요?”
그런 루카스에게 마들렌이 물었다.
“아델을 다치게 할까 봐.”
“그럼 루카스 님이 지켜 주시면 되잖아요.”
“내 손은 하나다만.”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 하나 못 지키신다고요?”
마들렌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루카스의 마음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