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시녀는 처절하게 빌며 용서해 달라 했지만, 키슈는 냉정했다. 그는 증거를 취합하여 수도 경비대에 시녀를 넘겼고,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루카스의 생각은 달랐다.
“이게 끝은 아니지.”
아델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래, 앞으로도 이런 일은 더 생길 것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절 노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내 모친인 케일라 가주 대리 그리고 헤이른 정도겠지.”
한 사람은 루카스의 어머니, 다른 사람은 론슈카의 아버지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지 않을까 싶었는데 괜한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당장 해결책은 없겠죠?”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을 순 없으니 나름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뭔데요?”
“아델.”
루카스가 아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나와 방을 같이 쓰도록 해.”
“네. …네? 루카스 님과 방을 같, 같이 쓴다고요?”
“그러면 내가 확실히 지켜 줄 수 있다.”
‘그야 그러시겠지요!’
문제는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과연 루카스와 단둘이 방을 쓰면서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무리 그에게 마음이 없어도 저런 미남과 같은 방을 쓰는데 심장이 멀쩡할 리 없었다.
“아니, 그건 좀 무리지 않을까요?”
아델은 속내와는 다르게 침착하게 반박했다.
“어느 부분이 무리인 거지?”
“일단… 침대가 하나에요.”
“하나긴 하지만 충분히 넓다.”
“다른 사람들 눈도 있어요. 이 저택에 저희 두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거라면 잘 시간이 돼서 이쪽으로 몰래 넘어오면 되지 않나. 게다가 우리는 약혼한 사이다. 방을 같이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만.”
이 세계의 귀족은 약혼한 사람들에게 그리 관대한가요! 아델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염려 마라. 그대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
“그거야 저도 잘 알죠…….”
루카스는 신사적인 사람이었고, 말도 없이 아델에게 손을 대진 않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아델 쪽이다.
‘난 남자를 접해 본 적이 없어!’
초등학교를 제외하곤─이번 생에서 재수 없는 헤이른과 있었던 일은 경험으로 치지 않기로 했다─ 여중, 여고, 여대의 트리플 달성! 난감해도 보통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겠지.’
결국은 아델도 루카스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 되자, 아델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커다란 숄을 걸쳤다. 그리고 중간에 난 문을 통해 루카스의 방에 진입했다.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아델의 방과 달리 이 방에선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가구도 최소한으로 존재했고, 있는 장식이라곤 벽에 걸린 검이 전부였다.
마침 루카스는 침대에 앉아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의를 조이고 있던 끈이 반쯤 풀어진 상태라 가슴이 슬쩍 보였다.
‘이, 이런 건 무리야!’
아델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왔군.”
“네.”
아델은 등을 든 채로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침대는 저쪽을 쓰면 된다.”
“네.”
아델은 등을 협탁에 올려 두고 침대의 왼편에 얌전히 앉았다.
“나는 검 손질을 마친 뒤, 씻어야 하니 먼저 자도 된다.”
“그럴게요.”
아델은 최대한 끝에 누워 왼편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검 손질을 끝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루카스가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그다음에는 씻는지 간간이 물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아델은 손으로 얼굴을 덮고 애국가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러자 전생의 모국을 향한 애국심이 솟아나며 심장의 두근거림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역시 애국가!
욕실 문이 다시 열리고 루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새로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는데, 아까의 차림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상태로 루카스가 침대 오른편에 누웠다. 그가 눕는 느낌이 매트리스를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델은 침착하게 눈을 감고 잠을 자기 위해 애썼다. 애국가도 한 번 더 불러 보고, 양도 세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잠이 드는 것에 성공했다.
다행이었다.
‘신이시여, 다행이라는 말은 취소입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난 아델은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분명 잘 때는 왼쪽 끝에서 잤는데, 깨니까 떡하니 중앙에서 자고 있다. 그것뿐이라면 괜찮은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왜, 왜, 왜!’
루카스의 품에 떡하니 안겨 있냔 말이다!
넓은 가슴은 생각보다 딱딱했지만, 그래도 따뜻했다. 저도 모르게 더듬으려는 손을 회수한 아델은 조심스럽게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깨지 않았는지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신선하다. 보고 있는데도 또 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안 된다. 이대로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아델은 눈을 딱 감고 몸을 굴려 루카스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원래 방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꾹 참고 있던 숨이 탁 터져 나왔다.
“으아아!”
앞으로 한동안은 계속 루카스와 같은 침대를 쓰게 될 텐데, 또 이러면 곤란하다. 뭔가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아델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 * *
아델이 떠나고 난 자리, 루카스는 슬며시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품 안에 있던 온기가 사라지자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루카스도 알고 있었다. 아델이 의도적으로 그에게 덤벼든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버릇이 험했기 때문에 그에게까지 닿은 것이었다.
그런 그녀를 끌어안은 건 루카스의 의지였다.
‘왜 그랬을까.’
처음에는 이러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것 같아서 붙잡아 주려는 의도였는데, 결국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아침에도 먼저 깨어났음에도 일어나지 않고 아델이 눈뜨기만을 기다렸다. 당황하는 모습이 제법 보기 좋았다.
‘놀리고 싶었던 걸까?’
자신에게 그런 장난기가 있었던가. 알 수 없었다. 잠시 손을 바라보던 루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아침 식사 시간이 다가온다. 움직일 시간이었다.
* * *
요즘 론슈카는 불만이 많았다. 예전처럼 엄마랑 자고 싶은데, 침실에 들어가려고 하면 레온이 나타나서 그를 끌고 갔다.
하지만 오늘만은 쉽게 끌려가지 않으리라. 론슈카는 입술을 앙다물고 의지를 불태웠다.
일단 레온에게 끌려가는 척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눕는다. 그런 뒤에 레온이 잠드는 걸 확인하고 엄마의 방으로 간다. 엄마는 당연히 론슈카를 환영해 줄 것이다.
그의 계획은 완벽했다.
최근 들어 검술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레온은 금방 잠이 들었고, 그 틈을 타 론슈카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살금살금 엄마의 방으로 향해 문을 열었는데, 어라?
“엄마?”
엄마가 없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델의 암살 시도는 아이들에겐 비밀로 했지만,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는 법이었다.
레온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눈치로, 론슈카는 대놓고 불꽃의 정령을 이용해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방에 엄마가 없으니 그 생각부터 떠오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엄마!”
론슈카는 엄마를 크게 소리쳐 불렀다.
“엄마!”
론슈카가 재차 외치자 허공에 작은 불꽃 여러 개가 나타나 주변으로 흩어졌다. 아델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 소란에 가장 먼저 깨어난 사람은 루카스였다. 그는 곧바로 문을 열고 론슈카에게 달려왔다. 이어 깨어난 아델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론슈카?”
“엄마?”
엄마가 왜 거기서 나와?
론슈카는 배신감 어린 눈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나, 나랑은 같이 안 자 주면서!”
분노의 시선이 루카스에게로 향했다.
“아냐, 론슈카. 모두 오해란다.”
아델은 론슈카와 시선을 맞추고 루카스와 같이 자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루카스 님은 엄마를 지켜 주려고 하신 거야.”
“그럼 나도 같이 잘래.”
그에 대한 론슈카의 답은 결정되어 있었다.
“나도 엄마 지켜 줄 수 있어!”
“하지만 위험해.”
“엄마도 위험하잖아!”
아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론슈카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내내 지켜만 보던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같이 자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그쪽은 론슈카는 해칠 생각이 없을 거야. 그러니 오히려 암살 시도가 줄어들 수도 있겠지.”
“론슈카를 이용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도 본인이 저렇게 원하는데.”
론슈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델을 바라보았다. 결국 아델은 져 줄 수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레온에게도 한번 물어볼까, 론슈카?”
“레온은 왜?”
“레온도 같이 자고 싶을 수도 있잖아.”
론슈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델의 행동을 막지는 않았다. 그리고 레온은 아델의 제안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저도 같이 잘래요.”
수줍게 말하고는 베개를 들고 루카스의 방으로 건너왔다. 오른편에는 루카스, 중간에는 레온과 론슈카, 왼편에는 아델이 누웠다.
침대가 크다더니, 정말 컸다. 넷이나 누웠는데도 그렇게 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좋다.”
론슈카가 아델에게 안겨 들며 말했다.
“그래, 오랜만이네.”
아델은 론슈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렇게 넷이 한 침대에 누워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럼 잘 자요.”
이렇게 하루가 또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