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4 (94/132)

#094

지친 듯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작게 들리는 소리에도 흠칫거리던 여성이 멈춰 선 곳은 저택의 담이었다.

다른 저택에 비해 유독 높고 두꺼운 담. 그 앞에서 망설이다가 이내 손을 뻗어 본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애처로워 보였다.

발뒤꿈치를 세우고 몸을 길게 펴 보지만 담을 넘기엔 모자라다. 여성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밟고 올라설 것을 찾는 듯했다.

그때, 초조하게 움직이던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미처 피하지 못했던 레온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선명한 파란색의 눈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ⵈ누나?”

눈을 깜박여 보아도 보이는 건 변하지 않았다. 저 멀리 서 있는 사람은 레온의 하나뿐인 누나, 레이나였다.

레이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레온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서서히 다가왔다. 그때, 뒤에서 나타난 기사 하나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레이나 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놔요, 놔!”

레이나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제대로 단련된 기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레온은 그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누나!”

레온은 레이나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구하고자 달려갔다.

여기가 어디란 것도, 이 모든 게 함정일 수 있다는 것도 잊었다. 바로 앞에 누나가 있는데, 어찌 발길을 되돌릴 수 있을까. 레온은 그럴 수 없었다.

레온은 이를 악물고 기사를 걷어찼다. 하지만 그는 잠시 멈칫하기만 할 뿐 레이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누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거냐!”

레온이 외치자 기사의 눈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제법 매섭게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그가 보기에 레온은 아직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다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건 옷차림 때문이었다.

“알렝 님의 손님이십니까?”

“말을 돌리지 마!”

“손님은 이쪽으로 오시면 안 됩니다. 길을 안내해 드릴 테니 돌아가시지요.”

기사는 레이나한테 대하던 것과 다르게 제법 정중하게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 만난 누나인데!

레온은 허리춤을 뒤져 작은 페이퍼 나이프를 꺼냈다. 오늘 모임은 아이들만 모이는 거라 위험한 물건을 들고 올 수 없었다. 그렇기에 검 대신 감추기 쉬운 페이퍼 나이프를 들고 온 것이었다.

그를 본 기사가 코웃음 쳤다.

“누나를 놔줘.”

“자꾸 누나라고 하시는데, 이분이 누군지는 알고 계십니까?”

모를 리가 있나. 비록 마르고 작아졌지만, 예전에 알던 누나가 맞았다.

“알아.”

“안다고요?”

기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아니, 몰라요! 모르는 아이예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누나는 레온을 부정했다.

“이쪽에선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느물거리며 웃은 기사는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누군지 알겠군요, 레온 님.”

“아냐, 몰라요. 모른다고요!”

레이나는 기사의 팔에 매달리며 외쳤다.

“도망쳐!”

예전에는 누나를 두고 도망쳤었다.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온은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기사가 레이나를 떼어 내고 레온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검을 쓰는 법이라면 스승님에게 배웠다. 아직 매우 서툴고 모자라지만 한 명이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레온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기사를 노려보았다.

‘딱 한 번.’

제대로 공격하고 누나를 데리고 도망친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현실은 상상과는 달랐다.

“레이나 님은 찾았나?”

기사는 한 명이 아니었다.

“아, 찾았어. 그런데 하나 더 찾은 것 같아.”

“뭔데?”

“백작님께서 말했던 아이.”

“아아,돕겠다.”

“됐어. 레이나 님이나 모셔. 이 정도는 혼자서도 처리 가능해.”

레온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 거만하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거만해도 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레온은 아이다. 그들에 비해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하다.

방심을 노려서 한 방을 먹일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힘들다.

‘분해.’

이제야 누나를 만났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뒤쪽에서는 다른 기사가 누나를 끌고 가서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레온은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나섰다. 그리고 기사가 검을 검집째로 휘두르려는 순간, 론슈카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뭐야?”

론슈카는 나른한 표정으로 기사와 대치 중인 레온을 바라보았다.

“론슈카?”

“뭐 하는 중이야?”

바로 앞에 덩치가 큰 기사가 둘이나 있는데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다.

“론슈카 님.”

기사는 이제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아직 자신감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상대가 아이 둘이니까.

레온은 잠시 고민했다. 론슈카에게 도움을 청해도 될까? 민폐만 되는 건 아닐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결국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도와줘. 도와줘, 론슈카!”

“좋아.”

의외로 답은 빠르게 나왔다. 순식간에 허공에 불꽃으로 만들어진 새가 여러 마리 나타났다.

“뭘 어떻게 도우면 돼?”

“뒤에 잡혀 있는 사람, 내 누나야! 누나를 데려가고 싶어.”

“알았어.”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기사의 표정이 점점 살벌해졌다. 아이 둘이 자신을 앞에 두고 저런 말을 하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일단은 저부터 넘어가고 그런 말을 하시지요?”

상대가 정령사라 하더라도 아직 어리다. 웨더필드가에선 희대의 천재가 나타났다고 했지만, 그래 봤자 어린아이 아닌가. 아무리 천재라도 다룰 수 있는 정령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 방심이 기사를 불태웠다.

불꽃의 새는 어느새 허공을 가득 채울 정도로 빼곡하게 나타나 있었다. 하급 정령이라도 수가 그 정도 되니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게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망토가 불타오르고, 갑옷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기사는 당황하며 갑옷을 벗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사, 살려! 도와줘!”

기사의 도움 요청에 물러나 있던 동료가 다가와 갑옷을 뜯어내듯 벗겼다.

“앗, 뜨, 뜨거워!”

기사가 몸부림치는 사이, 론슈카는 느긋하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레이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일렁이는 불꽃에 시야가 붉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건 빨간 머리의 작은 아이.

“저, 저래도 괜찮은 거야?”

“괜찮아. 엄마가 위험하면 뭐든 해도 괜찮댔으니까.”

위험한 적도 없으면서 론슈카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 론슈카를 보며 레이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장 먼저 레온에게 달려갔다. 레이나의 눈가로 눈물이 반가움과 함께 흘러넘쳤다.

“누나!”

“레온!”

“재회도 좋지만 일단 빠져나가야 할 것 같은데.”

론슈카는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달려오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가자, 누나.”

“하지만 레온,위험해.”

레이나는 침착하게 동생을 설득하려 하였다. 기사 둘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건 안다. 하지만 저들은 그 수가 훨씬 더 많다.

레온과 붉은 머리 아이가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남을 테니까,나중에 다시 데리러 오면 되잖아. 응?”

지금 남게 되면 저들은 레이나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레온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레이나는 마지막으로 보는 동생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는 작고 여리기만 했는데, 지금은 키도 크고 말끔하게 자랐다. 누군지 몰라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레이나는 그 사람에게 감사했다.

“그럼.”

아쉬움을 품고 뒤돌아서려는 순간,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레이크.”

작은 새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나타난 건 불로 만들어진 거대한 와이번이었다.

“막아.”

크르릉!

포효한 와이번이 그대로 달려 나가 몰려오는 사람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여들던 사람들은 그 흉흉한 기세에 더는 나서지 못했다.

“가자.”

론슈카는 레온과 레이나를 보며 말했다.

“저런 건 언제 불러내게 된 거야?”

레온이 눈을 깜박이며 묻자 론슈카가 피식 웃었다.

“예전에. 감탄할 시간에 움직여.”

셋은 그대로 문 입구를 향해 달렸다. 거기에는 론슈카를 여기까지 데려온 기사가 마차를 대 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여깁니다!”

가장 먼저 론슈카가 마차에 오르고, 이어 레이나가, 마지막으로 레온이 올랐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기사는 곧바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얼떨떨한 순간이 지나갔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거야?”

레온은 아까 전에 했던 질문을 또다시 내뱉었다.

“괜찮다니까. 엄마가 그래도 된댔어.”

그리고 엄마를 하늘처럼 믿는 론슈카는 똑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드레이크가 난장판을 만들고 있어서일까, 추적자는 없었다.

그걸 깨닫자 레이나는 뒤늦게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뭐람.’

그토록 끔찍한 생활이었는데, 작은 아이 하나에게 도움을 받아서 벗어나게 되었다.

“대단하네요.”

“누나, 존대하지 않아도 돼.”

“아니, 그래도 도움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러겠니.”

레이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론슈카는 그렇게 말하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얼굴의 흉터를 제외하면 귀여운 얼굴이었다.

“좋은 친구를 사귀었구나.”

이럴 때 나서 줄 친구가 몇이나 있을까. 레이나는 레온이 혼자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