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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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 

아델과 론슈카가 떠난 자리, 레이긴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편지를 쓰레기통에 쑤셔 박았다. 이제야 간신히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는 아델에게 이런 더러운 걸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친애하는 레이긴 드 도미니크 후작께’로 시작하고 ‘헤이른 드 웨더필드 올림’으로 끝나는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청혼서였다.

“안 될 말이지!”

레이긴은 끔찍한 거라도 보는 것처럼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

‘염치도 없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청혼서를 보내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세간에 헤이른은 제법 괜찮은 신랑감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레이긴에겐 달랐다. 그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고, 그런 존재가 딸에게 달라붙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편지가 오는 족족 쓰레기통에 박아 버리고 있었다.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오늘도 날아온 편지를 처리한 레이긴은 이어 다음 일정을 진행했다. 그것은 바로 딸을 되찾은 기념으로 여는 파티였다.

아내와 딸을 잃은 후로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던 파티를 열겠다고 하자,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오랜만의 파티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티를 도와줄 만한 여성이 없기에 전문가도 초빙했다. 그녀는 적절히 일정을 조율하면서 아델에게 파티를 준비하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차후 가주 자리를 이어받으려면 그 정도는 알아 둬야 했다. 레이긴처럼 파티를 아예 열지 않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아델의 소개 파티는 완벽하게 치르고 싶다.’

레이긴은 그 욕망만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먼저 초대할 사람을 분류하고 직접 초대장을 써 보냈다. 이어 많은 돈을 들인 여러 가지 물품들이 저택으로 들어왔다.

이곳저곳이 화사한 원단과 레이스, 리본, 꽃으로 장식되자 저택마저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초대장은 다 쓰셨습니까?”

“거의 다 써 간다. 아델은 뭘 하고 있지?”

“리슈 부인과 함께 화병을 장식할 레이스와 리본을 고르는 중입니다.”

“꽃은?”

“그건 정원사가 미리 공수해 두었습니다. 적절한 색을 맞춰 사들였기에 장식만 하면 된다는군요.”

“아델의 새 드레스는?”

“현재 가봉 중입니다.”

“론슈카의 것도 잊지는 않았겠지?”

레이긴은 예리한 눈으로 물었다.

“물론이죠. 원단은 최고급으로 해 달라 일렀습니다.”

“보석상도 불러야겠군.”

“오늘 오후에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모자와 액세서리도 잊지 않도록. 누가 보아도 좋은 소재로만 만들도록 일러두거라.”

“네, 그 때문에 미리 원단을 선점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델의 데뷔탕트는 완벽하게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를 생각하면 다소 늦긴 하나, 어떠랴. 누군가가 그걸로 트집을 잡으면 레이긴이 뭉개 버릴 생각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지?”

“신전에서 사생아는 직계로 올릴 수 없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기부금을 두 배로 넣어 봐. 그리고 내 지인들에게 공증을 서 달라고 요청하도록 하지.”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레이긴은 아델만큼 론슈카도 행복하길 원했다. 그러려면 론슈카는 정식으로 아델의 밑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놈의 규칙.”

귀찮기 그지없었다. 헤이른과 다시 결합하는 게 최선일 수도 있으나 그 놈팡이는 안 된다.

“정 안 되면 폐하를 뵈어야겠군.”

가지고 있는 광산을 하나 넘기면 신전을 설득해 주실지도 모른다. 레이긴은 오랜만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 * *

“으아, 이게 몇 번째인가요?”

아이카는 헤이른이 건네주는 편지를 받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 번, 네 번. 잘 모르겠군.”

“그쪽에서는 청혼서를 그냥 버리는 것 같은데. 계속 보낼 필요가 있나요?”

“있지.”

“가주님이 이상해지셨어어.”

“이상한 건 너다.”

그 말에 아이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보다 세키 님의 근신은 언제까지 지속할 예정이신가요?”

“며칠만 더.”

“아무리 세키 님이 불을 잘 다룬다 해도 화산 지대에 있으면 괴로우실 텐데 말이죠.”

“후계자를 내보냈으니 그 정도 벌은 받아야겠지.”

“무섭네요.”

아이카는 양손으로 닭살이 돋은 팔을 쓱쓱 문질렀다.

“그나저나 그 이야기는 들으셨죠?”

“도미니크가의 파티 이야기라면 들었지.”

“아델 님의 데뷔탕트가 되겠네요. 첫 춤은 누구와 추게 되실까요?”

이미 예전에 루카스와 춘 적이 있었지만, 레이긴도 그렇고 헤이른도 그렇고 그는 잊어버렸다.

“이번에 웨더필드가에는 초대장도 오지 않았으니 헤이른 님은 아니실 테고.”

“프레데릭가에도 가지 않은 것 같다만.”

“뭐, 이해는 해요. 제가 레이긴 경 입장이었다면 두 군데 다 초대장을 안 보낼 것 같거든요.”

아이카의 말에 헤이른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가주님을 나쁘게 말하는 건 아닌 거 아시죠?”

“모르겠다만.”

입이 죄다, 죄. 아이카는 손으로 입을 툭툭 때리며 슬금슬금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다 복도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로잘린 님!”

“아이카 님.”

“오랜만이네요오. 이렇게 귀여우시다니. 저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아이카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자 물의 정령이 나타나 주위를 휙휙 날아다녔다.

“아버지는 뭘 하고 계시나요?”

“그야 또 쓸데없는 편지를 쓰고 계시죠.”

“으음.”

“만나러 가고 싶으신가요?”

“네, 여행에서 돌아오신 뒤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요.”

로잘린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고, 그럼 만나야지요. 같이 들어가실까요?”

방금 나오자마자 도로 들어가겠다니. 이건 아이카의 작은 배려였다.

“감사합니다.”

로잘린은 그 배려를 받아들였다.

“아버지, 안녕하세요.”

로잘린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자 헤이른이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잘린이로구나.”

“네,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단순한 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겠느냐. 그래, 요즘 성취는 어떻지?”

아아, 그게 아닌데. 아이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로잘린이 원하는 건 학습의 성취를 묻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친밀한 부녀 관계를 가지고 싶은 거였다.

‘가주님은 눈치도 없지.’

아이카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하급 바람의 정령을 셋까지 불러낼 수 있어요.”

제법 대단한 성취였다. 문제는 비교 대상이 대정령사가 되리란 말을 듣는 헤이른과 론슈카인 것이었다.

‘로잘린 님도 다른 집안에서 자랐으면 더 귀여움받으실 수 있으셨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 잘했다.”

어머나? 저 정도로 칭찬하실 분이 아닌데? 아이카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헤이른을 바라보았다.

“참, 이번 주 주말에 시간을 비워 놓거라. 도미니크가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다.”

가주님, 초대장이 없으시잖아요? 아이카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금 헤이른은 로잘린을 내세워 어떻게든 안으로 밀고 들어갈 생각인 것이다. 그 때문에 예전이라면 질책했을 상황에서 칭찬을 해 준 것이었고.

“네? 네! 준비해 둘게요.”

그도 모르고 로잘린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모시는 분인데도 이럴 때면 정이 떨어졌다.

* * *

아델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걸 알지만 파티 정도는 참석해도 좋지 않을까? 루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침착하게 초대장을 기다렸으나 날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도 없나?”

“네, 루카스 님.”

키슈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실수로 빼놓은 건 아니겠지?”

“절대 아닙니다.”

“그래.”

루카스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게 어딘지 시무룩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인 걸까?

“스승님, 제가 론슈카에게 초대장을 달라고 해 볼까요?”

그런 스승이 안타까웠는지 레온마저 나섰다.

“아니, 괜찮다.”

“하지만 스승님이 파티에 가지 않으면 아델 님은 다른 분이랑 춤을 추실지도 몰라요.”

레온의 말에 루카스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표정으로 기분을 구분하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한다.

“저만 믿으세요!”

레온은 그런 스승님을 위해 단단히 결심을 한 채 밖으로 뛰쳐나가 도미니크가로 향했다. 루카스나 헤이른과 달리 레온의 출입은 막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론슈카!”

레온은 도착하자마자 론슈카를 찾았다.

“론슈카! 초대장이 필요해!”

“무슨 초대장?”

많이 먹어서 뺨이 통통해진 론슈카가 레온에게 되물었다.

“이번 파티 초대장!”

“엄마한테 물어볼게.”

론슈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델에게로 향했다. 마침 아델은 할 일을 끝마치고 론슈카에게로 오고 있었다.

“레온이 왔구나. 마침 점심을 먹을 예정이었는데, 같이 먹을래?”

“네!”

레온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은 다소 양이 많긴 하지만 전부 맛있었다. 그걸 다 먹고 나서야 다시 용건이 떠올랐다.

“아델 님, 초대장을 주실 수 있을까요?”

“파티 초대장 말이니?”

“네!”

“이상하다. 이미 다 보냈는데 프레데릭가에는 가지 않았니?”

“네, 오지 않았어요.”

“그럼 지금 한 장 써서 줄게.”

“감사합니다!”

레온은 손쉽게 파티 초대장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프레데릭가로 돌아와 그걸 고스란히 스승님에게 바쳤다.

“대단하시네요!”

마들렌과 키슈가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루카스는 레온의 머리를 잔뜩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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