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툭.
멍하니 있는 바람에 펜에서 잉크가 흘렀다. 아델은 그를 수습하고 다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같아.’
요즘 들어 아델은 일정 행동을 할 때마다 무언가 기억나려 하곤 했다. 이번 일도 그러하다. 예전에도 이렇게 서류를 정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사나가 들어왔다.
“아델 님!”
“사나 씨, 그냥 편하게 말하라니까요.”
“에이, 손님인데 어떻게 그래요.”
그 말에 아델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요번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저야 넘치는 게 시간이죠.”
“그러면 기디언 님의 파트너가 되어 주지 않으실래요?”
“네?”
사나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기디언은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일에 몰두해 왔다.
잘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아가씨들을 전부 쳐 내기 몇 년, 이제는 파티에 같이 파트너로 가 줄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시죠?”
“하지만 저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걸요?”
“준비는 저희가 할게요. 몸만 가세요!”
사나가 눈을 반짝였다. 사나의 말이 사실인 걸까? 아델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노력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사나는 싱글거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럼 지금 이럴 때가 아니네요! 드레스를 입어 보도록 해요!”
“드레스를요?”
“당장 새로 맞추기엔 빠듯하니까 일단은 전 남작 부인이 가지고 계셨던 드레스를 살펴보죠.”
아델이 문을 나서니 사나를 비롯해 친해진 하녀 몇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델을 다른 방으로 이끌고는 드레스를 입혀 보기 시작했다.
“조금 옛날 스타일이긴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도는 거니까요. 치수를 수정하고 여기 장식을 덧대면 괜찮지 않을까요?”
“괜찮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장신구는 이 색으로. 녹색 계열이 잘 어울리시네요.”
순식간에 드레스가 정해지고 바느질을 잘한다는 하녀가 그를 수선하기 시작했다.
“당일이 되기까진 비밀이에요. 아셨죠?”
사나는 몇 번이고 당부했다.
“미리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혹시라도 파트너를 미리 구하면 어찌 된단 말인가. 아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사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기디언 님을 잘 알고 있답니다. 지금쯤 일하느라 바빠서 파트너는 생각도 못 하고 계실걸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사나가 고대하던 주말이 돌아왔다. 아델은 일찍부터 일어나 깨끗이 씻고 몸을 꾸몄다.
갈색의 풍성한 머리카락은 뜨거운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 늘어트려 반묶음으로 묶고, 옅은 화장을 했다. 거기에 드레스를 입고 장신구를 걸치니 제법 그럴듯하다.
“아름다우셔요!”
사나의 말만큼은 아닌 것 같았지만. 사나는 묘하게 텐션이 높아서 대하기 힘들었다.
“그럼 내려가실까요? 마침 기디언 님도 준비를 마치고 출발할 준비를 하고 계세요.”
사나는 아델의 등을 살며시 밀었다.
‘부끄러운데.’
아델은 방을 나서서 2층 계단 앞에 섰다. 아래에선 평소 일하러 갈 때 입는 제복을 입은 기디언이 서 있었다.
“기디언 님!”
사나의 목소리에 기디언이 2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델 님?”
목소리 또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내려가 보세요, 아델 님.”
아델은 드레스를 입은 채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1층에 도착하여 기디언의 앞에 섰다.
“사나 씨가 기디언 님의 파트너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요.”
뭐라고 더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입을 다물고 망설이고 있자니 앞에 탄탄한 팔뚝이 다가왔다.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다정한 태도에 아델은 작게 웃음 지었다.
“그런데 정말 파트너가 없으신가요?”
“바빠서 미처 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구하지 못해 다행이었단 생각이 드는군요. 이리 아름다우신 분을 에스코트하게 되었으니까요.”
닭살 돋는 멘트. 아델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그럼 갈까요? 오늘은 자작님이 놀라실 것 같습니다. 매번 저에게 파트너를 데려오라고 노래 부르시던 분이거든요. 그런데 그 소망을 이뤄 드리긴 처음이군요.”
“그렇군요.”
둘은 사이좋게 이두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 좀 더 커다란 저택에 도착했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요.”
마차에서 내릴 때 또한 기디언이 아델을 에스코트했다. 그 상태로 안으로 들어가니 시선이 모여든다.
“오오, 기디언!”
“자작님.”
“오늘은 어쩐 일로 파트너를 데리고 온 거지? 이런, 그럼 내가 한 일은 소용없게 되었군.”
자작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무슨 일 말입니까?”
“우리의 숙맥 기디언 남작을 위해 사촌 조카를 불러왔거든. 이제 성인이 된 아이인데 제법 사랑스러워. 그런데 파트너가 있다니 더는 권유하지 못하겠군.”
“안타까운 일이군요. 하지만 저는 지금에 만족합니다.”
“자, 그럼 파트너를 나에게 소개시켜 주겠나?”
“네, 이쪽은 아델로 현재 저희 저택에 머무르는 손님입니다.”
“아델 양이로군. 그래, 부친은 뭘 하시나?”
기억 자체가 불완전했으므로 거기에는 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기디언이 대신 나서서 수습해 주었다.
“흐음, 그래?”
자작의 눈빛이 조금 바뀐 것 같았다. 의심스러운 눈동자. 하지만 여기서 아델이 할 수 있는 일은 달리 없었다.
자작과의 만남이 끝난 뒤에도 기디언의 인사는 끝나지 않았다. 좋은 성격처럼 아는 사람도 많은지 계속 안부를 물어 온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델을 궁금해하는 터라 조금 피해 있기로 했다.
아델은 파티장의 벽 쪽으로 향했다. 몇몇 젊은이들이 그런 아델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모든 인사를 마쳤는지 기디언이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혹시 안에 있는 게 힘드시다면 정원을 한번 돌아볼까요? 자작님의 정원은 상도 받은 적이 있거든요. 틀림없이 눈이 즐거울 겁니다.”
“그럼 그럴까요?”
아델은 기디언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나섰다. 정원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그곳을 거닐다 보니 마음이 편해져 왔다.
“아델 님.”
“네?”
“만약에 말입니다.”
“네.”
“기억이 돌아오신다면, 그렇다면 저와 교제를 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아델은 놀란 눈으로 기디언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호감을 가진 여성분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아델 님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기디언은 제법 반듯한 사람이었다. 가문은 크지 않았지만, 그의 손을 잡으면 앞으로 평생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아델은 부드럽게 웃으며 거절의 말을 골랐다.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어째서입니까?”
“그건.”
아델이 막 대답하려는 순간, 정원 저편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곁에는 자작이 있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곧바로 아델을 가리켰다.
그러자 붉은 머리 남자의 시선 또한 아델에게 닿아 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아델 님?”
기디언은 아직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아델 님과 앞으로 남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건 무리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붉은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
“네?”
“아델은 내 아내가 될 사람이거든.”
갑자기 등장한 남자의 말에 기디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에게 자작이 소곤거리듯 말했다.
“제국의 웨더필드가 사람이야.”
기디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작위를 가진 사람이란 소리였다.
“물러나지.”
기디언은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현재 아델의 기억은 온전하지 못하다. 그러니 웨더필드가의 사람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단 소리였다.
“아델.”
그는 아델의 앞에 서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살아 있었군.”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느껴졌다.
“누구시죠?”
“날 기억하지 못하나?”
“사고 이후로 기억이 온전치 못해서요. 소개를 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헤이른. 헤이른 드 웨더필드다. 네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지.”
“ⵈ아이요?”
“그래, 같이 오지는 못했지만, 저택에서 널 기다리고 있다.”
그 말에 아델은 가슴이 뜀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 자신에게도 아이가 있었다. 어쩐지 다른 집 아이를 볼 때마다 괴롭더니. 전부 아이를 잊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