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헤이른은 안전을 확인하자 아델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헤이른에게서 떨어지자마자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ⵈ별거 아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저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대로 뒤돌아서려는 아델을 헤이른이 붙잡았다.
“더 할 말이 있나요?”
“첩의 자리가 불만스러운 거라면 바로 본처로 맞이해 주마. 공식적으로 내 아내가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해도 론슈카를 가지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런 게 아니다만.”
“저번엔 평민이라서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생각이 바뀌었다.”
헤이른의 말에 아델이 작게 한숨지었다.
“당신은 여전하네요.”
“그래서 답은?”
“사양하겠습니다. 우리는 같이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어요.”
아델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헤이른은 떠나가는 등이 작아질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아버지.”
그런 헤이른에게 로잘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제가 잘못한 건가요?”
겁을 먹은 듯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헤이른은 손을 올려 로잘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잘했다.”
그 말에 로잘린의 눈이 반짝 빛나며 입이 벌어졌다. 평소 칭찬에 인색했던 헤이른이기에 더 그러했다.
“그런데 왜 아델을 여기까지 데려온 거지?”
“아델 님이 엄마가 되어 줬으면 했어요.”
로잘린은 수줍게 답했다.
“왜?”
“상냥하고 다정하시니까요.”
그래,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델은 상냥하고 다정했다. 정체도 모르는 외지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도와주려고 했었다. 뒤늦게 떠오른 기억에 헤이른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 *
오늘 루카스는 외출을 했다. 레온의 일로 만나기로 한 사람이 고서적 거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낡은 옷차림의 남자는 예전에 패트릭 공작가에서 일하던 시종이었다. 그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대가를 쥐여 주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덧 시간은 정오를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있는 장소는 고서적 거리. 루카스는 잠시 책을 살펴보기로 했다. 아델이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선물할까, 싶었다.
그렇게 길가의 서점에 들어가 입구에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마차가 다가왔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마차는 거리의 암묵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있었다. 저러다 다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루카스가 나서려는 순간, 달리던 마차 바퀴가 전부 불타오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루카스는 아델을 끌어안고 있는 헤이른의 모습을 보았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째서 아델이 여기에?’
아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헤이른의 품을 벗어났다. 상황을 보아하니 헤이른이 그녀를 구해 준 것 같았다. 그래, 그뿐일 것이다.
하지만 떠나는 아델의 등을 바라보는 헤이른의 시선이 거슬렸다.
‘너는 그럴 자격이 없다.’
아델이 누구 때문에 고통받았는가. 그걸 알면 저런 눈으로 아델을 바라봐선 안 됐다.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 * *
황실에서 서신이 왔다. 거창했던 것과는 다르게 서신의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다. 그저 헤이른과 루카스의 재결투 날짜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결투는 무승부로 끝난 게 아니었던가요?”
“양쪽 모두 승복하지 않는다면 재결투가 이뤄질 수도 있다.”
“그렇군요.”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루카스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괜찮으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나는 괜찮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아델은 손을 뺨에 대고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어디 아프면 꼭 이야기하셔야 해요?”
“물론이지.”
재결투 날짜는 생각보다 빠르게 정해졌다. 고작해야 일주일 뒤. 그때까지는 루카스에게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이번 결투 장소도 황궁이네요.”
정확히는 황궁의 연무장이었다.
일주일은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저번과는 다르게 이번엔 결투장에 많은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 소수의 공증인만이 모였을 뿐이었다.
결투는 치열했다. 헤이른은 저번처럼 쉽사리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고, 루카스는 접근하려고 했다. 불꽃이 흩날리고, 검이 그를 갈랐다. 그 결과, 승리는 루카스에게 돌아갔다.
루카스는 불꽃을 헤치고 들어가 헤이른의 목에 검을 겨눴다. 완벽한 승리였다.
“내가 졌군.”
헤이른이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이겼고. 약속은 지키는 거겠지?”
결투 시작 전, 둘은 승자에게 돌아갈 것을 새로 정의했다. 루카스는 헤이른이 다시는 아델에게 접근하지 않기를 바랐고, 헤이른은 아델과 루카스가 파혼하기를 바랐다.
헤이른은 입을 몇 차례 달싹거리다 꾹 다물었다. 그러다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약속은 약속이니 지키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아버지!”
로잘린 또한 눈물이 글썽해져서는 헤이른을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귀찮다고 했으련만, 지금만은 헤이른도 로잘린을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결투는 생각보다 시시하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루카스는 아델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전은 확보된 것 같으니, 파혼하도록 하지.”
“네?”
아델은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우리의 약혼만 깨지면 내 어머니도 더 이상 그대의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케일라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헤이른의 일이 해결되었으니 우리의 약혼은 필요 없는 것 아닌가.”
냉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틀린 말은 아닌 데 왜 이리 가슴이 저려 올까. 아델은 뜨거워져 오는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갑자기 웬 눈물이람.’
알 수 없었다.
‘그래, 여기서는 물러나는 게 맞아.’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니다. 지금의 아델은 글을 읽고 쓸 줄도 안다. 그것만으로도 돈은 벌 수 있다. 거기에 루카스가 평생 먹고살 돈을 약속해 줬으니, 앞날이 평온할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아델은 입술을 깨물었다.
“떠나지 않는다면요?”
“아델, 론슈카를 생각해.”
냉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대가 여기 있어 봤자 도움 되는 건 없어.”
그 말이 맞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를 말하지 않는 한, 아델은 루카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네, 그럼.”
목이 막혀 왔다.
“출발은 언제,”
“내일.”
“그렇게 빨리요? 레온과 인사도 해야!”
“인사는 짧게 하면 돼. 그리고 아침 식사 후에는 가까운 신전으로 가서 파혼을 한다. 이후엔 미리 준비해 둔 마차를 타고 옆 왕국의 도시로 가면 돼. 집은 이미 키슈가 준비해 두었다.”
“키슈가 골랐으면 멋진 집이겠네요.”
“그래, 둘이 살기엔 딱 적당하다 하더군. 게다가 바로 근처에 경비대가 있어서 안전하다.”
“헤이른 님은 약속을 지키겠죠?”
마지막 질문에도 답은 쉽게 나왔다.
“헤이른은 한번 한 약속을 쉽게 어길 사람이 아니다.”
“네.”
더는 꺼낼 말이 없었다. 아델은 순순히 다가올 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깊은 밤, 아델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적거렸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 생각하니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 보니 반대편에 등을 보이고 자는 루카스가 보였다.
이제 이 모습도 오늘로 끝이다. 아델은 질끈 눈을 감았다.
* * *
“네?”
아침이 되어 간밤의 일을 전해 들은 레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델 님과 론슈카가 떠난다고요?”
“그래.”
잠시 고민하던 레온은 이내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대피시키는 거지요? 그렇죠?”
“그것도 맞긴 하다.”
“그럼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시는 거지요? 모든 것이 해결되면, 그때요.”
“아니, 돌아오지 않아.”
“왜, 왜요?”
레온이 다급히 물었다.
“속여서 미안하다, 레온. 애초에 이 약혼은 모든 것이 거짓이었어.”
“말도 안 돼요! 제가 보기에 스승님은 아델 님을 진심으로 좋아하셨는걸요!”
“그럴 리가. 모든 것은 연기일 뿐이었다.”
레온이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하니 있을 때, 론슈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맞아. 모든 것은 연기였어.”
“론슈카?”
“내가 지나치게 얌전하단 생각 안 했어?”
했다. 론슈카는 엄마를 무척 좋아해서 끝까지 두 사람의 결합을 반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론슈카는 모든 걸 납득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쉽게 설득이 가능한 성격이 아닌데도.
“미안해, 레온.”
아델은 레온에게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그제야 레온은 납득할 수 있었다. 둘의 약혼은 모두 거짓된 것이었음을 말이다.
‘그럼 내가 본 건 뭐야?’
레온은 의문을 가졌다. 아델이랑 같이 있으면 루카스는 종종 웃곤 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모습이기에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던 레온도 둘의 사랑을 믿었다.
모든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아델과 루카스는 파혼을 위해 가까운 신전으로 향했다.
파혼은 약혼보다 훨씬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