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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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

황제가 공인한 루카스와 헤이른의 결투 소식이 널리 퍼졌다. 그러니 그 이야기가 헤이른의 가문에 흘러 들어가는 것도 당연했다.

“결투라니요!”

웨더필드가의 장로 중 하나가 흥분해서 외쳤다.

“고작 평민 하나 때문에 헤이른 님께서 결투를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헤이른은 뜰썩이는 장로들을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를 눈치챈 이는 아직 없었다.

평소에는 언제나 숙이고 살던 이들이 기회 하나 잡았다고 설치는 모양이 추하다.

“평민의 자식이 뛰어나 봤자 얼마나 뛰어나겠습니까! 차라리 방계에서 뛰어난 아이를 데려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방계 쪽에서도 재능이 있는 아이는 있습니다. 안 그래도 최근 리슈라는 아이가 불꽃의 정령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를 시작으로 장로들이 앞 다투어 아이들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에 로잘린의 이름은 없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로잘린은 불꽃을 잘 다루지 못할뿐더러, 헤이른의 눈 밖에 났다는 걸 말이다.

로잘린의 역할은 좋은 가문과 연결 고리를 만드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만.”

한참을 장로들이 떠들어 대는 걸 보고만 있던 헤이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하도록. 누가 보면 그대들이 가주인 줄 알겠군그래?”

그 말과 함께 방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장로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현 가주는 나고, 후계자는 내가 정한다. 이제 불꽃을 다루기 시작한 애송이는 필요 없어. 가문의 부흥을 위해 필요한 건 천재다. 범재나 수재가 아니란 말이다.”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는데도 압박감이 느껴졌다. 장로들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다음 후계자는 론슈카다. 그를 바꾸고 싶다면 적어도 중급 정령 이상은 소환이 가능한 아이를 데려오도록.”

“그, 그런 아이가 있을 리 있습니까?”

누군가 반박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싸늘했다.

“없으면 조용히 하도록.”

모처럼 모인 장로들은 오늘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대신 영지의 근황과 웨더필드가에서 훈련받는 정령사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조용히 열리며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만.”

“네, 저도 듣지 못했습니다. 사전 예고 없이 찾아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무례하다. 이럴 경우에는 굳이 만나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헤이른은 무슨 바람인지 손님의 정체를 물어 왔다.

“그래서 누구지?”

“프레데릭가의 가주 대리, 케일라 님이십니다.”

제법 거물이다.

“일단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하도록.”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쉽게 만나 줄 생각은 없었다.

“네.”

공손히 대답한 집사가 밖으로 나가고, 장로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당장이라도 케일라를 만나러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헤이른은 원칙대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헤이른은 접대실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서자, 케일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이른을 본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격상 가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케일라 가주 대리.”

“안녕하세요, 헤이른 경. 얼굴 한번 보기 어렵군요.”

그 말에 헤이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케일라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제야 케일라 또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케일라는 깊게 숨을 내쉬고는 헤이른에게 말했다.

“헤이른 경, 경에게는 론슈카란 아이가 필요한 거지요?”

이미 전부 조사를 하고 온 것이다. 그 사실이 불쾌했지만, 어쩔 수 있나. 소문이 빠르게 도는 사교계 특성상 이 정도는 퍼져 나갈 걸 각오했다.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아델이란 여자가 없는 쪽이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루카스와 연결 고리가 되는 아델만 사라진다면 헤이른은 좀 더 쉽게 론슈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어쩌면 가장 편리하고 빠른 방법일 것이다. 그걸 아는데도 선뜻 대답이 나가지 않았다.

오래전, 헤이른을 보고 수줍게 웃던 아델을 기억한다. 멍청한 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헤이른은 아델에게 손을 댔다.

이후 다시 만난 아델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달라지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었다.

웃음. 약혼식에서 루카스를 보며 웃는 모습은 예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왜 갑자기 그게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헤이른은 손가락으로 무릎을 툭툭 쳤다.

‘뭐, 괜찮겠지.’

헤이른이 생각에 잠겨 있는 와중에도 케일라의 말은 이어졌다.

“우리의 목적은 같습니다. 저는 루카스에게서 그 여자를 떼어 놓고 싶고, 경은 그 여자의 아이를 탐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손을 잡자는 이야기였다.

“마침 적합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들을 찾았어요. 돈이면 무엇이든 해 주는 사람들이랍니다. 헤이른 경은 약간의 도움만 주면 됩니다.”

케일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헤이른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그가 자신의 의견을 따를 것이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케일라 가주 대리.”

“네?”

“안타깝지만 목적이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군요.”

“일치하지 않는다고요?”

케일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요?”

“새삼 설명하기는 귀찮지만, 론슈카는 다소 독특한 아이입니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아이이지요. 그렇기에 제 손으로 그녀를 해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저 혼자 해결하라는 소리인가요?”

헤이른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했다. 위험한 일에는 손을 대지 않고, 그저 원하는 것만 쏙 뽑아 가지려는 것이다.

그 모습이 괘씸했지만, 케일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헤이른 경이 이렇게 겁이 많은 줄 몰랐네요.”

“손을 보태 주지 못해 안타깝군요. 그러나 응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연락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케일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마음이라.

“알 수 없군.”

헤이른은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 * *

깊은 밤. 아델은 잠에 취해 있었다. 예전이라면 론슈카와 같이 잤을 텐데, 오늘은 혼자였다. 레온이 론슈카를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론슈카는 아델의 침대 위에 오르고자 애를 썼으나, 반 이상은 레온에게 끌려가 사라졌다.

‘하긴 론슈카도 이제 따로 잘 나이지.’

조금 섭섭하긴 해도, 혼자 자는 걸 익히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델은 고개를 끄덕거리다 침대 위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바람 소리.

‘밖에서 바람이 부나?’

아까만 해도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별생각 없이 바람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설렁줄이 눈에 들어왔다.

설렁줄은 평소와 다름없이 늘어져 있다 이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아델은 눈살을 찌푸리며 설렁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설렁줄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뱀!’

아델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설렁줄과 멀어지기 위해 애썼다.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뱀을 앞에 두고 돌발행위를 하는 것은 다소 위험할지도 모른다.

‘뱀, 뱀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했더라?’

당황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루카스가 소드마스터라는 것이 생각났다. 소드마스터는 원하면 오감을 조정할 수도 있다 들었다.

“루카스 님.”

아델은 작게 루카스의 이름을 불렀다.

“루카스 님.”

소리를 좀 더 높여 재차 불렀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사이에 설렁줄을 타고 내려온 뱀이 아델을 향해 기어 오기 시작했다.

머리 모양을 보아하니 독사인 것 같았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아델은 손으로 뒤를 더듬어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뱀과의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긴장감에 숨이 막혀 왔다.

그때, 루카스와 그녀의 방 사이에 난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사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자 몸에 긴장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뱀이 뛰어오르며 날카로운 이빨로 아델을 노렸다. 하지만 아델이 물리는 일은 없었다. 루카스가 손을 뻗어 뱀의 머리를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괜찮나?”

“네, 네. 괜찮아요.”

아델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론슈카와 같이 자지 않기를 잘했다. 이런 위험을 혼자만 겪어서 다행이다. 뒤늦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독사로군.”

“설렁줄을 타고 내려왔어요.”

아델은 전생에 보았던 추리 소설을 떠올렸다. 거기에도 뱀을 이용한 독살 사건이 하나 있었다.

루카스는 그가 잡아챈 뱀의 머리를 꺾어 혹시 모를 위험을 제거한 뒤, 그 사체를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이후 잠든 이들을 깨워 내부 조사에 들어갔지만 범인으로 추측되는 사람은 찾아내지 못했다.

“좀 더 강경한 방법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키슈는 그리 말하며 모든 걸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부의 정보를 돈을 받고 팔아넘긴 시녀 하나를 잡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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