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헤이른은 아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은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그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돌아가지.”
“당신을 따라가면 제가 잊은 기억을 모두 들을 수 있는 거죠?”
“물론이다.”
“그렇다면 기꺼이.”
아델은 헤이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 남은 자작은 기디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운이 나빴던 거야. 잊도록 하게. 대신 내 사촌 조카를 소개시켜 줄 테니까.”
“하지만 자작님.”
기디언은 침울한 표정으로 아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래. 알아. 누구나 첫사랑은 있는 법이지. 하지만 첫사랑이 모두 이뤄지는 건 아니야.”
자작이 달래 주는 말을 들으며 기디언은 고개를 숙였다.
* * *
“맞다! 그동안 기디언 님께 신세 졌으니 인사를 하고 왔어야 했는데. 그냥 왔어요. 드레스도 그냥 입고 와 버렸고요.”
아델은 난감한 표정으로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인사는 내가 대신 하도록 하지. 드레스도 염려 말도록. 그동안 보살펴 준 대가는 두 배로 돌려주겠다.”
“그럼 다행이네요.”
“그래,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헤이른은 아델의 손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리고 아델을 데리고 마차에 올랐다. 기디언의 작은 이두마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였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숲속에 있는 커다란 저택이었다.
“여기에 제 아이가 있는 건가요?”
“아니, 아이는 다른 데 있어.”
“그럼 여긴 왜?”
“기억을 잃었다면서.”
“네.”
“그 때문에 일단은 쉬면서 완전히 몸을 회복시키는 게 중요할 것 같아 그래.”
헤이른은 그리 말하며 아델은 안쪽으로 안내했다.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자작의 집보다 더 넓은 홀이 보였다. 그리고 그 홀 중앙에는 로브를 걸친 여성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아델은 당황하여 외쳤다.
“사람이 쓰러졌어요!”
“그런 게 아니다.”
헤이른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거기서 튀어나온 불꽃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성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악! 악악!”
여성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굴렀다. 그로도 모자라 물방울을 만들어 내더니 그를 폭 끌어안았다. 다행히 불꽃은 금방 꺼졌다.
“아이카 장로, 바닥에 누워 있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잠시, 잠시 누웠어요.”
아이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개하지. 웨더필드가의 최연소 장로다.”
“안녕하세요. 어릴 적부터 가주님에게 붙들려 고생고생하며 자라 온 아이카라고 합니다. 아델 님이라고 하셨죠? 아델 님은 어쩌다 이런 분께 잡히신 건가요?”
“아이카.”
“호호호, 실수예요. 실수. 말이 헛나왔네요. 어서 오세요, 아델 님. 여기가 비록 숲속에 있지만 제법 지내기 좋거든요. 그나저나 저번에 본 모습과는 다르게 많이 마르셨네요. 좀 더 많이 드시는 건 어떨까요? 어제 들어온 사슴 고기가 아주 야들하고 맛있어요.”
아이카는 제법 수다쟁이였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기보단 재미있는 쪽이었다.
“혹시 저택 안내는 필요치 않으신가요? 제가 해 드릴까요?”
“아이카.”
“아, 맞다. 가주님이 계시죠. 그럼 두 분이서 알콩달콩 저택을 둘러보세요.”
손을 흔든 아이카는 그대로 열린 창문을 넘어 밖으로 사라졌다.
“안나.”
“네.”
“당분간 아이카 장로를 잘 지켜보도록.”
“네, 염려 마십시오.”
안나라고 불린 시녀마저 사라지자, 그제야 고요함이 찾아왔다.
“그럼 일단은 방을 안내해 주지.”
헤이른은 아델을 이끌고 저택을 안내해 주었다. 총 3층으로 이루어진 저택은 제법 커서 전부 돌아다니진 못했다. 중요한 몇몇 장소와 이제부터 아델이 지낼 방. 그 정도만 안내해 주고 끝났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도록 하지.”
“옷이요.”
그러고 보니 아델은 아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래, 새 옷을 입는 게 좋겠어.”
어차피 드레스는 돌려줘야 하기에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옅은 연둣빛이 감도는 일상복은 아델과 제법 잘 어울렸다.
저택의 안내와 옷 갈아입기를 마치자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창문 너머로 사라졌던 아이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그 탓에 헤이른과 둘이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아이카가 장담했던 대로 사슴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그뿐이랴, 다른 음식도 전부 맛있어서 과식을 하고 말았다.
“너무 많이 먹었네요.”
“더 먹어도 될 것 같다만.”
“더는 무리예요.”
아델은 고개를 내저었다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헤이른은 아델에게 무엇이든 해 주려고 했고, 저택의 사람들은 전부 친절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델은 그 모든 것에서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헤이른은 자신보고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은 아직 아내가 아니란 소리였는데, 아이는 있다고 한다.
이건 대체 무슨 관계인 걸까? 아델은 고민하고 고민했다.
‘설마 가져서는 안 될 그런 사이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자신의 아이와 만나게 해 주지 않는가. 왜 이 별장을 벗어나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가.
의문이라면 많았다. 하지만 그 의문을 다른 이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전부 헤이른의 눈과 귀였으니까.
‘뭔가 이상해.’
생각이 깊어서인가. 계단을 내려가던 아델은 발을 헛디뎠다.
“위험해요!”
마침 지나가던 아이카가 정령을 이용해 충격을 줄여 줬지만,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조심하도록 해.”
그 소식을 들은 헤이른은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 말을 듣고 있자면 자신이 느끼는 이 위화감이 착각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델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계단에서 떨어지는 순간, 스쳐 지나간 기억이 있었다.
작은 아이, 붉은 머리를 가진 아이가 있었다. 헤이른과 닮은 외모에 그 아이 또한 불꽃을 다루는 듯했다.
‘내 아이겠지?’
헤이른과 자신의 아이.
‘보고 싶어.’
그리움이 점점 깊어져 갔다. 헤이른에게 물어보자 아이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로잘린.’
분홍 머리를 가진 귀여운 여자아이라고 했다. 하지만 환상 속에서 보인 아이는 남자아이 같았는데? 이름도 다른 것 같았다.
기억이 떠오른 날은 그날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붉은 머리 아이가 보이는 시간이 늘어났다. 가끔은 그 곁에 금발머리의 남자아이가 서 있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잠을 자다 악몽에 놀라 깨어난 밤, 은발 머리의 남자가 꿈에 나타났다.
“아델.”
그는 아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생각해 내야 해.’
아델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떠오르는 기억은 지나치게 간헐적이었다.
‘좀 더 빠르게 기억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의 결과로서 아델은 이른 새벽, 2층 계단 위에 섰다. 가파른 계단이 위험해 보였지만,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목숨을 위협받을 때마다 기억은 더욱더 선명해졌다. 그렇다면 한 번 더 위험해진다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누군가가 아델의 허리를 잡아챘다.
“뭐 하는 거지?”
고개를 돌려 보니 잔뜩 분노한 헤이른이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벽에 계단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다니. 몽유병은 아닌 것 같고.”
헤이른이 거칠게 아델을 잡아당겼다.
‘아냐, 그는 이렇게 군 적이 없어.’
바로 앞에 있는 건 헤이른인데 생각나는 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헤이른.”
아델은 헤이른을 보며 물었다.
“날 속이고 있죠?”
그 말에 헤이른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요즘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뭔데.”
“붉은 머리를 가진 작은 남자아이. 그 아이가 제 아이인 거죠?”
“생각난 건 그뿐인가?”
“아뇨, 더 있어요.”
아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금발의 소년, 은발의 남자.”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 외에 생각나는 건?”
“말해 줘요. 계속 이상했어요. 아이까지 있는데 아내가 될 사람이라니. 그럼 지금은 아내가 아니란 소리잖아요. 제가 아내가 될 수 있긴 하나요?”
“그래. 넌 내 아내가 될 수 있어. 너만 동의한다면 당장이라도 식을 올릴 수 있다.”
헤이른이 아델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하지만 아델은 그를 뿌리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거짓말.”
“거짓말이 아냐.”
“아니요, 거짓말이에요!”
아델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