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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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

“오늘은 중요한 날입니다.”

카이는 도미니크가의 황금 독수리 기사단 앞에 서서 말을 꺼냈다.

“가주님의 하나뿐인 따님인 아델 님의 데뷔탕트가 이루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날인 만큼 평소보다 더욱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품 안에서 초상화 두 점을 꺼냈다.

“일단 이 얼굴을 봐 주십시오. 이미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프레데릭가의 루카스 경이군요.”

“저쪽은 웨더필드가의 헤이른 경이네요.”

“맞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이 두 분의 출입을 막으십시오.”

“두 분을 말입니까?”

누군가가 꿀꺽 침을 삼켰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사와 위대한 정령사를 막으라니. 평범하게 내릴 수 있는 명령이 아니었다.

“네, 레이긴 님께서 그걸 바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카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엘드릭 경, 하시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카이 경. 오늘 파티에는 카이 경도 참여가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다른 기사가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제가 듣기론 아델 님의 에스코트를 하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염려 마십시오. 시간은 정확히 계산하고 있습니다.”

“계산이고 뭐고 빨리 가라, 가!”

엘드릭이 마침내 존대를 집어던졌다. 카이는 어릴 적에 저택에 들어와 기사들 사이에서 자라났다. 그렇기에 어린 그를 동생이나 자식같이 여기던 이가 많았다.

그들에게 있어 카이는 가족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가 잘되기를 바랐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얼른 가라, 가.”

기사들이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정말이지, 애늙은이라니까. 이번 기회에 파티도 제대로 즐겨 보라고.”

“맞아. 그저께 내가 특별히 춤 교습도 해 줬으니 실수하지 마라.”

“물론입니다.”

카이는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 그럼 가라!”

“다녀오겠습니다.”

“오긴 뭘 와? 오지 말고 끝까지 즐겨라.”

모두 웃는 낯으로 카이를 배웅해 주었다. 덕분에 잽싸게 저택으로 들어온 카이는 일단 옷부터 갈아입었다. 스승님이 이날을 위해 맞춰 준 새 정장이었다.

‘제복으로도 괜찮다 했는데.’

스승님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최고급 재료를 써서 카이의 정장도 새로 마련해 주었다.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나서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이 카이를 둘러쌌다.

“왜 그러십니까?”

“파티 준비는 옷만 갈아입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고요.”

시녀들은 생글생글 웃으며 카이를 다시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뜨겁게 달군 가늘고 긴 쇠로 머리를 말아서 뒤로 넘겼다. 거기에 기름도 살짝 바르고 나니 훨씬 단정한 모양새가 되었다.

“화장도 조금 하고 싶은데요.”

시녀 중 하나가 그렇게 말했지만, 거기까지는 할 수 없다 생각해서 도망쳤다.

“카이 경?”

아델의 방으로 찾아가니, 방금 단장을 마친 그녀가 웃으며 다가왔다. 옅은 보라색 드레스에 벼 모양으로 땋아 내린 반묶음 머리가 잘 어울린다.

“연두색이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보라색도 나쁘지 않네요.”

카이가 팔을 내밀자 아델이 웃으며 손을 얹었다.

“팔이 단단한 게 역시 기사답네요. 저도 좀 더 튼튼해져야 할 텐데 말이죠.”

“나중에 간단한 체력 훈련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좀 더 단단한 몸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홀은 서서히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마침 준비를 마친 론슈카도 아델의 옆에 섰다. 레이긴은 좀 더 늦게 나올 것이라 했으니 이제 이대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셋이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고 내려서니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그들의 이름을 외쳤다.

“도미니크가의 아델 님, 론슈카 님, 카이 경이십니다!”

순식간에 시선이 모여들었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은 다소 부담스럽다.

그래도 아델은 등을 꼿꼿하게 펴고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더 이상 평민이 아니라 레이긴 후작의 딸이다. 예전처럼 모든 사람에게 몸을 숙일 필요가 없었다.

“파티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손을 맞잡고 나와 춤을 추는 커플도 있었다.

‘나도 한 번은 춤을 춰야 할 텐데.’

아마 카이랑 추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팔을 내밀어 온다. 그리고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뒤늦은 손님이 찾아왔다.

루카스와 레온이었다. 그중에서 루카스를 본 카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그 말에 루카스는 손에 든 초대장을 흔들어 보였다.

“초대장을 보이고 들어왔습니다.”

“프레데릭가에는 초대장을 보낸 기억이 없습니다만.”

카이의 말에 아델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제가 줬는데요.”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스승님의 딸이 직접 줬다고 하니 카이로서도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러는데, 레이디에게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뻔뻔하기도 하지. 수작을 부려 초대장을 받아 낸 것만으로도 모자라 춤까지 신청할 셈인 모양이었다.

카이가 막 뭐라 하려는 순간, 두 번째 불청객이 나타났다. 헤이른과 로잘린이었다.

“당신은 또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문을 통과해서 들어왔으니 안심하십시오.”

“아델 님, 혹시 저들에게도 초대장을 주었습니까?”

“아뇨, 그쪽엔 보내지 않았어요.”

“그럼 불청객이 맞단 소리군요.”

“미안하군. 로잘린이 너무나도 오고 싶어 해서.”

헤이른은 뻔뻔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 말에 카이의 시선이 로잘린에게 향하니, 그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고 싶었어요! 아델 님도, 론슈카도, 레온도 보고 싶었어요.”

아이가 그렇게 말하니 더 탓할 수가 없었다. 잘못 말했다가는 아이가 상처 입을 테니 말이다.

결국 카이는 루카스와 헤이른의 파티 참여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의견이었고, 레이긴의 의견은 달랐다.

뒤늦게 나타난 그는 루카스와 헤이른을 쫓아내려고 펄펄 뛰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나갈 사람이던가.

둘은 앞다투어 아델에게 춤을 신청했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데 장신의 미남 셋이 붙어 있으니 화제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걸 해결하려면 셋 중 하나를 골라 춤을 추고 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델은 루카스, 헤이른, 카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일단 헤이른은 제외.’

그와는 죽어도 춤을 추고 싶지 않았다.

‘루카스도 제외.’

아직 그에게 마음이 있긴 하지만, 파혼의 이유를 생각하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단 한 사람이 남았다.

‘카이.’

아델은 카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우아하게 인사를 하며 물었다.

“저와 춤을 추시지 않겠어요?”

남자가 해야 할 말을 대신했음에도 워낙 당당해서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기꺼이.”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델과 함께 홀 중앙으로 나갔다. 그리고 선배 기사들에게 배운 대로 아델을 리드해 나갔다. 살짝 딱딱한 느낌은 있었지만, 첫 춤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다음엔 꼬마 신사들 차례였다. 아델은 론슈카와 왈츠를 추었고, 그다음에는 레온과도 춤을 추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로잘린이었다. 보통 여자끼리는 추지 않으나, 너무 부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외면할 수 없었다.

“로잘린, 나와 춤을 춰 주겠니?”

“네!”

로잘린은 신나서 아델의 손을 잡았다. 키 차이 때문에 춤을 추는 모양새는 살짝 우스워졌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돌아가면서 전부 춤을 추고 나서는 낯선 남자들이 접근했다. 하지만 속이 시커먼 남자들과 춤을 춰 줄 생각은 없었다.

‘데릴사위라도 노리는 거겠지.’

아니면 자신에게 이리 달라붙을 리 없었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싶었다.

“아버지.”

아델은 레이긴의 앞에 서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지막 춤 상대는 아버지인 레이긴이었다. 그렇게 춤을 추고 나니 벌써 다섯 번을 춘 셈이 되었다. 자연 구두를 신고 있는 발이 아파 왔다.

아델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는 발코니로 나갔다. 카이한테는 들킨 것 같았지만, 따라 들어오지는 않았다.

발코니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구두를 벗었다. 비단 양말을 신은 발을 쭉 뻗었더니, 차가운 대리석이 닿아 온다.

그게 기분 좋아서 그대로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여유를 갖는 것도 잠시,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뜨니 바로 앞에 루카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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