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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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7

록텐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은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인 아만다와 케일라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레이긴 경의 딸이라고.”

“네, 어머니는 평민인 것 같습니다만.”

보통 한 쪽의 부모가 평민이면 직계로 입적하기 힘들다. 하지만 레이긴 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관련하여 작업을 해오고 있었다. 황제인 셀렉시온도 그의 부탁을 거절하진 않았다.

그 때문에 아델은 이제 귀족 영애가 되었다. 그렇게 되면 론슈카도 위치가 달라진다. 정식 혼인을 통하지는 않았기에 사생아가 되겠지만, 핏줄만은 고귀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루카스 경과는 파혼했으니, 이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

아만다는 아델이 사라지고 난 뒤에 루카스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냉철한 사람이 미친 사람처럼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건 처음 봤다.

‘애초에 파혼도.’

아델을 지키기 위해 했을 것이다. 아만다가 아는 케일라라면 가문에 평민의 피를 섞기 죽도록 싫어했을 테니까. 죽이려는 시도쯤은 몇 번 했을 것이다.

‘거기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

심지어 이제는 아델이 루카스와 같은 귀족이 되었는데? 루카스가 그녀를 놓아주려고 할까. 아만다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황녀님.”

리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만다는 오랫동안 외국에 나갔다 있다 돌아왔다. 그 말은 국내에 이렇다 할 그녀의 세력이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살기 위해서 만들지 않은 것도 있지만.’

오라버니인 셀렉시온은 언제나 웃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만약에 아만다가 자신이 가진 역할을 벗어나 그의 자리를 노린다면 서슴없이 죽일 것이다.

아만다는 셀렉시온이 원할 때,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루카스 경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차라리 오라버니가 없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만다는 우울을 곱씹으며 몸을 웅크렸다.

케일라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찻잔을 보다가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레이긴 경이 딸을 찾았다고요.”

“네.”

“그리고 그 딸은 내 아들과 약혼했었던 아델이라는 여자고요.”

“그렇다고 합니다.”

“일이 희한하게 돌아가는군요.”

헛웃음을 지은 케일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봤자 절반은 평민의 피. 우리 가문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대답했다.

“루카스에게는 좀 더 완벽한 사람이 어울려요. 그래, 마치 황녀님 같은 사람.”

“맞습니다.”

“그러니 좀 더 주의해서 루카스를 지켜보도록 해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알려주는 것도 잊지 말고요.”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래요, 나는 언제나 당신을 믿고 있어요.”

“믿음에 부응하겠습니다.”

이내 남자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사라졌다.

“정말 이용하기 쉬운 사람이라니까.”

그런 남자를 떠올리며 케일라는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정식으로 신분을 인정받자마자 아델은 곧바로 웨더필드가에 방문했다.

“론슈카를 보러 왔어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현 가주 대리를 맡은 세키는 그런 아델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엄마가 자기 아이도 못 찾아오나요?”

“론슈카 님은 직접 웨더필드가를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만든 건 아니고요?”

아델은 세키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세키는 그를 막으려 했으나, 아델에게 손을 대기도 전에 날카로운 살기가 그의 행동을 억눌렀다.

“아델 님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마십시오.”

동행한 카이가 세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아직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델 님은 도미니크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십니다.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십시오.”

“ⵈ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둘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아델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크게 외쳤다.

“론슈카!”

생각보다 큰 소리가 홀에 울려퍼졌다. 하지만 론슈카의 방은 좀 더 외진 곳에 있다. 거기다 방문은 방음에 강한 목재를 썼으니 거기까지 들릴 리 없었다. 세키는 그렇게 확신했으나, 그 예상은 틀렸다.

얼마지나지 않아 작은 아이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대충 로브를 걸친 론슈카는 곧바로 2층에서 뛰어내렸다.

“론슈카!”

기겁한 아델이 받아내려 달려갔지만, 론슈카는 그대로 둥실둥실 천천히 내려앉았다.

“엄마!”

론슈카가 아델의 품에 안겼다.

“세상에, 론슈카.”

아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동안 애를 얼마나 함부로 대했으면, 이리 말랐을까. 간신히 살찌워뒀는데 그 살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나, 나는 어, 엄마가 사, 살아있을 거라고 믿었어!”

“당연하지. 엄마가 론슈카를 두고 죽을 리가 없잖아.”

아델은 론슈카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엄마랑 가자.”

“으, 응.”

“잠시만요, 론슈카 님. 아직 정령술에 대해 알려드릴 것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론슈카 님도 정령술을 열심히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세키가 말렸지만, 론슈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 이, 이미 다 외, 외웠으니까 괜찮아.”

“그걸 다 외우셨다고요?”

“으응. 저, 전부.”

어떻게든 정령왕을 불러내야 했으니까. 론슈카는 웨더필드가 도서관에 존재하는 정령술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외웠다. 보통 아이라면 그 많은 양을 외우긴 어려웠겠지만, 론슈카가 어떤 아이인가.

천재 아닌가. 론슈카는 기어코 모든 것을 머릿속에 박아넣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더, 더 가르쳐드릴 수 있습니다.”

“피, 필요 없어.”

론슈카는 행복한 표정으로 아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나, 난 엄, 엄마랑 갈 거야.”

어쩜 이리도 사랑스럽고 귀여운지. 아델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일단 론슈카를 데리고 돌아가면 며칠간 푹 쉬면서 잔뜩 먹일 생각이었다. 말을 더듬는 건 상황에 따라 악화되기도 하는데, 이번에 상황이 좋지 않아서 다시 도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다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예전으로 되돌릴 셈이었다.

‘이럴 땐 전생이 도움되네.’

아델은 전생에 언어재활사 일을 했었다. 그 때문에 론슈카의 말더듬, 정확히는 유창성 장애에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돌아가자.”

아델은 론슈카를 힘겹게 안아들었다.

“제가 대신 안겠습니다.”

카이가 도와주겠다고 나섰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아델은 론슈카를 끌어안고 당당하게 문으로 향했다.

‘안되는데.’

이대로 론슈카를 보낼 순 없었다. 세키는 손가락을 문질렀다. 정령이라도 부를 셈이었다. 잠시만이라도 멈출 수 있다면 무언들 못하랴.

결심하고 정령을 부르려는 순간, 론슈카와 눈이 마주쳤다. 빨간 눈이 새파랗게 타오르는데 거기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이 세키를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론슈카는 고급 정령을 소환해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어쩌면.’

론슈카는 자신의 실력중 일부를 감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이 압박감은 설명할 수 없었다.

“론슈카 님.”

완벽한 후계자가 떠나갔다.

“으아아!”

안타까움에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자, 여기가 오늘부터 론슈카가 지낼 집이야.”

아델은 새로운 거처가 된 도미니크가의 저택을 보며 말했다.

“예, 예전 지, 집이 아니네?”

“응, 사실 말이야. 엄마에게 아버지가 생겼단다. 론슈카에게는 할아버지야.”

“하, 할아버지?”

“그래, 그래서 오늘부터는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기로 했어.”

“엄. 엄마의 아, 아버지.”

“맞아. 앞으로 지낼 곳이 론슈카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아델은 론슈카를 방으로 안내했다. 루카스의 저택에서 지낼 때도 좋은 방을 썼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았다.

뒤늦게 만난 딸에 흥분한 레이긴이 많은 돈을 쏟아부은 방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론슈카의 방 또한 또래의 남자애가 좋아할만한 것으로 가득 채워넣었다.

“흠흠, 론슈카.”

레이긴은 뻣뻣한 몸을 움직여 론슈카에게 다가왔다.

“내가 네 할아버지다.”

소개를 하고는 금방 수줍어한다.

“저는 레이긴 님의 제자입니다. 편하게 말해주십시오.”

그 말에 론슈카는 아델을 올려다 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냔 무언의 질문이었다.

“두 분에게는 존댓말을 쓰면 돼. 예전에 배웠지?”

“으, 응.”

“그럼 인사를 해볼까?”

론슈카는 아델에게 배웠던 대로 허리를 숙이며 배에 두 손을 얹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래, 나도 반갑구나.”

레이긴은 어느새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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