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 편하게 지내거라.”
어느새 레이긴은 팔불출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시작되었다.
아델은 모든 일을 내려놓고, 론슈카와 시간을 보냈다. 둘이서 놀이를 빙자한 치료를 하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아델은 주방에도 드나들기 시작했다. 론슈카를 살찌울 간식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달콤한 푸딩, 부드러운 카스테라, 폭신한 수플레 케이크. 두툼한 소시지를 끼운 빵. 할 수 있는 요리는 전부 해 보았다.
“마, 맛있어요!”
론슈카의 상태도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살이 오르는 것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어느새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을 초록색 리본으로 야무지게 묶어 주었다. 달랑거리는 머리끝이 마치 망아지의 꼬리 같아 아델은 웃어 버렸다.
엄마가 웃으니 론슈카 또한 좋다고 따라 웃는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 살이 붙자, 정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화사하게 핀 꽃 사이를 거니는 모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레이긴은 그 모든 걸 집무실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행복이 가까이 있었다. 딸과 손자를 되찾았다. 그리고 둘이 레이긴이 보이는 곳에서 웃고 있었다.
부푼 가슴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이게 행복이로군.”
행복하게 웃는 레이긴을 보며 카이도 웃었다.
“너는 왜 웃느냐.”
“스승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 그렇습니다.”
“욕심 없는 녀석.”
아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게 생겨도 이러는 걸 보니 마음이 아려 왔다.
“카이.”
“네, 스승님.”
“내가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 있었다. 아델의 허락도 받아야겠지만, 괜찮다면 너도 우리와 가족이 되는 게 어떠냐.”
“저는 이미 스승님의 가족이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레이긴이 헛기침을 했다.
“아델과 결혼을 하면 어떠냐는 소리였다.”
“스승님.”
“늙은이의 주책일 수도 있지만, 나는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구나.”
“아델 님이 원치 않으실 겁니다.”
“그거야 강제로 밀어붙이면 그렇게 되겠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가면 다르지 않을까?”
레이긴의 말에 카이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델은 그동안 카이가 봐 온 여성들과는 조금 달랐다. 씩씩하게 헤이른의 뺨을 때린 것도 그렇고, 아이를 위해 뭐든 하는 것도 그렇다.
어쩌면 스승님이 제시한 의견도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만약에 루카스, 그가 없더라면 말이다.
파혼까지 한 사람을 왜 찾았는지. 처음에는 의문을 가졌지만,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그는 아델을 좋아하고 있었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는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파혼한 거지.’
그도 알아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스승님께 받은 은혜를 제대로 갚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 * *
이제 아델과 론슈카는 안전해졌다. 레이긴 경의 저택에 머무르는 그의 딸을 해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발길을 끊는 게 맞았다.
‘그런데도.’
문득문득 아델이 보고 싶어졌다. 그럴 때면 레이긴 경의 저택 근처를 맴돌아 보기도 했다. 혹시나 아델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가끔 운수가 좋을 때는 정원에 나와 있는 아델을 볼 수 있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오전 내내 루카스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웃음도 오후가 되어선 사라졌다.
레온의 집을 멸문시킨 이들의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로드린, 브뤼노, 프랑크. 앞의 둘은 백작가였고, 뒤의 하나는 후작가였다.
세 가문이 힘을 합쳐 다른 가문을 몰아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레온의 가문은 패트릭 공작가였다. 그런 가문을 그들만으로 무너트릴 수 있었을까?
당장 프레데릭가만 해도 그 셋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패트릭가는 망해 버렸다. 뭔가 배후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배후는 누구일까. 루카스는 그 점에 집중하여 조사해 나갔다.
처음에는 황제를 의심했다. 그는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고, 그가 협조한다면 공작가를 무너트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단순한 일일까? 루카스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틀어 보기로 했다. 패트릭 공작가가 망하고 나서 이득을 얻은 이들은 누구였을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셋을 빼고도.’
이득을 얻은 곳이 하나 더 있었다.
‘프레데릭가.’
루카스가 가주로 있는 이곳이었다. 시기는 그가 가문을 떠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설마.’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자꾸만 의심이 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가주 대행 케일라. 그의 어머니를 말이다.
“루카스 님.”
그때 마침 마들렌이 찾아왔다. 그녀는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와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뭐라도 드시면서 일하시라니까요.”
“그래도 요즘은 먹고 있어.”
“그거야 그렇지만, 살이 많이 빠졌으니 더 드셔야 해요.”
마들렌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음식을 늘어놓았다. 그런 후에 마지막으로 트레이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이건 뭐지?”
“잘 모르겠어요. 오늘 트레이를 보니 올려져 있더라고요. 겉에 루카스 님의 이름이 적혀 있어서 가지고 왔어요.”
“내 이름이?”
루카스는 작은 쪽지를 받아 들어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삐뚤거리는 글씨로 작은 표가 그려져 있었는데, 적혀 있는 이름이 심상치 않았다.
가장 위에는 셀렉시온, 그다음은 케일라, 마지막으로 로드린, 브뤼노, 프랑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루카스가 의심하던 이름들이 말이다.
* * *
‘슬슬 도착했을까?’
아델은 기지개를 켜며 생각했다. 레이긴의 딸로 인정받고 여유가 생긴 뒤에 가장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그건 루카스에게 레온의 가문을 무너트린 흉수의 이름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직접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평민으로 살아온 아델이 그걸 알고 있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론슈카의 도움을 받아 몰래 쪽지를 밀어 넣었다.
루카스는 이미 아델의 글씨체를 알고 있기에 들키지 않기 위해 글도 반대편 손으로 썼다.
‘과연 루카스가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수상한 쪽지를 과연 얼마나 믿어 줄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레온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다만 모든 복수를 이룬 끝은 어떻게 될까. 원래의 레온은 성인이 되어 복수를 시작하고, 원수들을 잔혹하게 처리한다. 그리고 그러던 중 많은 괴로움을 겪는다.
‘연애를 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레온과 로잘린이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진 않았지만, 둘은 맺어질 운명이었다.
‘론슈카도 언젠가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까.’
틀림없이 생길 것이다. 론슈카는 바르게 자라나고 있으니까. 그 고운 심성을 알아보는 여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뜯어낼 게 더 있었지.”
론슈카가 그랬다. 헤이른이 자신의 얼굴 흉터를 없애줄 수 있다 하였다고.
흉터가 있어도 론슈카는 더없이 사랑스러웠지만, 아무래도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론슈카에게는 조금의 괴로움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서라면 아델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엄마~!”
정원에서 마구잡이로 뜯어낸 꽃을 품에 안은 론슈카가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이, 이거 봐요!”
“예쁜 꽃이네?”
“어, 엄마 주려고 꺼, 꺾었어.”
“정말 예쁘네.”
“하, 할아버지 거, 것도 이, 있어.”
“할아버지도 기뻐하겠구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앙금도 풀려 나가고 있었다.
카이가 설명해 준 그의 과거 이야기 때문도 있었지만, 레이긴이 노력하는 것이 보였기에.
“같이 가져다주러 갈까?”
“조, 좋아!”
아델은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다.
“오, 이게 웬 꽃이냐!”
“론슈카가 할아버지 주려고 꺾었어요.”
“정말 예쁘구나.”
레이긴은 론슈카에게 받은 꽃의 향기를 맡다가 시녀를 불러 화병을 가져오라 일렀다. 그러고는 정성껏 꽂아 놓았다.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그 말에 론슈카가 배시시 웃었다. 이제 론슈카도 할아버지가 익숙해지려는 모양이었다.
“나도 꺾어 줘야겠구나.”
매일 마구잡이로 꽃을 뜯어 가는 가족의 모습에 정원사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꽃을 통해 서로 이해하려는 그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가족이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