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론슈카의 방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곧바로 달려가서 이 소식을 알려 주면 무척이나 기뻐할 것이다. 로잘린은 열심히 달렸다.
중간에 만난 시녀가 로잘린의 잠옷 차림에 기겁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은 론슈카에게 희소식을 전하는 게 먼저였다.
“로, 론슈카!”
너무 빨리 달린 탓에 숨이 모자랐지만, 로잘린은 힘을 내서 론슈카의 방문을 두드렸다.
“론슈카!”
사실 네 엄마는 살아 있었어.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론슈카가 아니었다.
“세키 님?”
“로잘린 님,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옷도 잠옷이군요. 슬리퍼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급한 일이 있어서 깜박했어요.”
로잘린은 맨발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웨더필드가의 핏줄이 이러시면 안 되죠. 언제나 바르고 기품 있는 태도를 유지하셔야 합니다.”
“네, 그러려고 했는데 너무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게 뭡니까?”
“론슈카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러자 세키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뿐이었는데 마치 숨에 얻어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로잘린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래도 물러날 순 없어.’
론슈카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엄마 소식을 듣고 싶을 것이다. 그 때문에 버티려 했다.
“로잘린 님, 저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세키는 로잘린을 방에 들여보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방문을 닫고 나와 앞서 이동했다.
로잘린은 잠시 망설이다 그런 세키의 뒤를 따랐다. 아버지인 헤이른이 없는 지금 그가 대행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세키는 제법 멀리 떨어진 자신의 임시 집무실로 로잘린을 데려갔다. 그러고는 시녀를 불러 로잘린의 겉옷과 슬리퍼를 가지고 오게 하였다.
“로잘린 님도 이제 여덟 살이십니다. 몸가짐은 바로 하셔야지요.”
“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론슈카 님은 왜 찾으셨습니까?”
“론슈카는 많이 아픈가요?”
“아니요, 그저 일순간 마나가 바닥나셨을 뿐입니다. 잠시 쉬면 나을 겁니다. 그보다 질문은 제가 먼저 드렸습니다.”
세키는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 론슈카를 대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로잘린은 양 주먹을 꾹 쥐었다.
‘무서워.’
세키를 대하는 것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우연히 아델 님이 살아 있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론슈카에게 전하고 싶어서 찾았어요.”
“로잘린 님, 그건 대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아차 싶었지만, 로잘린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평소 아버지인 헤이른이 했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능력이 있다면 뭘 해도 좋다. 정령으로 남의 말을 엿들어도 좋고, 맘에 들지 않는 자를 해하여도 좋다.’
실제로 누군가를 해칠 생각은 없었지만, 너무나도 외로워서 가끔 다른 이의 말을 엿듣곤 했다. 로잘린은 그걸 솔직하게 고백했다.
“훌륭하십니다, 로잘린 님.”
“네?”
“배움을 제대로 실천하고 계시는군요. 저 세키, 감탄했습니다.”
“그, 그런가요?”
세키에게선 처음 들은 칭찬이었다. 로잘린은 괜히 쑥스러워져 땀에 젖은 손을 겉옷에 문질렀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아직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왜요?”
로잘린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직 론슈카 님은 배울 게 산더미같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을 들으면 배움에 집중하지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론슈카는 많이 힘들어하고 있는걸요! 소식을 전해 주면 틀림없이 기뻐할 거예요.”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배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식은 필요 없습니다. 가주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 겁니다. 그러니 로잘린 님, 론슈카 님께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이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로잘린 님은 현명하시니까 제 말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로잘린은 현실과 유리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상한 걸까?’
때로는 가문의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안겨 줄 수 있는데 왜 괴롭게 두어야 하는지.
‘남을 괴롭게 두는 게 현명한 거야?’
로잘린은 자그마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서 주무십시오. 너무 늦게 자면 키가 자라지 않습니다.”
세키는 짐짓 상냥한 척 말을 걸어왔다. 로잘린은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등을 든 시녀가 로잘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시녀는 로잘린이 어둠에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앞을 비춰 주었다. 얌전히 걸어 방으로 돌아오자, 침대로 이끈다.
“좋은 밤 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시녀는 방을 나섰다.
‘좋은 밤 되라고.’
시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로잘린은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이곳에서 이상한 사람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 * *
끈질기게 달라붙은 끝에 루카스는 마침내 웨더필드가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 흔적은 남쪽 바다를 건너 카멜리아 왕국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게 확인되자마자 루카스는 레온을 데리고 서슴없이 저택을 떠났다. 갑자기 떠나는 그의 모습에 일부 가신이 불안해했지만, 그는 다시 돌아올 테니 안심하라 하였다.
루카스는 쉴 틈 없이 말을 달려 항구에 도착했고, 미리 준비해 둔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국 땅을 밟았다.
일단 왕국에 도착하고 나니 다음 정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더듬고 더듬어 마침내, 루카스는 아델이 머무르는 별장에 도착했다.
숲속에 위치한 자그마한 크기의 별장의 문은 길을 향해 열려 있었다.
“누구십니까.”
하지만 문이 열려 있다고 해서 지키는 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가슴에 검을 문 독수리의 형상이 새겨진 제복을 입은 기사 둘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검을 문 독수리. 레이긴의 가문인 도미니크가의 문장이었다.
‘여기서 도미니크가가 왜?’
루카스는 의문을 가졌다. 당연히 웨더필드가의 문장을 보게 되리라 여겼는데, 의외의 만남이었다.
“프레데릭가의 루카스다. 여기 내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기사 둘이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런 후 한 명은 남고 다른 한 명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가 밖으로 나왔다.
“루카스 경.”
“ⵈ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있어야 하니까 있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스승님은 예전에 잃어버린 따님을 찾으셨습니다.”
“축하할 일이군요.”
카이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네, 그렇습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분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루카스는 카이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설마.”
“그 설마가 맞습니다. 아직 신전에 등록하지는 못했지만, 아델 님은 아델 드 도미니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아델 님의 아버지이신 제 스승님은 그분이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히 말해 헤이른 경과 루카스 경. 둘 다 스승님 눈에는 차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물러나 주십시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나라고? 루카스는 이를 악물었다.
“말이라도 전해 주십시오. 제가 여기 왔다고.”
“전해도 소용없을 텐데요.”
“어째서입니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결국 아델도 그에게 질리고 말았나. 그래서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걸까.
“아델 님은 사고로 예전 기억이 없으시거든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해하셨으면 돌아가십시오.”
카이는 그 말만을 남기고 되돌아섰다. 열렸던 문은 도로 닫히고 문을 지키던 기사만이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스승님.”
레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 않다.”
그래, 아델이 무사히 살아만 있다면 되었다. 어차피 위험 때문에 아델을 떠나보내질 않았나.
뒤늦게 깨달은 감정이 심장을 아프게 찔러 왔지만, 덕분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이게 맞는 거다.’
위기도 있었지만, 아델은 자기 자리가 생겼고, 아버지도 찾았다. 그러니 이제 루카스의 비호가 없어도 될 것이다.
‘안다, 아는데.’
쉽게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저 멀리 떨어진 별장 건물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루카스가 발걸음을 옮긴 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해서였다.
“돌아가자, 레온.”
“어디로요?”
레온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일단은 도시로 돌아가자. 여기까지 오는 데 힘들었으니 너도 쉬어야지.”
레온은 그제야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네, 스승님.”
그렇게 둘은 말을 타고 되돌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