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카이가 발코니 입구를 막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을까? 아델은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델.”
그래, 발코니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아델은 다급히 구두를 도로 신으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서둘렀던 탓일까? 기울어진 구두는 굽이 부러지고 말았다.
황망히 구두를 바라보고 있자니 루카스가 그대로 몸을 숙여 발을 잡았다. 상태를 살필 모양인 듯했지만.
‘부끄러워.’
아델은 발코니의 어둠이 자신의 얼굴을 가려 주길 바랐다.
“다행히 발은 무사하군.”
“네.”
그러니 이만 발을 놔줘요. 아델이 배우기로는 배우자가 아닌 사이에는 함부로 발에 손을 대지 않는다 하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실수했군.”
루카스는 뒤늦게나마 아델의 당황함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의 발을 얌전히 내려놓고 물러섰다.
“왜일까, 그대를 바라보면 자꾸 그릇된 판단을 하게 돼. 이번 일도 그렇고.”
“이번 일이요?”
루카스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여기 와서는 안 됐는데.”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루카스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파혼하면서 밀어내 놓고 행방불명이 되자 찾으러 왔다. 이후 주변을 맴돌다가 수도에 오자마자 발길을 끊었다.
‘뭘 하자는 거야!’
루카스의 움직임에 따라 아델의 마음도 흔들렸다. 아닐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솟아났다.
“그럼 왜 오셨어요?”
아델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헤이른이 올 걸 알았으니까.”
그게 뭐야. 마치 헤이른을 경계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아니, 정확히는 그를 포함한 다른 남자들이 그대를 노릴 걸 알았으니까.”
“저를 왜 노려요.”
“아델, 알고 있지 않나.”
루카스의 말이 맞았다. 아델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여기 모여든 남자들은 대부분 차남이나 삼남이 많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도미니크가의 데릴사위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재산이 많은 가문의 외동딸, 얼마나 탐나는 존재인가. 물론 아델은 그런 사람들에게 넘어가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거랑 루카스 님이 여기 온 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요.”
말할 듯 말 듯 루카스는 아델의 애를 태웠다. 분명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얄미워.’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아니면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었던가?
아델은 맨발로 다리에서 일어났다. 구두가 부러졌으니 카이에게 새로 가져다 달라고 할 셈이었다. 루카스가 아직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떠랴.
그렇게 발걸음을 내딛는데 갑자기 루카스가 아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디 가려고?”
그래도 성인 여성인데 새끼 고양이처럼 들어 올려 버린다.
“카이 경한테 가요. 새 구두가 필요하거든요.”
“새 구두를 신고 나면?”
“다시 춤을 추겠죠.”
명색이 아델을 위한 파티였다. 적어도 다른 남자들과도 몇 번 춤을 춰 주는 게 예의이리라.
“그나저나 내려놔 주지 않으실래요?”
아델이 심통 맞은 얼굴로 말하자 루카스는 순순히 아델을 내려 주었다. 문제는 내려 준 장소였다. 그냥 바닥에 내려놓으면 될 것을 자신의 구두 위에 아델의 발을 내려놓은 것이 아닌가.
아델이 놀라 허우적거리자 허리를 잡아서 자세를 바로잡아 준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바닥이 차갑다.”
구두 위라고 뭐 다를 줄 아는가. 아델이 항의하려는 순간, 살짝 열린 발코니 문 사이로 음악이 새어 들어왔다.
‘문이 언제 저리 열렸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루카스가 말했다.
“레이디, 저와 춤을 함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거절. 거절이다!
아델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비치는 루카스의 표정이 너무나도 애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번만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루카스의 구두에서 내려서려 했으나, 그는 아델의 구속을 풀지 않았다.
“이대로 추지.”
“네?”
이건 밀착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원래 귀족들은 이 정도는 쉽게 붙어서 춤추는 걸까?
아델이 그에 대해 묻기도 전에 루카스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에 따라 아델의 발도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가벼운 왈츠였다. 그에 따라 둘은 부드럽게 움직여 나갔다. 하나둘, 발을 내딛고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빙글 돈다.
이런 식으로 춤이 얼마나 제대로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생각보다 매끄럽게 돌아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덧, 왈츠는 끝났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루카스는 아델을 안아다 다시 의자에 앉혀 주었다.
“즐거웠다.”
그러고는 그대로 발코니 난간에 기대더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루카스!”
당황해서 달려가 보니 저 아래 멀쩡히 서 있는 루카스가 보였다. 올라올 때도 이쪽을 이용한 모양이었다.
“아델 님?”
아델의 소리가 컸던지 밖에 있던 카이가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아델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 부위를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정말 괜찮아요. 그보다 구두 굽이 부러졌는데 시녀에게 새 구두를 부탁해 줄 수 있을까요?”
“빠르게 가져오겠습니다.”
“감사해요.”
카이가 사라진 뒤, 아델은 조심스럽게 걸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양말이 더러워졌겠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구두를 신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루카스가 저러는 이유였다.
“정말 뭐람.”
아델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스가 사라지고, 이후는 평탄하게 흘러갔다.
새 구두를 신은 아델은 홀로 나가서 몇몇 남자의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중에는 헤이른도 있었지만, 그는 가차 없이 거절했다. 그 모습에 로잘린이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 그가 싫은걸.’
좋아지는 날이 오긴 할까 싶었다. 호감을 사려는 남자 몇과 춤을 마치고 나니 파티도 어느새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첫 파티는 제법 성공적으로 끝났다.
“오늘 우리 딸이 가장 예쁘더구나.”
팔불출인 레이긴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카이랑 있을 때 가장 잘 어울리더구나.”
그쯤에서 아델은 아버지인 레이긴의 의도를 알아챘다. 하긴 그로선 모르는 남자보다 내내 같이 있어 온 카이가 가장 믿음직한 남자일 터였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
만약 카이와 결혼한다면 그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아델을 존중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건 다른 사람이었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그 사람 말이다.
* * *
케일라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늦은 밤에 되돌아오는 마차 한 대가 보였다. 루카스가 주로 사용하는 마차였다.
“그래, 도미니크가의 파티에 갔다고.”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나. 케일라는 루카스의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키고 싶어 멀리했지만, 다른 사람과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괴로운 것이다. 그렇기에 모순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래도 그 여자는 안 돼.”
프레데릭가에 평민의 핏줄은 용납이 안 된다. 그렇기에 케일라는 결심했다.
“한 번 했던 걸 두 번 하는 건 어렵지 않지.”
내실이 깊었던 패트릭가도 결국엔 망해 버렸다. 그랬는데 도미니크가라고 버틸까.
‘당분간은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슬슬 움직여야 할 모양이었다.
‘어디 보자.’
일단 예전에 협조했던 귀족가를 끌어들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황제인 셀렉시온의 의사였지만, 그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황제는 루카스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길 원하고 있으니까, 그를 이용하면 될 것이다.
거기에 루카스에게 빠진 아만다 황녀도 있었다. 황족이 협력하기만 하면 그다음은 쉽다.
“모든 것은 프레데릭가를 위해서.”
케일라는 그 말을 내뱉었다. 과거에 그녀는 프레데릭가의 부흥을 위해 움직였다. 이번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 * *
‘왜 그랬을까.’
오늘 그래서는 안 됐다. 아니, 애초에 도미니크가의 파티에 가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살면서 이리 충동에 흔들린 적이 없었는데. 아델을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헤이른.’
헤이른은 커다란 벌금을 물고도 계속 아델을 만나고자 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론슈카일 수도 있었지만, 루카스는 그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는 론슈카뿐만 아니라 아델도 노리고 있었다.
‘이제는 반대하는 장로도 없어질 테니.’
아델을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겠지. 물론 아델은 그를 싫어하니 거부하겠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게다가 헤이른 말고도 걱정되는 사람은 더 있었다. 카이, 바로 그였다. 레이긴의 유일한 제자.
만약에 아델이 없었더라면 그가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추측이 가능하지.’
레이긴은 카이를 아델의 배우자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건 싫은데.”
당장이라도 아델에게 달려가 청혼을 하고 싶었다. 평생을 나와 함께해 달라고, 내 심장이 당신을 향해 뛴다고.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레온의 복수를 위해 흉수를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백작가에서 시작한 이 일은 캐내면 캐낼수록 더 깊은 바닥을 내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 더 나아가면 황제도 이 일에 엮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카스는 아델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