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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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

“무승부로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무승부를 주장하기보단 케일라의 의견에 편승하는 편이 낫다는 걸 헤이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상대가 평민이건 아니건 루카스는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뛰쳐나갔다.

여기서 승리를 받아들이는 건 좋지 않다.

‘루카스와는 제대로 싸워 보고 싶기도 하고.’

실력으로 제대로 이겨 내고 싶었다. 그래야 루카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차후 재결투를 하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루카스 경은?”

“저도 동의합니다.”

“둘 다 그렇다는군, 케일라 가주 대리.”

케일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하지만 당사자인 둘이 저렇게 말하는 이상, 케일라로서는 더 끼어들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입을 다물고 조용히 물러섰다.

“그리고 사냥 대회 말인데. 이런 사소한 일로 취소하고 싶진 않군. 몰이꾼도 아직 남아 있으니 이대로 진행하기로 하지.”

셀렉시온의 말에 몇몇 사람의 표정이 변하긴 했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현 황제의 고집을 알기 때문이었다.

귀부인들은 다시 천막에 모여들었고, 사냥을 하려는 이들은 흩어졌다.

“루카스 님은 가지 않으시나요?”

아델은 모두 흩어져도 여전히 옆을 지키는 루카스에게 물었다.

“위험하니까.”

“이제는 괜찮아요. 기사들도 가까이 있고요. 더는 위험한 장소에 가지 않을 거예요.”

“못 미더운데.”

루카스의 말에 안절부절못하던 레온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레온?”

“제가,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숲속으로 들어가서 그래요.”

레온은 나중에야 아델이 자신을 찾으러 숲으로 들어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전부 그의 잘못이었다.

“아델 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그걸 알기에 레온은 서슴없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아냐, 레온. 고개 들어 봐. 레온이 말도 없이 숲속에 들어간 건 잘못한 게 맞아. 하지만 이미 큰일을 겪었잖아. 그리고 잘못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잖아. 그러면 된 거야.”

아델은 레온을 달래 주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마터면 가까운 사람이 죽을 뻔했다. 그 충격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레온.”

루카스는 아델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굽혀 레온과 시선을 맞췄다. 예전에는 레온에게 신경을 쓰더라도 굳이 이런 행동까지 하진 않았는데, 아델이 그를 변화시켰다.

“후회는 해도 되지만, 너무 길게 하지는 말거라.”

그 말에 레온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요.”

아델이 루카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뭐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이왕이면 1등을 하는 게 더 멋지지 않을까요?”

“1등이 멋진가?”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러니까 루카스 님도 인제 그만 사냥하러 가시지요?”

“좋아. 멋진 걸 잡아 오도록 하지. 대신 이 주변을 벗어나지 말고 기다려.”

“물론입니다!”

아델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루카스가 사냥을 떠난 뒤. 아델은 누워 있는 로잘린을 간호하며 레온, 론슈카와 함께 루카스를 기다렸다.

‘그나저나 헤이른은 여전히 쓰레기네.’

딸이 쓰러졌는데 한번 보러 오지도 않았다.

‘나쁜 인간 같으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땀에 젖은 로잘린의 이마를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의원은 괜찮다고 했지만, 어린아이가 무리하는 걸 보는 건 괴롭다. 자신도 뭔가 능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천막의 문이 열렸다. 저도 모르게 경계하는 시선으로 그쪽을 바라보는데, 익숙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헤이른이었다. 그는 잠시 아델과 로잘린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를 경계하는 레온과 론슈카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로잘린을 보러 왔다.”

의외로운 말에 아델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상태는 나쁘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예요.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가.”

헤이른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피할까? 아니면.’

갑작스러운 접근에 당황하는 사이, 헤이른은 아델의 앞에 섰다.

“어린아이라면 전부 애틋한 모양이군.”

또 무슨 말을 할 셈인가. 아델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로잘린이 눈을 떴다.

“아버지?”

로잘린의 커다랗고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래.”

“아버지!”

“몸은 좀 괜찮나?”

“괜찮아요!”

로잘린은 헤실거리며 웃었다. 저런 아버지라도 로잘린은 좋은 모양이었다. 아델은 그게 가슴 아팠다.

방긋 웃는 로잘린을 바라보던 헤이른은 다시 등을 돌려 천막을 나갔다. 그러니까 헤이른이 로잘린을 본 시간은 잠시였단 소리다.

“아델 님, 아버지가 저를 보러 왔어요!”

그런데도 로잘린은 들떠서 새처럼 떠들어 댔다. 아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좋은 분이세요!”

어디가!

“음, 그렇구나.”

“잘생기셨고, 작위도 높으시고, 머리도 좋으시고, 정령도 잘 다루세요!”

거기에 인성은 없구나. 아델은 바들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리눌렀다.

* * *

다소 늦은 오후부터 시작한 사냥 대회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투에 사건까지, 둘 다 해결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상대적으로 사냥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수확이 적어.”

몇몇 귀족이 투덜거리며 몰이꾼과 시종들이 쌓아 놓은 사냥감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짧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

“와우, 저쪽은 사냥감이 거진 탔는데? 무섭구나, 무서워.”

“아, 헤이른 경의 작품이군. 정령사란 볼수록 무섭단 말이지.”

수도에선 정령사의 위상이 변두리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마법이 사라진 시대, 정령이라는 존재를 다루는 정령사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은근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귀부인들도 들뜨기 시작했다.

“오늘은 누가 1등을 할까요?”

“그야 헤이른 경 아닐까요? 정령사시잖아요! 아니면 아스펜 경도 있으니까요.”

“록텐 경도 사냥 솜씨는 뛰어나시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루카스 경을 못 이기지 않을까요?”

누군가가 꺼낸 말에 귀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수도에 계실 땐 언제나 사냥 대회에서 1등을 하셨죠.”

삐이이익!

그때 사냥 대회의 끝을 알리는 높은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가득 쌓인 사냥감에 점수를 매겨 1등부터 3등까지 뽑는다.

그런 후에 황제인 셀렉시온이 그들에게 상을 내린다. 그다음부터는 자그마한 축제가 열린다. 먹을 수 있는 짐승은 도축을 하고, 그렇지 않은 짐승은 이나 가죽을 얻어 낸다.

그런 후에 그걸 자신의 레이디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압도적인 1등은 루카스였다.

그는 독특한 은빛 털의 여우를 잡았는데, 보기 드문 짐승이라 귀부인들의 눈이 하나같이 반짝였다.

“아름다운 털이네요.”

피 냄새도 개의치 않고 루카스에게 가까이 다가간 아만다가 여우의 털을 칭찬했다. 대놓고 여우의 가죽을 받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네, 아름다운 가죽입니다. 아델의 목도리를 만들면 어울릴 것 같더군요.”

그러나 루카스는 아만다의 기대에 부응해 주지 않았다.

“아델.”

“루카스 님.”

“선물입니다.”

루카스는 은빛 여우의 가죽을 아델에게 선물했다. 아만다는 그 모습을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바라보았다.

‘알아.’

루카스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으니까.

그래도 그를 잊을 수 없어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이제는 다른 여자가 옆에 있다니. 허무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셀렉시온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케일라가 접근해 물었다.

“둘의 결혼을 허락해 주실 생각인가요?”

“그럴 생각은 없다만.”

“그럼 왜 이대로 내버려 두시는 건가요?”

“아직은 재밌으니까? 약혼했다고 다 결혼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저걸 보라고.”

황제는 헤이른을 가리켰다.

“헤이른 경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있나? 난 말이야. 헤이른 경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

“헤이른 경의 표정이 어떤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케일라가 물었지만, 셀렉시온은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 * *

루카스와 아델은 사냥 대회가 끝나자마자 상품을 받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먼저 씻도록.”

루카스는 그 말을 하고선 아델과 론슈카를 두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곳은 레온의 방이었다.

레온은 방의 한구석에 멍하니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온.”

“스승님.”

돌아보는 레온의 눈가가 붉다. 아무래도 울었던 모양이었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전이라면 눈물은 나약함의 증거라고 했을 테지만, 과연 그럴까?

루카스는 천천히 레온에게 다가갔다.

“스승님.”

재차 루카스를 부른 레온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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