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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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

다행히 둘은 해가 지기 전에 도시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숙소는 도시에서 가장 커다랗고 깨끗한 여관으로 잡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루카스는 만나고 싶지 않은 자를 만나게 되었다.

“헤이른.”

“루카스.”

식당 구석에 앉아 있던 헤이른은 느긋하게 웃으며 루카스를 맞이했다.

“최근 이상한 게 따라붙었다 싶었더니 너였나.”

“이상한 건 그쪽이겠지.”

“뭐,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처지는 비슷한 것을. 아니, 내가 좀 더 낫나?”

헤이른은 손 안의 와인잔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아델을 만날 수 있거든.”

“어떻게?”

“어떻게 만나겠나. 그녀의 아버지를 통과했으니 만나는 거겠지.”

실상은 카이를 동행하고 잠시 인사만 하는 게 다였지만, 헤이른은 그를 숨기고서 루카스를 도발했다.

“네게 양심이란 건 없는 건가?”

“그럴 리가. 나도 양심은 있다만.”

“그런데!”

루카스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오는 순간,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여성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자자, 그만하세요!”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빨갛다.

“아이카 경.”

“네, 웨더필드가의 장로이자 기사 자격을 얻은 아이카입니다아아! 여긴 다 같이 쓰는 여관이라고요. 여기서 싸우면 안 돼요!”

“먼저 시비를 건 쪽은 헤이른이다만.”

“아아, 그건 가주님이 나빴네요. 가주님, 그러면 안 되죠!”

아이카는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선 비틀거리며 헤이른에게 설교했다. 그러자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시녀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아이카를 잡아당겼다.

“술은 적당량만 드시라고 했잖아요.”

“나는 적당량만 마셨어!”

“거짓말 마세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한 병을 다 마셨잖아요. 이제 그만 위로 가서 쉬세요.”

“흐음.”

아이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루카스와 헤이른을 바라보더니 휘청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절대, 절대 싸우지 마세요.”

남긴 것은 그 말 한마디뿐이었다.

그렇게 아이카가 사라지고 나자 헤이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이만 자러 가야겠군.”

“우린 아직 할 말이 더 있지 않나?”

“나는 없어.”

헤이른은 눈을 곱게 접더니 아이카가 갔던 길을 따라 움직였다. 그 뒤에는 시녀복을 입은 안나가 따라붙었다.

“하!”

루카스는 숨을 터트렸다.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는데. 헤이른은 아무래도 아델을 만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결투에서 이겨서 다시는 아델에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받아 냈건만. 헤이른은 맹세를 지키지 않았다. 이렇다면 돌아갈 수가 없다. 루카스는 이를 악물었다.

“강제로라도 맹세를 지키게 만들어야지.”

루카스는 그리 결심하고, 일단 방을 빌렸다. 척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이라 그런지 여관 주인은 가장 높은 층의 방을 주었다. 헤이른의 옆방이었다. 이제는 그것마저 기분이 나쁘다.

“스승님.”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레온이 조심스럽게 루카스에게 말을 걸어왔다.

“왜 그러지?”

“만약에요. 만약에 레이긴 님이 아델 님을 계속 못 만나게 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만나게 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그래도 만나게 해 주지 않으면요.”

레온의 말에 루카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어떻게든 만나야 한다.”

“그러면요.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레온이 눈을 빛내며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생각해서 그런 걸까, 그 방법이란 게 참으로 파렴치하다.

“새벽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아델 님 방으로 가는 거예요!”

“레온.”

“그다음에 사정을 설명하면 아델 님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나름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고 뿌듯해하는 모양이었지만, 절대 그런 방법을 쓸 수 없었다. 걸리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레온, 새벽에 레이디의 방에 몰래 들어가는 건 해선 안 될 일이란다.”

“하지만 이대로 두었다가 헤이른 님이 아델 님과 만나게 되면요. 아델 님은 헤이른 님을 싫어하셨는데, 나중에 기억을 되찾으면 괴로워하실 거예요.”

그 말도 틀리진 않았다.

“그러니까 아델 님에게 말해 보아요.”

“좀 더 온건하게 낮에 만날 방법은 없을까?”

“그럼 낮에 담을 넘어서 만나러 가는 건 어떨까요?”

결국은 시간대만 다르지, 똑같은 방법이지 않나. 루카스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교육은 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인 모양이었다. 루카스는 레온의 철없는 발언을 잊기로 했다.

잊기로 했는데.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이 다 되어 가도록 루카스는 아델을 만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말해 주러 나오던 카이도 나중에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헤이른은 속을 박박 긁고 있으니 루카스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진지하게 레온이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일단 새벽은 안 된다.’

아델은 높은 확률로 잠옷을 입고 있을 것이고, 잘못하다간 범죄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낮에 들어가는 것뿐인데.

‘불가능하진 않지.’

명색이 소드마스터다. 기사 몇 명이 지키고 있는 별장 정도는 몰래 숨어들 수 있었다.

‘기척을 죽이고.’

사람은 그 자리에 있으나, 아무도 없는 것같이 느껴지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소리를 없애면.’

침투는 어렵지 않다.

“스승님.”

레온이 그런 루카스를 보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결심하셨군요.”

거기에 차마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입구에서 소란을 피우겠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세요!”

레온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레온은 별장 입구에서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델 님을 보게 해 주세요!”

“안 됩니다.”

레온이 루카스의 제자인 걸 아는 기사들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

“꼭 봐야 한다고요. 네?”

제자는 스승님을 위해 얼굴에 철면피를 썼다. 평소에 하지 않던 생떼를 부리며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하지 않던 일을 하려니 얼굴이 빨개졌지만,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은 당황하며 레온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고, 다른 곳을 지키던 이들도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잠시의 틈을 타 루카스는 스며들 듯 정원에 숨어들었다. 소란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바닥을 뒹굴던 레온이 이제는 아예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돌진하고 있었다.

물론 기사들은 그런 레온을 들여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덕분에 루카스는 좀 더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게 맞는 걸까?’

어떻게 별장 근처까지 접근하긴 했으나, 뒤늦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루카스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운이 좋았던 걸까? 마침 도착한 곳은 아델의 방 아래인 모양이었다. 높은 나무 옆으로 보이는 창가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의 얼굴이다.’

루카스는 잠시 넋을 잃고 아델을 바라보았다. 편하게 머리를 풀어 헤친 그녀는 창가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 아래, 그녀는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아델.”

작게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자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델.”

재차 이름을 부르자 책을 보던 아델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초록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누구세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충분히 잘 들렸다. 루카스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침입자다!”

아무래도 누군가 루카스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몸을 숨기는 것조차 잊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루카스는 입을 꾹 다물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그러다 인기척이 가까워져서야 움직였다.

루카스가 사라지고 난 자리,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을 헤치고 카이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침입자를 눈치채고 고함을 지른 이는 그였다.

“아델 님, 침입자를 못 보셨습니까?”

카이의 질문에 아델이 고개를 내저었다.

“못 봤어요.”

“그렇군요. 혹시라도 이상한 느낌이 들면 즉각 소리를 질러 주십시오.”

“네.”

아델은 고분고분 답했다. 그날 카이는 정원이며 별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침입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입구에서 레온이 난동을 부리긴 했지만, 루카스를 의심하지는 못했다.

카이가 아는 루카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침입자 소동은 끝나는가 했다.

* * *

‘익숙한 사람이었어.’

아델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래도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원래 알고 있던 사람이겠지.’

아버지인 레이긴 경이 내켜 하지 않았기에 더 묻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아파.’

그를 만나고부터 머리가 계속 아파져 왔다. 그래서 저녁도 조금 먹고 다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한 번만 더 보면 좋겠는데.’

그러면 모든 것이 떠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불가능하겠지.’

아버지가 허락해 주지 않을 테니까.

‘아니, 아니야.’

아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은 모르지만 이런 건 원래 그녀의 성격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좀 더 과감하게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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