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그동안 레온은 루카스를 만나기 전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루카스 또한 레온에게 사정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깊게 묻지 않았다.
그런 관계가 지금 깨지려 하고 있었다. 레온은 두려움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스승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뿐이 아니었다. 마들렌도 키슈도 언제나 레온을 위해 주었다. 뒤늦게 만난 아델도 다르지 않았다.
‘론슈카.’
론슈카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마음을 많이 열어 주었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과거를 말이다.
레온은 마음을 다잡고 과거의 일을 이야기했다. 가문이 멸문하기까지의 일에서부터, 사라진 누나의 일까지. 그리고 요번에 만난 로드린 백작의 일까지 말이다.
“그렇게 된 겁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레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런 대단한 일을 그동안 감추고 있었으니, 스승님께서는 얼마나 놀라셨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막상 바라본 스승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래, 그랬던 거였군.”
루카스는 나지막하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정을 몰랐을 뿐, 레온의 정체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제자로 맞이하는 데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을 리가.
“그럼 나도 고백해야겠구나.”
사실은 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노라고. 루카스는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러자 레온은 그 자리에서 흐물흐물해져 주저앉았다.
“알고, 알고 계셨군요.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레온을 보며 루카스는 작게 웃었다. 복수심을 가슴에 품고 있으나 아직 순진하고 어린 아이다.
“내가 도와주마.”
그런 아이가 험한 길로 가는 걸 보면서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괘,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스승님까지 끌어들일 순 없어요!”
“레온, 이미 늦었단다.”
처음 레온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루카스는 그의 길로 같이 들어섰다. 인제 와서 모든 걸 잊고 헤어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얌전히 도움을 받으렴.”
“그럴 수는,”
“민폐가 아냐. 스승으로서 제자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 어른은 아이를 보호해야 하니까.”
뒷말은 예전에 아델이 했던 말을 가지고 왔다. 이 순간에 그보다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레온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웃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루카스는 이미 대가를 다 받은 기분이었다.
* * *
레온과 루카스의 일이 잘 풀려가는 한편, 아델은 다소 고생을 하고 있었다. 사냥 대회 이후, 귀부인들의 반응이 전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몽펠 백작 부인을 필두로 몇몇 귀부인은 여전했지만, 그 외의 사람은 조금씩 달라져 갔다. 누구에게 괴롭힘이라도 사주받은 사람처럼 아델이 하는 일을 사사건건 걸고넘어졌다.
‘하지만 그게 뭐?’
귀부인들의 괴롭힘은 음험하긴 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이래 봬도 더한 고난도 버텨 낸 아델이었다.
나중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아직 그들의 괴롭힘은 애교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괴롭힘의 시작을 알게 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초대받은 아만다의 티타임. 이른 시간에 그 장소를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시녀를 붙잡고 물어봤더니 날짜가 변경되었단다.
‘유치한 괴롭힘이네.’
하지만 상대는 황녀, 이쪽은 평민.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한숨을 푹 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란 건 대충 짐작했잖아.’
그냥 봐도 아만다가 루카스를 좋아하는 건 눈에 보였으니까.
‘나는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그걸 아만다에게 말할 순 없으니 당분간은 그녀의 심술을 감당해야 할 것 같았다.
돌아가기 위해 황궁을 나서는데 마침 비가 오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녀가 마차에서 우산을 가져오겠다며 달려갔다. 같이 달리고 싶었지만, 귀부인은 함부로 뛰어선 안 된다.
‘귀찮아.’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 익숙한 청년 하나가 섰다. 황궁 파티 때 레이긴 경의 부름에 검을 가지고 왔던 청년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가 되돌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아델 양.”
그는 아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현재 사교계에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아델은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카이, 카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도 성을 말하지 않네.’
예전에 만났던 아스펜이란 사람처럼 평민인 아델을 배려해 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답에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도 평민입니다.”
조금 놀랐다.
“그렇기에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괜찮으십니까?”
“네, 이 정도는 버틸 만하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갈색 머리에 흔한 파란 눈. 굳은 표정이었을 때는 몰랐는데 웃으니 제법 잘생겼다. 현대라면 훈남 소리를 들었을 것 같았다.
“걱정 감사합니다.”
“말뿐인 걱정입니다.”
“그래도요.”
마침 시녀가 우산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우산은 가져오셨나요?”
“없습니다만,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남자에게 선뜻 호의를 베푸시면 안 됩니다. 황궁은 온갖 구설수가 들끓는 곳이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카이는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아델이 말리기도 전의 일이었다.
시작은 불쾌했지만 돌아가는 길은 제법 괜찮았다. 아마도 자신을 걱정해 주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 그런 모양이었다.
* * *
레이긴 경의 저택으로 돌아온 카이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저번에는 검을 건네주고 결투를 지켜보느라 아델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평민이 황궁에 들어온 건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닮았어.”
표정을 지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웃는 모습을 보니 희미하게 스승님이 떠올랐다.
“카이, 나에게는 딸과 아내가 있었다. 내가 버리고 온 유일한 가족.”
레이긴은 바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정실부인에게도 제대로 예의를 갖춰 대했다. 그녀 역시 모든 것을 각오하고 결혼했기에, 레이긴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할 수 없었노라고, 스승님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백했다.
“난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 싶다.”
레이긴은 후작위에 오르자마자 사람을 풀어 과거의 흔적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을 풀어도 찾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니겠지.’
이렇게 형편 좋은 우연이 일어날 리가 있나. 카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스승인 레이긴에게로 향했다. 최근 들어온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스승님.”
“오, 카이!”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게 무엇이더냐.”
다부진 손이 평소와 달리 가늘게 떨렸다.
“과거 스승님과 연이 있었던 분을 찾은 것 같습니다.”
“엘렌을?”
“네.”
“맙소사!”
레이긴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어디, 어디 있다더냐.”
“마지막 흔적은 화전민 마을에서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 본 결과,”
카이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오오, 엘렌!”
레이긴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내가 너무 늦었구나.”
“스승님.”
“나는 괜찮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니까. 원래도 엘렌은 몸이 약했었지. 그렇다면 내 딸은, 딸은 어떻게 되었다고 하더냐.”
“마을을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고 합니다. 현재 추적 중이긴 하지만 마을을 많이 옮겨 다닌 모양입니다.”
그 외에도 미심쩍은 정황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엘렌의 딸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왜, 왜 그 여자를 찾으시는 겁니까?”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협박이라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고귀한 분이 찾고 계셔서 그렇습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대답했다.
“악마의 아이! 그 아이는 악마의 씨앗이야!”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경우엔 깊은 화상을 입고 있었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수상해.’
이런 식으로 마을 자체가 입을 다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뭔가 있는 것이다.
“그럼 엘렌의 아이는, 내 딸아이는 아직 찾지 못한 거로구나.”
“네, 이번에는 제가 직접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카이는 다소 험한 방법을 써서라도 모든 것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스승님은 마음이 약해서 하지 못하실 테니까, 자신이 악마가 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