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아델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가만히 침묵만 지키고 있는데, 루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아델, 그대는 론슈카의 행복을 원하지. 목적이 일치한다고 여겼는데, 최근 들어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이 들더군.”
루카스가 아델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를 원망하나?”
아델은 고개를 내저었다.
“원망하지 않아요.”
“하지만 떠날 생각은 하고 있지 않나.”
“…조금은요.”
“어디로 가려고?”
“어디든 상관없어요.”
론슈카와 둘이서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그럼 약속하지. 이 모든 일이 해결되는 날, 그대가 원하는 대로 어디든 보내 주지.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재산도 주겠다.”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재산.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돈으로 유혹하다니, 그럼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잖아!
아델은 새침한 얼굴로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그때까지 힘내 보죠.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물론이지. 이번에도 새끼손가락을 걸면 되나?”
이번에는 루카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게 예전보다는 더 친해졌다는 의미 같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떠올랐다.
“네.”
아델은 저 또한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이로써 약속은 이루어졌고, 절대 어기시면 안 돼요.”
“어기면 어떻게 되지?”
“큰 벌을 받을 거예요.”
그 말에 루카스가 되물었다.
“벌은 누가 주는데?”
“ⵈ하늘이요?”
“신께서?”
“그렇겠죠?”
“그대도 잘 모르는 거로군.”
내내 굳어 있던 루카스의 표정이 풀리며 미소가 떠올랐다.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그 뒤로도 둘은 서재 한편에 웅크리고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소설에서는 그냥 조연에 불과할지라도 현실에선 그 나름대로 각자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걸 깨닫고 나니 새삼 현실감이 느껴졌다.
아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루카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놀랄 만한 일인데도 루카스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외려 손길을 더 자세히 느끼려는 듯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는 밤이었다.
* * *
황궁 파티가 끝났다고 해서 할 일이 전부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 헤이른과의 결투도 남아 있었고, 소소한 모임 초대장은 계속 날아왔다.
그 때문에 아델도 루카스도 아이들에게 조금 소홀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늘 함께했던 식사 자리에 레온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 아픈가 싶어 아이를 찾아갔지만, 괜찮다는 답만 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 리가.’
아직 레온은 어리다. 생일이 지나지 않아 여덟 살, 기껏해야 초등학교 1학년 정도였다.
이제 막 학교에 적응해 가며 보호자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 아무리 레온이 성숙하다 하더라도 그를 잊어서는 안 됐다.
똑똑.
“레온?”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있었으나, 그러진 않았다.
대신 루카스의 등을 떠밀어 보았지만, 아델이 불렀을 때와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론슈카가 그대로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안쪽에서 잠근 모양이었다.
론슈카는 문의 일부를 그대로 불태워 버리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론슈카?”
당황한 아델이 아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론슈카는 서슴없이 움직였다.
“일단 놔둬 보지.”
론슈카라면 레온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때문에 아델도 한 발자국 물러나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 * *
처음 수도에 올 때부터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과거 초라하게 도망치듯 떠나왔던 수도에 이번에는 제대로 차려입고 마차를 탄 채 들어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레온이 이룬 것이 아니었다. 스승인 루카스의 것이었다.
자신은 아직도 어리고 나약하며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주변 환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악몽을 꾸는 날이 점점 잦아졌다.
레온의 가문은 오랜 시간 버텨 온 곳이었지만, 여러 가문에서 공격해 오는 걸 버텨 낼 수는 없었다.
황제에게 탄원서를 내 보아도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기에 그의 가문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는 싸우다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셨다가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사교계의 꽃이었던 하나뿐인 누나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직계가 무너져 내리자마자 방계들이 덤벼들어 다른 이들이 털어 가고 남은 것을 나눠 가졌다. 거기에 어린 레온의 의사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레온을 죽이려 들었다.
‘아버지는 모두에게 공평하라 하셨다.’
직계와 방계를 차별하지 않고,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도우려 하셨다.
‘어머니는 사람을 믿으라 하셨다.’
아아, 어머니.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전설 속의 추악한 몬스터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나. 누나는 과연 살아 있을까. 어떻게든 같이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자신은 형편없는 도망자였다. 그걸 알기에 언제나 마음을 다져 왔지만, 최근엔 그걸 잊어 가고 있었다.
듬직한 스승님, 상냥한 아델 님, 툴툴대면서도 말은 받아 주는 론슈카.
새로운 가족이 생긴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얼마 전에는 시중인들 몰래 빠져나가 옛 저택 터에 가 보았다. 그곳에는 불타 버린 옛 저택 대신 새로운 저택이 세워져 있었다.
가슴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게 분노구나.’
몇 번이고 되새겼던 감정이 레온을 좀먹었다. 자신은 행복할 자격이 없다.
‘스승님과 가족이 되고 싶다니.’
자신의 가족은 이미 땅에 묻혀 있는데. 레온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어디선가 타닥타닥-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니, 문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불은 문고리 주변만을 태우고 잦아들었다.
“론슈카.”
레온은 퀭한 눈으로 론슈카를 바라보았다.
“왜 아침 먹으러 안 나와?”
아이가 태연히 물어 왔다.
론슈카는 언제나 똑같았다. 엄마 바라기. 하지만 그런 그가 불행해 보인 적은 없었다.
아델은 충분히 좋은 엄마였고, 론슈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려고 했다. 마치 자신의 가족들처럼.
“입맛이 없어서.”
레온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왜? 먹는 거 좋아하잖아.”
“나도 가끔은 입맛 없을 때가 있어.”
“왜?”
론슈카는 끊임없이 물어 왔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대답했지만, 질문이 길어질수록 점점 화가 치밀었다.
‘넌 아직 남아 있는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만해!”
레온은 론슈카에게 소리를 높였다.
“그만하라고!”
그리고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나가!”
“싫은데.”
“나가라고!”
“싫다니까.”
론슈카는 외려 가까이 다가와 레온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아파?”
“난 아픈 게 아니라,”
레온은 고개를 들어 론슈카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프잖아.”
론슈카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나도 예전엔 아팠거든.”
아프다고 하는 게 몸은 아니었으리라. 레온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아플 것 같았어. 그런데 아니더라고.”
서툰 위로가 레온을 감싸 안았다.
“난 혼자가 아니었어. 너도 그렇잖아.”
위로도 제대로 못 한다. 그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도 실처럼 엉망으로 얽혀 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엄마가 걱정하고 있어. 그 사람도 그렇고.”
“스승님이야.”
호칭을 정정해 줬지만, 론슈카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스승님께는 언제나 도움만 받아 왔는데.’
폐를 끼쳐 버렸다. 복수를 위한 마음을 다지는 데 있어 스승님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말이다.
“내가 잘못했구나.”
“알면 됐어.”
“넌 너무 가차 없어.”
레온이 핀잔을 주었지만, 론슈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했다. 그는 그대로 일어나 문을 활짝 열었다.
“괜찮대.”
그 말에 아델과 루카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레온.”
“레온! 맙소사, 안색이 나쁘네.”
루카스도 아델도 레온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카스와 달리 아델은 아는 척을 해선 안 된다. 아직 그녀는 레온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직접적으로 도움도 주지 못한다. 아델은 그게 안타까웠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론슈카가 레온을 도와주려 하였다. 비록 이 한 번으로 레온이 크게 변하진 않겠지만, 둘 다 조금씩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레온.”
아델은 레온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레온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아.”
레온의 시선이 아델에게 닿아 왔다.
“레온의 스승님은 레온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제자를 사랑한단다. 그렇죠?”
아델의 말에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제자를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스승이 몇이나 될까. 그 마음만은 진실된 것이었다.
그러니 레온이 혼자서 앓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델은 그렇게 생각했다.