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그보다 두통은 괜찮으십니까?”
“버틸 만하다.”
그리 말했음에도 키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아델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나기 시작한 두통은 루카스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약을 먹어도 가라앉는 건 잠시일 뿐이었다.
“잠시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괜찮다니까.”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사람입니다. 쉬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직은 멀쩡해.”
“루카스 님.”
“그만.”
루카스는 손을 내저었다.
“안 그래도 레온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잔소리하는데 그대마저 합류할 셈인가?”
“그야 레온 님의 잔소리도 듣지 않으시니까요. 저라도 힘을 보태야지요.”
“바로 얼마 전에 마들렌이 똑같은 말을 했지.”
“그만큼 걱정돼서 그러는 겁니다.”
“물러가라.”
루카스는 단호하게 키슈를 내보냈다. 레온도, 키슈도, 마들렌도 왜 그러는지는 알고 있었다. 순수하게 그를 걱정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 걱정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델.”
아델을 만나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알 것 같았다. 자신은 그녀를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는 사랑한다고 해도 될 것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결국엔 한 여자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게 어리석다 생각되진 않았다. 그저 당연하게 이루어졌어야 하는 일인 것 같았다.
“아델.”
그리움에 가슴이 탔다. 타오르는 가슴을 침식한 고통은 루카스의 몸을 점차 깎아 먹고 있었다.
사랑이란 것이 마냥 아름답고 부드러운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괴로울 줄이야.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니 돌아와. 돌아와서 나를 구원해 줘.’
루카스는 오늘도 아델을 만나길 간절히 바랐다.
* * *
레이긴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동안 아내와 딸을 찾아다니긴 했으나, 찾은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만나자마자 울겠지, 그리고 웃으며 끌어안고 반가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생각해 둔 것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레이긴은 정원을 산책하는 아델을 바라보며 어색해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알 수가 없었다.
“뭐 하십니까? 스승님.”
“카이, 그게 말이다.”
레이긴은 수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스승의 모습에 카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눈치채지도 못한 채 말이다.
“아델과 내가 오랜만에 만났잖나.”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
“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네?”
카이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냥 말을 거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냥이라니.”
카이는 잠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설마 그 호랑이 같던 스승님이 이렇게 나오실 줄이야.
“공통되는 주제로 말을 건다거나, 그게 힘들다면 일상적인 상황에 대한 대화도 괜찮겠지요.”
“어떻게 말이냐.”
“많지 않습니까.”
“먼저 해 보지 않겠나.”
“ⵈ알겠습니다.”
레이긴의 말에 카이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인기척을 느낀 아델은 금방 뒤를 돌아보았다.
“카이 님.”
“카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어떻게 그래요.”
“아델 님은 스승님의 따님이신걸요. 제겐 윗사람이십니다.”
“그래도요.”
아델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자, 그럼 이제 스승님을 위해 시범을 보일 차례였다.
“산책 중이셨습니까?”
“네, 이제는 오래 걸어도 지치지 않아요.”
그러면서 팔뚝을 굽혀 보였으나 카이의 눈에는 가녀리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중간중간 쉬어 주십시오. 혹시라도 쓰러지시면 큰일 납니다.”
“카이 님은 다정하시네요.”
다정한가? 생전 처음 받는 평가에 카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평민 출신인 그가 받는 평가는 대부분 매서웠고, 그나마 좋은 평가도 냉정하고 판단력이 빠르단 게 다였다.
‘그런데 다정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이곳 정원도 제법 아름답지만, 도미니크가의 정원은 더 아름답습니다.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기대되네요.”
카이는 그 뒤로도 무난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고는 다시 산책을 시작하는 아델에게 인사를 하고, 스승님 곁으로 돌아왔다.
“보셨지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흠, 그래. 좀 알 것 같군.”
레이긴은 재차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시작은 당당했으나 아델과 가까워져 갈수록 손발이 꼬이는 게 보였다.
“아, 아델.”
심지어 말도 더듬었다.
“네, 아버지.”
그에 비해 아델은 침착해 보였다.
“산책은 즐거우냐.”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카이가 했던 말을 조금 변형했을 뿐이다.
“네, 즐거워요.”
돌아오는 답은 단순했지만, 레이긴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아델의 곁에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앞서 나가더니 나중에야 아델의 발걸음에 자신의 발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다.’
그러니 아직 어색한 것도 당연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스승님도 아델도 서로에게 익숙해질 것이다.
카이는 그게 기꺼웠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제자.
레이긴에게 있어 카이는 그런 존재였다. 만약에 딸인 아델을 찾지 못했으면, 카이가 레이긴의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다.
카이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딸을 되찾은 걸 축하해 주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카이만큼 건실한 청년도 없지.’
아까 카이와 아델이 같이 서 있는 걸 보니 제법 잘 어울렸다. 카이라면 아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신분 때문에 여러 문제가 산적하겠지만, 둘이라면 같이 잘 헤쳐 나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책일지는 모르지만.’
둘이 순수하게 사랑에 빠졌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 * *
넓은 연무장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과거에 와이번이라 불렸던 몬스터의 모양을 본뜬 불꽃의 정령이 서 있었다.
[나를 불렀는가?]
거대한 정령이 물었다.
“세상에나!”
속성이 잘 맞아 그동안 론슈카를 가르쳐 온 장로 세키가 입을 쩍 벌렸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상급 불의 정령.
이제 고작 일곱 살이 된 아이가 불러낼 만한 정령이 아니었다. 그런데 론슈카는 그를 해냈다.
“그, 그래. 내, 내가 불렀어.”
[나와 계약하겠는가?]
“그, 그래.”
[좋다. 너의 이름을 말해 다오.]
“론슈카.”
[론슈카, 내 이름은 불의 상급 정령 드레이크. 앞으로 내 이름을 부르면 맹약에 따라 너를 돕겠다.]
론슈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연무장을 가득 채우던 열기가 사그라들며 드레이크가 모습을 감췄다.
이어 론슈카는 모든 힘이 빠진 것처럼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니, 론슈카 님! 의원, 의원을 불러라!”
세키는 론슈카를 안아 들고 다급히 의원을 불렀다.
‘대단해.’
로잘린은 그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론슈카와 자신은 다른 사람이다. 그렇기에 다룰 수 있는 능력에 차이가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해.’
론슈카가 저택에 들어오면서 로잘린은 다른 이들의 관심을 빼앗겼다. 모두 론슈카가 로잘린보다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그가 능력을 보일수록 사람들은 점차 로잘린의 곁에서 론슈카의 곁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옆에 남은 이라곤 론슈카를 흉보며 싫어하는 사람들뿐이다.
“정식 후계자는 로잘린 님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물론 정령술이 서투시니까 작위를 그냥 물려받는 건 힘드시지만, 데릴사위를 들이는 건 가능하시잖아요.”
“그런데 그 기회를 론슈카란 평민 아이가 뺏어 갔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세상에. 푸른 피에 불순물이라니!”
그들은 로잘린이 론슈카를 미워하고 괴롭히길 원했다. 하지만 로잘린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론슈카를 괴롭히겠어.’
밉지만 미워할 수 없었다. 론슈카가 지금 품고 있는 괴로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론슈카는 치사해.’
왜 엄마를 잃어버려서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드는 걸까. 로잘린은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그 답답함은 저녁이 되어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계속 되었다.
‘나도 상급 정령을 불러낼 수 있었으면. 아니, 하다못해 중급 정령이라도.’
그랬으면 아버지는 자신을 더 돌아보았을까? 로잘린은 새어 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그러고는 그나마 가장 잘 다루는 바람의 정령을 불렀다.
“오늘은 뭔가 재밌는 이야기가 없니?”
로잘린의 물음에 바람이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왔다. 더 돌아다니기엔 로잘린의 능력이 모자랐다.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 어느 것부터 들을래?]
“아무거나.”
[그럼 장로 세키부터. 세키는 지금 엄청 흥분해 있어! 론슈카가 대단한 정령을 불러내서 그런가 봐.]
“그건 알고 있어. 다른 건?”
[이건 구석진 곳에서 들은 건데. 아델이라는 사람을 찾았대!]
“뭐?”
로잘린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시 말해 봐. 누구라고?”
[아델.]
“다시!”
그러나 그사이 바람의 정령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코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 시간을 현실에 붙들어 둔 탓이었다.
‘내가 들은 게 정말일까?’
로잘린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당장 론슈카에게 알려 줘야 해!’
로잘린은 잠옷 차림인 것도 잊은 채 방문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