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밀랍으로 봉해져 있어야 할 봉투는 열려 있었다. 그렇기에 몰래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편지 봉투를 열자 하얀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조만간 손자의 생일을 맞이하여 파티를 열고자 합니다. 그 전에 친목 도모를 위해 아이들만 만나는 자리를 따로 마련할 생각인데, 가능하면 루카스 경의 제자도…….」
말이 루카스에게 보낸 것이지, 이건 레온에게 보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득.
레온은 로드린의 뻔뻔함에 이를 갈았다. 자기가 망가트린 가문의 사람을 초대하다니. 배짱이 커도 너무 크다.
아이는 심호흡을 하며 장소와 시간을 확인한 후 다시 종이를 봉투에 넣었다. 그런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무실을 떠났다.
* * *
“초대장이 왔네.”
열심히 일하던 아델은 산더미같이 쌓인 초대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부분 거절하고 있는데도 끈질기게 초대를 하는 게 대단하다 여겨졌다.
“어디 보자.”
한 장, 두 장. 내용을 확인하고 옆으로 넘겼다.
‘이거는 버릴 거.’
후계자 수업을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아델을 이용해 돈을 벌어 보려는 작자들의 편지다. 그런 건 그냥 버려 버린다.
‘이건 답장해야 하는 거.’
귀족이긴 하나 어딘가 미심쩍은 이들 거는 거절의 편지를 보낸다.
‘이건 가야 하는 거.’
분류를 하는데 갑자기 중간에 끼어 있던 초대장이 툭 떨어졌다. 별생각 없이 주워 드는데 초대장 겉면에 쓰인 이름이 익숙하다.
「로드린」
어디선가 봤었던 이름이었다. 로드린, 그는 레온의 가문을 멸문시킨 작자 중 하나였다.
이대로 버릴까, 싶다가 혹시 몰라 초대장을 열어 보았다. 내용은 친목을 도모하는 티타임에 론슈카를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로드린 백작은 뒤가 구린 것치곤 사교계에 발이 제법 넓다. 아델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론슈카를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무것도 몰랐다면 당연히 보냈겠지만, 아델은 로드린의 인성을 알고 있지 않은가. 한참 망설이다가 펜을 집어 들었다.
「초대를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무조건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아델은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 그런 후 론슈카를 찾았다.
론슈카는 할아버지가 마련해 준 연습실에서 커다란 종이를 두고 뭔가 적고 있었다.
“론슈카?”
“엄마!”
론슈카는 냅다 일어나서 달려와 아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론슈카, 뭐 하고 있었어?”
“정령을 부르는 놀이요.”
“놀이?”
저번에 너무 정령에 집착하며 공부하길래 무리하지 말랬더니 슬그머니 명칭을 바꿨다. 본인이 놀이라는데 뭐라고 더 할 수도 없고 난감하다.
“노는 것도 적당히 놀아야 해?”
“그럴게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아, 작은 모임이 하나 생겨서.”
“갈게요.”
예전과 달리 제법 어른스럽게 대답한다.
아델이 후계자 수업을 받는 만큼 론슈카도 배우는 것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현재 위치를 자각하고, 좀 더 주변을 받아들이고자 애썼다.
아직 할아버지인 레이긴과는 어색했지만, 그래도 인사하려고 하는 걸 보면 대견하다.
“그래. 그리고 이번 모임에서는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정령을 불러도 된단다.”
“정말요? 저번엔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거야 친구를 다치게 할까 봐 그랬지. 하지만 이번엔 좀 수상쩍으니 여차하면 힘을 쓰라고 말했다.
“뒤는 엄마가 다 책임질게!”
그 말에 론슈카의 표정이 환해졌다.
“엄마, 너무 좋아요!”
다시금 달려드는 론슈카를 아델도 마주 안았다. 그래, 론슈카가 아무리 날뛰어도 사람을 태우거나 저택을 태울 리 없지 않은가. 그 정도는 아델이 전부 커버해 줄 수 있었다.
‘아니, 사실 더 심한 짓을 해도.’
론슈카는 아델의 소중한 아이였으니까. 아델은 론슈카를 보며 웃어 주었다.
* * *
모임 당일, 아델은 특별히 근사한 사두마차를 준비하였다. 어린아이에게는 다소 과한가 싶었지만, 보이는 것이 중요한 사교계에서는 이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론슈카, 조심해서 다녀와.”
“네!”
론슈카는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대동한 기사와 함께 로드린 백작가로 떠났다.
“어서 오십시오, 론슈카 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시종이 론슈카를 맞이했다.
“모임 장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사님은 접대실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론슈카는 기사와 헤어져 아이들이 모여 있는 온실로 향했다.
유리로 만들어진 온실 중앙에는 섬세한 세공이 새겨진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아이들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일부 아이는 론슈카의 모습을 보며 화들짝 놀랐지만, 일부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로드린 백작의 손자인 알렝도 호기심을 가진 쪽이었다.
“안녕!”
알렝은 가장 먼저 론슈카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
나이가 그보다 어려 보였지만, 그걸로 드잡이하긴 귀찮았다. 그래서 론슈카는 적당히 인사를 해 주고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아냐, 아냐! 론슈카는 거기 아냐.”
알렝은 테이블의 상석으로 론슈카를 이끌었다.
“여기 앉아야 해.”
다시 보니 아이들의 가문에 따라 앉는 위치가 달랐다. 작위가 낮거나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들은 하단 쪽에 앉아 있었다. 그쪽은 놓여 있는 음식도 형편없었다.
순진한 얼굴로 하는 짓은 이미 썩을 대로 썩은 귀족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론슈카가 차를 홀짝이는데, 마지막으로 한 명이 더 들어왔다.
“론슈카?”
레온이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그리 생각하는데 알렝이 일어나 레온을 중간쯤에 앉혔다.
레온이 왔으면 혹시 로잘린도 올까 해서 봤지만, 여기 있는 아이들은 전부 남자아이였다. 로잘린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자, 이제 모두 모였네!”
알렝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티타임을 가져 볼까? 티타임을 한 다음에는 놀이를 할 거야. 여러 가지 준비해 뒀어.”
그 말과 함께 다들 찻잔을 들었다. 론슈카도 마시던 찻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음식이 들어가고 나니 아이들은 좀 더 활발해졌다. 그중에서는 알렝이 제일 그러했다.
“론슈카, 정령을 다룬다면서? 신기하다. 어떻게 생겼어? 난 정령을 제대로 본 적이 없거든.”
“그냥 생겼어.”
“그냥이 어떻게 생긴건데?”
알렝이라는 녀석, 제법 끈질기고 귀찮다. 하지만 이게 공적인 자리임을 알기에 론슈카는 허공에 손을 튕겼다. 그러자 그곳에 불꽃으로 만들어진 작은 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와아아!”
입을 벌린 알렝이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만지는 건 안 돼, 위험해.”
“그, 그렇지. 불꽃이니까.”
알렝은 몸을 바르르 떨더니 손을 회수했다. 하지만 정령을 향한 시선은 돌리지 않았다. 반짝이는 눈이 탐욕에 잠겨 있었다.
“나도 정령을 가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쉽다.”
검술은 재능이 없어도 노력하면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정령술은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시도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나 론슈카는 별말 없이 조용히 차만 홀짝였다.
티타임은 제법 무난하게 흘러갔다. 차를 마시고 핑거 푸드를 먹은 이후엔 가볍게 식사를 하였다.
그다음에는 크리켓 게임을 했다. 인원이 부족해서 일곱 명씩 나눠서 팀을 짜기로 했다.
“난 크리켓이 제일 좋더라.”
납작한 나무 판에 손잡이를 덧댄 모양의 크리켓 배트를 쥔 알렝이 생글생글 웃었다.
론슈카는 알렝과 같은 팀이 되었고, 레온은 상대 팀이 되었다. 서로 번갈아 가며 공을 치고, 한 명은 공을 막는 게임. 규칙은 어렵지 않았기에 금방 익숙해졌다.
문제는 중간부터 생겼다.
“알렝! 우리 팀은 한 명이 모자라!”
상대 팀의 아이가 손을 들며 외쳤다.
“누가 없는데?”
“레온.”
“화장실 간 거 아닐까?”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수가 안 맞잖아.”
투덜거림도 들렸다.
“그럼 내가 빠질게. 나도 잠시 자리를 비울 일이 생겼거든.”
론슈카는 기꺼이 빠지기로 했다.
“그건 싫은데.”
알렝은 불만을 가진 듯했지만, 론슈카를 붙잡지는 않았다. 아마 그도 화장실에 가려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론슈카는 자유를 되찾았다. 슬금슬금 크리켓 게임장에서 멀어진 그는 레온을 찾아보았다. 정말로 화장실에 갔을 것 같진 않고.
정신을 집중하자 허공에 바람의 최하급 정령이 나타났다. 간단한 설명을 마친 론슈카는 정령에게 명령했다.
“레온을 찾아.”
정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으로 사라졌다. 바람의 정령은 최근 공부하면서 얻게 된 성과였다. 비록 아직은 최하급에 불과하지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초대장에 적힌 장소로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만, 이후 겪은 일들은 유쾌하진 않았다.
귀족의 권위에 빠져든 알렝이라는 작은 아이는 볼수록 역겨웠다. 마치 그의 할아버지를 닮은 듯했다.
론슈카를 만난 것은 의외였지만, 따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는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어서 나가야 했다.
그렇기에 크리켓 게임 도중에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아이들은 아직 집중력이 산만한 나이였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어디부터 봐야 할까.’
일단은 외부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저택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는데 문득 저 앞에 지나가는 여성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로브를 깊이 눌러쓴 여성은 체구가 무척 작았다. 대충 1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누구지?’
레온은 비틀거리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여인의 뒤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