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0 (80/132)

#080

계속 뒤로 물러나자 벽에 등이 닿았다.

“왜 믿어 주질 않는 걸까.”

헤이른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어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졌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고서 자신을 믿으라니.

아델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헤이른의 손에 잡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도망칠 길도 없었다. 어쩌나 싶어 숨만 몰아쉬던 순간,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

1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문을 강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이런 새벽에?’

헤이른은 1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그 소란을 들은 시종이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덜컥.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이 뛰어들어 왔다. 한 명은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헤이른만큼 젊었다.

“아델! 아델!”

앞서 들어온 남자가 아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설마 아는 사람인가? 아델은 2층 난간에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조심해, 그러다 떨어진다.”

몸을 기울인 아델의 옷자락을 헤이른이 잡아챘다. 아까의 무서운 분위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아델! 아델을 데려와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먼저 신분을 밝혀 주시면 주인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이름은 레이긴, 레이긴 드 도미니크! 내 딸을 내놔라, 이놈들아!”

“스승님, 일단 진정해 보십시오.”

옆의 청년이 말렸지만, 레이긴이라 불리는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헤이른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델은 그런 헤이른을 한 번, 아래에서 날뛰는 레이긴을 한 번 바라보았다.

“제 아버지인가요?”

“일단, 이건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군.”

“어째서요?”

“레이긴 경이 네 아버지라는 건 나도 처음 듣는 소리다.”

“네?”

어이없는 소리에 아델은 눈만 깜박였다.

* * *

날뛰는 레이긴 경을 진정시키고, 아델이 잠옷을 갈아입고 난 뒤에 그들은 접대실에 모였다.

시녀는 그런 그들을 위해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 그리고 그제야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헤이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아델은 내 딸이니 내가 데리고 가겠다.”

“제가 그 말만을 믿고 아델을 보내야 합니까?”

헤이른의 말도 틀리진 않았으나, 외려 그게 더 레이긴의 분노를 부채질한 모양이었다.

“네놈, 네놈 따위에게 내 딸을 내어 줄 성싶으냐! 너 같은 놈 때문에 아델이 고생한 걸 생각하면 찢어 죽이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찢어 죽일 수나 있습니까? 게다가 딸이라는 증거는 아직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헤이른은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다른 청년, 카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먼저 이걸 봐 주십시오.”

카이가 내민 작은 로켓에는 한 여성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 얼굴은 지독하리만치 아델을 닮아 있었다.

“과거 스승님과 깊은 관계에 있던 여성분이십니다. 이름은 엘렌. 아델 님의 어머니시죠.”

아델은 조용히 손을 뻗어 로켓을 집어 들었다. 고작해야 엄지손가락 크기, 작은 로켓에 끼워진 낡은 종이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거울에서 매일 보는 얼굴인데 어찌 모를까.

“최근 저희는 조사 결과, 아델 님이 엘렌 님의 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 스승님은 아델 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카이의 시선이 아델에게로 향했다.

“모르, 모르겠어요.”

아델은 로켓을 도로 내려놓았다. 떠오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 와서 어머니와 아버지라니. 아델로서는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아델 님.”

“저는 지금 기억이 온전치 않아요.”

그 말에 레이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사실이냐?”

“네.”

“어쩌다가, 아니, 알 것 같다. 내 어떻게든 널 그렇게 만든 범인을 찾아 벌을 받게 만들겠다.”

레이긴은 이를 으드득 갈며 맹세하듯 말했다.

“더불어 저놈도 말이지.”

그는 헤이른을 놈팡이 취급하였다.

“왜 네가 저 녀석과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넌 저 녀석을 좋아하지 않았어.”

“그래도 웨더필드가의 가주인데 예의를 지키십시오.”

“네놈에게 지킬 예의는 없다!”

둘이 실랑이를 하는데 접대실의 문이 열리면서 한 명이 더 뛰어들어 왔다. 아이카였다.

“밤중에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아이고, 잠도 못 자고 안나에게 끌려왔어요. 아니, 이게 누구세요? 레이긴 경 아니십니까? 이 밤에 여긴 무슨 일이세요?”

“아이카 경이군. 나는 내 딸을 찾으러 왔다.”

“딸이요?”

아이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델에게로 향했다.

“어머나?”

우리 가주님, 큰일 나셨네? 갈데없는 평민인 줄 알고 사라진 기억을 핑계로 옳다구나 끌어안았는데, 아버지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인망 높은 레이긴 경이란다.

‘와, 흥미진진하네.’

아이카는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에 몰두했다.

“그렇죠. 그랬죠. 맞아요. 저희 가주님이 다 잘못했습니다.”

아이카의 맞장구가 길어질수록 헤이른의 시선이 사나워졌다.

‘넌 누구 편이냐.’

‘아이참, 잠시만 기다려 봐요. 전 무조건 가주님 편이지만 여기서 가주님 편을 들면 안 된단 말입니다.’

순식간에 소리 없는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레이긴 경, 저희 가주님도 나름 노력하긴 했습니다.”

“무슨 노력을 했단 말인가!”

정말 화가 많이 나긴 했나 보다. 어지간해선 곱게 말을 하던 분이 막말하길 서슴지 않는다.

“불의 정령사는 물의 정령을 잘 못 다루는 걸 아시죠?”

“그래서.”

“그런데 헤이른 님은 아델 님을 찾으려고 물의 정령을 불러들이다가 두 번이나 쓰러지셨단 말입니다.”

그제야 레이긴의 화가 조금 누그러드는 기색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아델을 둘 생각은 없었다.

“아델은 내가 데려간다.”

“아이, 아직 몸도 안 좋은데, 여기서 좀 더 요양을 하는 건 어떨까요? 불안하시다면 레이긴 경도 여기 머무시면 되잖아요. 여기 손님방도 많답니다?”

“싫다. 이 정도 별장은 나 또한 당장에라도 구할 수 있다.”

“여기엔 웨더필드가의 의원도 있는 걸요? 무척 뛰어난 치료 실력을 가졌답니다. 적어도 기억을 되찾는 동안은 조금 쉬어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이카는 혀를 매끄럽게 놀렸다. 그 때문에 레이긴도 혹할 뻔했으나, 잠시였을 뿐이다. 그는 헤이른이 아델에게 저지른 일을 전부 알고 있었다.

카이가 알아 온 사실을 전부 이야기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헤이른과 아델을 가까이 둔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그럼 이건 어때요? 헤이른 님을 쫓아내고 여기서 아버지와 딸이 오붓하게 요양하시는 거죠.”

“아이카?”

헤이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이카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쉿! 가끔 얼굴이라도 보려면 뭐든 다 들어주는 게 낫답니다.’

아이카는 입술에 손을 올리며 한쪽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에 헤이른의 표정이 험악해졌지만, 아이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웨더필드가의 의원도 있으니 훨씬 좋지 않겠어요? 카멜리아 왕국도 나름 발전한 곳이긴 하지만, 언제 솜씨 좋고 믿을 만한 의원을 찾겠어요?”

거의 넘어왔다.

“그냥 가끔, 아~주 가끔 저희 가주님에게 아델 님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이 모든 것을 그냥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결국 목적이 그것이었군.”

“헤이른 님도 과거 일은 반성하고 계실 거예요. 그렇죠?”

헤이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세요?”

레이긴 경은 이제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은 듯했다.

“아이카 경의 의견도 나쁘진 않군. 어떠냐, 카이.”

“저도 나쁘진 않다고 봅니다. 대신 이왕 머무르는 거 약속은 확실하게 하도록 하죠.”

카이는 종이와 펜을 요구했다.

1. 도미니크 후작가는 웨더필드 후작가의 별장을 잠시 빌린다. 기한은 도미니크가의 핏줄인 아델 님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2. 웨더필드가의 가주는 달에 한 번……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