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스승인 루카스를 찬양하는 레온의 모습은 제법 귀여웠다. 아델이 루카스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루카스는 도미니크가의 파티가 끝난 후로 아델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럴 거면 파티에는 왜 왔어?’
단순히 헤이른을 견제하기 위해 찾아온 걸까. 하지만 이제 아델은 예전의 아무것도 없던 그녀가 아니었다. 손에 쥔 것도 많아졌고, 권력이란 게 생겼다.
예전과는 달리 헤이른이 접근해도 방어할 수단이 많아졌단 소리였다. 그러니 루카스가 굳이 찾아와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었다.
‘이런 배려라면 더는 필요 없는데.’
아델은 답답한 가슴을 손으로 문질렀다.
“프레데릭가에는 내가 연락을 넣어 둘 테니 편히 쉬렴.”
“네!”
레온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후 아델은 둘이서 더 이야기하라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말이 얼마나 많을까.
집사를 시켜 프레데릭가에 사람을 보내게 한 아델은 집무실로 돌아갔다. 물론 카이도 그 뒤를 따랐다. 레온이 레이나와 할 이야기가 있듯이, 아델도 카이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었다.
“일이 복잡해졌군요.”
“조금은요.”
아델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론슈카로 인해 일이 커졌지만, 덕분에 레이나를 구할 수 있었다. 엄마를 믿고 친구를 도운 아이에게는 뭐라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내가 모든 걸 수습해야지.’
아버지인 레이긴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도움만 받으면 성장하지 못할 테니까.
“일단은 로드린 백작이 어떻게 나오나 살펴봐야겠어요.”
굳이 먼저 나서서 찔러보기보단 이후 행동에 따라 대응할 생각이었다. 그때, 집사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로드린 백작가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잠시 기다리게 하세요.”
“그러겠습니다.”
집사가 물러나자 아델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쪽이 급한 일은 아니니 상대방이 초조해질 때까지 시간을 끌 셈이었다.
“카이 경, 레온과 레이나에게 기사 몇을 붙여 주세요. 혹시 모르니까요.”
“네, 유능한 기사로 붙여 두겠습니다.”
“감사해요.”
“당연한 일로 감사를 표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요.”
카이가 없었으면 일이 얼마나 더 힘들어졌을지 생각하면, 그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비록 아버지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델이 아무리 둔하다 쳐도 어느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카이와 결혼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카이는 아버지에게 소중한 제자였고, 그 점을 빼더라도 조건이 좋은 남자였다. 평민이라는 게 흠이긴 했지만, 아델은 그런 걸 따지지 않으니까 상관없었다.
문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참으로 섬세하고 복잡해서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카이 경도 앉아서 쉬세요.”
“괜찮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서 있었잖아요. 제가 괜찮지 않아요. 좀 더 시간을 보낼 생각이니 쉬세요.”
“그럼 잠시 앉겠습니다.”
카이가 집무실의 소파에 앉는 걸 보며 아델은 눈을 감았다.
* * *
로드린 백작이 보낸 이의 이름은 에드. 백작가의 가신으로 단승 작위를 가지고 있는 이였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더, 더 위로 올라가야만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이번 일을 반드시 잘 해결하여 로드린 백작의 눈에 들고자 했다.
‘그나저나 언제쯤 오는 거지?’
길들이기를 할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늦게 온다. 슬슬 부아가 치밀었지만, 에드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지루해질 무렵, 아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레이긴의 딸.
그전에는 루카스의 약혼자였기에 소문이 무성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첫인상은 대단한 소문의 소유자치고 평범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저 예쁘장한 여자가 아닌가!’
에드는 어쩌면 일이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원래 로드린 백작의 생각은 이러했다.
레이나를 도망치게 하고 그녀의 동생에게 그 모습을 목격하게 한다. 당연히 동생은 누나를 구하려 할 테고, 그 문제를 빌미로 삼아 프레데릭가와 도미니크가를 압박할 셈이었다.
그 때문에 레온과 론슈카를 초대한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잘해야 한다.’
에드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을 꺼냈다.
“이번에 저희 저택에 머무르던 레이나 님이 신세 지고 있다고 하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델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에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감이 더 샘솟았다.
“가끔은 외부로 놀러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으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은 듯합니다. 가문의 일을 밖에서 말하기는 부끄럽습니다만, 레이나 님은 얼마 전에 잘못을 저질러 외출 금지의 벌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래서요?”
“레이나 님을 다시 모셔 가려 합니다.”
“그러니까.”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아델이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레이나 양이 그쪽 가문 사람이라는 거죠?”
“물론입니다.”
“내가 알기론 그분은 패트릭가의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패트릭 가문에 큰일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후로 로드린 백작님께서 그분을 보호하고 계셨습니다.”
“그 보호에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들어가나요.”
“원하지 않는다니요.”
에드는 살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레이나 님도 로드린 백작님의 차남이신 리드 님을 사랑합니다. 그저 그걸 표현하기 부끄러워하실 뿐이지요. 그분을 뵙게 해 주신다면 그를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흐음.”
어쩐지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느낌이다.
‘평민으로 자라 온 탓인가.’
이러면 아델보다는 그 뒤에 서 있는 카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낫지 않을까? 적어도 그는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드가 카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는데 아델의 입에서 파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신박한 개소리네요.”
“네?”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 에드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신박한 개소리라고 했어요. 이해가 안 된다면 다시 들려드릴까요?”
“너, 너무 무례하십니다!”
“무례하기는 그쪽이 무례했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끄러우니 소리 높이지 마세요.”
그 말에 카이가 검을 차고 있던 허리춤을 매만졌다. 한때 기사로 유명했던 레이긴의 제자다. 그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에드는 어깨를 움츠렸다.
“레이나 양을 불러 보라 하였죠?”
“그, 그랬습니다.”
“좋아요. 불러 보죠. 그쪽의 이야기도 들어 보는 게 낫겠죠.”
아델이 손뼉을 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앞으로 나섰다.
“레이나 양을 접대실로 모셔 와.”
“네.”
시녀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이곤 밖으로 나갔다. 가슴이 뛰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 당당하게 레이나를 부른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레이나가 어떤 사람인지는 에드도 잘 알고 있었다. 계속 도망치려 하긴 했지만, 그건 관성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약해진 여성에 불과했다. 백작의 명을 받은 에드가 그녀를 통제하는 동안 큰 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한 게 그 증거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나가 도착했다. 잠깐 사이에 안색이 제법 좋아 보였다. 그 옆에는 작은 꼬맹이가 하나 붙어 있었는데, 에드는 그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설마 패트릭가에 생존자가 더 있었을 줄이야.’
당시 한 명을 놓친 건 알고 있었지만, 찾지 못했다 들었다.
“아마 죽었겠지.”
로드린 백작은 그렇게 말했었다. 상처 입은 작은 아이가 살아 나가기에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인제 와서 루카스의 제자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덕분에 귀찮게 되었다.
‘슬슬 작업을 쳐 볼까.’
에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레이나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나 님.”
그러자 가만히 서 있던 레이나가 흠칫 몸을 떨었다. 더불어 옆에 서 있던 레온의 시선이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저 에드입니다. 레이나 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인제 그만 돌아가셔야죠. 외출 금지인데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과연 레이나는 뭐라고 답할까? 로드린 백작은 레이나가 되돌아오길 거절하면 손수 빌미를 만들어 줄 것이라 하였다.
‘내 생각은 다르지만.’
그동안 내내 눌려 있던 사람이다. 길든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떻게 반항을 한단 말인가.
“레이나 님.”
에드는 압박하듯 레이나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그러자 내내 굳어 있던 레이나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저는…….”
‘그럼 그렇지. 아쉽게도 이번 백작님의 계획은 틀…….’
“저는 돌아가지 않아요.”
레이나는 몸을 덜덜 떨면서도 끝까지 말을 마쳤다.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이거 의외다. 에드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잘 길들인 동물이 손을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하하, 레이나 님? 그동안 함께한 날을 잊으신 겁니까?”
레이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떻게, 그날을 전부 잊겠어요.”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으시겠다고요?”
“그러니까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제법 당차게 소리까지 친다.
‘역시 백작님.’
그에 따라 에드는 생각을 바꾸었다. 로드린 백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